<사순 제2주일>
제1독서
<하느님께서 충성스러운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셨다.>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15,5-12.17-18
그 무렵 하느님께서 5 아브람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말씀하셨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너의 후손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6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 7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주님이다. 이 땅을 너에게 주어 차지하게 하려고, 너를 칼데아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이다.”
8 아브람이 “주 하느님, 제가 그것을 차지하리라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묻자, 9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삼 년 된 암송아지 한 마리와 삼 년 된 암염소 한 마리와 삼 년 된 숫양 한 마리, 그리고 산비둘기 한 마리와 어린 집비둘기 한 마리를 나에게 가져오너라.”
10 그는 이 모든 것을 주님께 가져와서 반으로 잘라, 잘린 반쪽들을 마주 보게 차려 놓았다. 그러나 날짐승들은 자르지 않았다. 11 맹금들이 죽은 짐승들 위로 날아들자, 아브람은 그것들을 쫓아냈다. 12 해 질 무렵, 아브람 위로 깊은 잠이 쏟아지는데, 공포와 짙은 암흑이 그를 휩쌌다.
17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자, 연기 뿜는 화덕과 타오르는 횃불이 그 쪼개 놓은 짐승들 사이로 지나갔다. 18 그날 주님께서는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집트 강에서 큰 강 곧 유프라테스 강까지 이르는 이 땅을 너의 후손에게 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27(26),1.7-8.9ㄱㄴㄷㅁ.13-14(◎ 1ㄱ)
◎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로다.
○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
○ 들으소서, 주님, 제가 큰 소리로 부르짖나이다.
자비를 베푸시어 제게 응답하소서.
“너희는 내 얼굴을 찾아라.” 하신 주님을 제가 생각하나이다.
주님, 제가 주님 얼굴을 찾고 있나이다. ◎
○ 주님 얼굴을 제게서 감추지 마시고,
분노하며 주님 종을 물리치지 마소서.
주님은 저의 도움이시옵니다. 저를 내쫓지 마소서. ◎
○ 저는 산 이들의 땅에서 주님의 선하심을 보리라 믿나이다.
주님께 바라라. 네 마음 굳세고 꿋꿋해져라. 주님께 바라라. ◎
제2독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말씀입니다. 3,17─4,1 또는 3,20─4,1
짧은 독서를 할 때에는 < > 부분을 생략한다.
17 형제 여러분, <다 함께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이 우리를 본보기로 삼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다른 이들도 눈여겨보십시오. 18 내가 이미 여러분에게 자주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데,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19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이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
20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세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합니다. 21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4,1 그러므로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형제 여러분, 나의 기쁨이며 화관인 여러분, 이렇게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환호송
루카 9,35
◎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 빛나는 구름 속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이 들려왔도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복음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졌다.>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28ㄴ-36
그때에 28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 29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30 그리고 두 사람이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31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 32 베드로와 그 동료들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과 함께 서 있는 두 사람도 보았다.
33 그 두 사람이 예수님에게서 떠나려고 할 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34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는데 구름이 일더니 그들을 덮었다. 그들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자 제자들은 그만 겁이 났다.
35 이어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36 이러한 소리가 울린 뒤에는 예수님만 보였다.
제자들은 침묵을 지켜, 자기들이 본 것을 그때에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영성체송
마태 17,5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해설과 묵상
제1독서(창세 15,5-12.17-18) 해설
<하느님께서 충성스런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신다>
이 대목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시는 장면이며 야훼계 전승과 엘로힘계 전승에 의해 기술되었다(제관계에 속하는 구절은 17절이다.). 여기에서 보면 하느님께서는 온전히 당신 호의로써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어 주신다.
15,5-7 부분에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장차 베풀어 주실 약속이 나온다. 12,2에서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고 하신 약속과 똑같은 약속이다. 이 첫째 말씀 부분에 하느님께서 무엇 때문에 아브라함을 자기 고향으로부터 떠나도록 하셨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는 둘째 말씀이 덧붙여진다. 그 이유는 그 땅을 아브라함에게 주어 차지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죽기 전에 그 땅의 귀퉁이 한 조각밖에는 차지하지 못했다. 자기 아내 무덤을 쓴 막펠라 동굴이 있는 밭이 고작이었던 것이다(참조. 창세 23 1-20).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믿었고 하느님께서는 그 믿음을 보시고 아브라함을 ‘올바르다.’고 신임해 주셨다. 사람으로서는 사람을 만들어 내고 그 사람의 주인(주님)이고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에게 애착하고 사람에게 복을 주고 싶어 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무조건 따르는 것이 합당하고 올바른 태도이다. 이 대목이 바오로가 하느님으로부터 공으로 받은 은총으로 이루어지는 ‘올바른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인용하는 기본적 본문 가운데 하나이다(로마 4,1-25).
둘째 부분(8-18절)에는 계약이 체결되는 장면이 나온다. 계약을 체결하는 이 예절은 당시 중동에서 흔히 사용되던 예절과 비슷하다. 그 예절 형태는 동물을 반으로 갈라놓고 계약을 맺은 쌍방이 그 사이를 통과하면서 만일 계약을 위반하면 반으로 갈라져 죽은 동물과 같은 신세가 될 것이라는 각오를 다짐하게끔 하였다(참조. 예레 34,18). 그러나 여기에서는 하느님 혼자 불의 형태로 반으로 쪼개진 동물 사이로 지나가시고 그 사이 아브라함은 ‘신비경’에 빠진다. 마치 아담이 하느님께서 자기 옆구리에서 하와를 창조하실 적에 잠에 떨어진 것과 비슷하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일방적으로 계약을 체결하여 주심으로써 약속을 실현해 주시는 분이 오로지 당신뿐임을 밝히 드러내신다.
나일 강에서 유프라테스 강에 이르는 땅을 주실 분은 하느님뿐이시다. 히브리인들은 수동적일 따름이고 하느님께서 내려 주시는 복을 다소곳이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었다.
사람에게 유익을 주고 사람들이 꾸리는 사회를 더욱 따뜻하게 가꾸어 주는 온갖 좋은 것과 참된 복은 오로지 하느님께로부터 나오고 하느님만이 주실 수가 있다. 따라서 사람은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고 주님이신 아버지 하느님께 신뢰하며 그 말씀을 실천하도록 노력함이 마땅하다. 자신의 능력을 뽐내는 허영심, 경쟁심, 사기 따위의 감정들은 다른 사람의 인격을 파괴할 뿐 결코 완성해 주지는 못한다.
화답송(시편 27[26],1.7-8.9ㄱㄴㄷㅁ.13-14[◎ 1ㄱ]) 해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나이다>
이 시편은 주님을 영접하는 시편이다. 보잘것없게 보이고 천하게 느껴지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하느님께서 가장 애착하시는 사람들이다. 하느님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다. 그 하찮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무지와 아울러 무능력을 인정하고 자신 힘으로는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음을 절절히 느껴 하느님 아버지만이 자기 구원자요 생명의 바위임을 알고 그분께 온 힘으로 매달린다. 이것이 사람으로서 유일하게 취할 수 있는 합당한 자세다. 이런 겸허하고 진실한 사람들이라야 하느님께서 당신의 복으로 채워 줄 수 있고 그들을 유혹에 빠지지 않게 도와주며 악에서 구해 줄 수 있으시다.
제2독서(필리 3,17-4,1 또는 3,20-4,1) 해설
<그리스도께서 당신 광명의 육신을 닮게 하시리라>
이 대목에서 바오로는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이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고 말한다(18-19절). 여기서는 아마 ‘십자가의 길’이 아닌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겠다고 고집하는 ‘유다인’들과 그들의 주장을 따르는 이방인 출신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들이 십자가의 원수인 까닭은 십자가로 이루어지는 구원의 능력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바오로는 ‘속된 자기 잇속만을 챙기는 사람들’과 ‘희망을 가지고 새로운 세상을 가꾸어 가는 사람들’을 대조한다. 바오로는 남보다 뛰어나서 재력과 권력을 자랑하고 약자들을 억누르고 싶어 하는 무리들에게 올바르게 사는 길이 십자가의 길밖에 없음을 깨닫게 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살아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 모든 사람 앞에 영광스럽게 드러날 것임을 암시해 준다.
복음(루카 9,28ㄴ-36) 해설
<기도하실 때 그분의 모습이 달라졌다>
마르코 복음서와 마태오 복음서를 존중하면서도 루카 복음서 저자는 예수님의 영광스런 변모 이야기를 더 잘 알아듣게 하려고 자기의 고유한 몇 가지 요소들을 덧붙인다.
먼저 루카 복음서 저자는 예수께서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음을 밝혀 준다(28절). 이것은 루카 복음서 저자가 즐겨 사용하는 주제이다(참조. 3,21; 5,16; 6,12; 9,18; 11,1; 22,41). 이 주제는 항상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중대한 순간이 임박했을 때 등장한다. 이때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십자가 나무에 매달리러 예루살렘으로 가신다. 제자들도 예수님의 뒤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갈 것이고 뒤에 가서 자기들이 받은 소명을 다하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달게 받아들일 것이다.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를 것이다(9,23).
루카 복음서 저자는 또한 “두 사람이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고 덧붙인다. 이 표현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24,4)에 나오는 표현과 같다. 여기에 등장하는 모세와 엘리야는 율법과 예언서들을 대표한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이루어진다(참조. 1코린 15,3-4). 그러나 모세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집트 탈출 사건을 통하여 약속된 땅으로 인도한 인물이고 엘리야는 불붙은 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인물임을 잊을 수 없다(참조. 2열왕 2,11-12). 그러니 모세와 엘리야가 미리 나타낸 바를 그리스도께서 완전하게 실현하셨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하느님의 목소리’도 다른 공관 복음서들과는 약간 다르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다.” 루카 3,22에서도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 표현은 시편 2,7에 나오는 ‘메시아-왕’과 똑같은 표현이다. 이제 그 목소리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라고 정확히 말한다. 이 칭호는, 루카 23,35에서 사람들이 십자가에 매달리신 그리스도께 던진 유혹하는 말로 다시 되풀이되지만, 이사 42,1(참조. 49,1)에 나오는 고통 받는 종을 상기시킨다. 루카 복음서 저자는 이 표현으로 그리스도를 인류 구속을 위해 죽어야 할 ‘종’과 동일시하고 있다.
이제 예수님과 당신 제자들은 고통과 십자가의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그것을 통과하여 하느님과 친밀하고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된다. 즉, 하느님의 영광인 부활에 도달하게 된다. 오늘도 세상 끝 날까지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사람들의 인생은 많은 사람들을 해방하고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의 죽음을 당할 운명에 처해 있다. 그러나 그 운명은 반드시 부활의 영광에 도달할 운명이다.
묵상
<그리스도인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
흔히 그리스도인들은 하늘나라에 영원한 고향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으로 현실과 역사를 나 몰라라 하는 잘못을 곧잘 저지르곤 한다. 그래서 자칫하면 인간적인 사회건설과 사회적인 책임에 자기 할 일을 다 하지 못하고 만다. 베드로도 예수님의 변모 때 “스승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좋겠습니다.”라고 커다란 감동에 휩싸여 외쳤으면서도, 죽으러 가시는 예수를 놀래서 말린 적이 있었다. 이번 주일 독서에서는 그리스도인은 장차 변형되고 영광을 차지할 운명을 가지고 있음이 사실이지만, 그 전에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나날이 들이닥치는 시련과 유혹을 거슬러 싸우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분명하게 드러난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 고통과 수모와 십자가와 죽음까지 당할 각오를 해야 한다고 분명히 말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현실과 역사를 외면하는 도피처가 아니다. 그와 정반대로 사람들의 삶을 비추어 주고 바로 그 삶 안에서 발효되고 적용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지금 여기에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당신을 계시하시고 당신이 시작한 구원계획을 실현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펼쳐진 구원의 사건들을 가려내고 용기 있는 자세로 자기 자신을 버릴 수 있어야 하며, 사건들 속으로 뛰어들 수 있어야 한다. 그럴 경우 예전에 누리던 안일하고 편안한 생활로부터 뛰쳐나와 보장되지 않는 미래에 자신을 내맡기라는 요구에 직면하게 된다. 구원사건 속에 뛰어들라는 하느님의 말씀은 바로 우리 자신을 포기하라는 뜻이다. 오로지 하느님만이 가장 안전한 피난처와 굳건한 바위임을 믿고 자유를 얻기 위해 온갖 난관을 헤치고 앞으로 달려가는 것이 참된 신앙인의 자세요, 참된 신앙생활이다.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길>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이 온전히 실현되고 하느님의 구원 활동 전체가 펼쳐진다. 즉, 그분이 우리와 똑같은 인간 조건을 고스란히 당신 것으로 삼으신 것이다. “이 자녀들이 피와 살을 나누었듯이, 예수께서도 그들과 함께 피와 살을 나누어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권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당신의 죽음으로 파멸시키시고,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한평생 종살이에 얽매여 있는 이들을 풀어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히브 2,14)
그분은 나약한 인간 본성을 귀찮다 하지 않으시고 고난과 고통을 달게 받고 구체적인 당신 삶으로써 사람들과 연대를 맺고자 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종의 신분을 취하여 사람들이 악에서 벗어나도록 각 사람 안에 당신 모습을 새겨 주셨다.
예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실 때부터 당신 계획을 선언하셨는데 그 계획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짓눌리는 사람들을 해방하려는 계획이었다(참조. 루카 4,18-19). 이 같은 도전적이고 혁명적인 선언은 팔레스타인 모든 도시와 읍내에 불길처럼 퍼졌다. 예수께서는 사탄이 쳐놓은 질긴 올가미와 사슬을 끊고 분열과 증오의 어두운 세력으로부터 사람들을 벗어나게 하는 구원사업을 완수하려 하신다. 즉, 그분은 아주 새로운 생활방식을 인류역사 안에 들여보내셨다.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
사람들이 정말로 하느님과 친밀하게 만나려면 이기적인 기도와 신심을 벗어 버릴 줄 알아야 한다. 또한 다른 사람들을 제압하고 그 위에 군림하여 지배하고 싶은 욕구를 버리고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온전히 내주고 희생하여 그리스도처럼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달하여야 한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사람들이 바로 세상에서 무시와 천대를 받는 사람임을 깨달아 기쁜 마음으로 그들을 섬김으로써 하느님의 자녀로서 받은 소명을 다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 걷는 것이다. 그 길은 다른 외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내 마음과 몸을 다 바쳐 하느님의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는 길이다.
복음해설(2)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9,28-36)
이 이야기는 마르 9,2-8 및 마태 17,10-8과 병행한다. 문학유형을 말하자면, 신문 보도 형식이 아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들에서 중요한 것은 세부 사항을 정확하게 기술하는 일이 아니고, 공동체의 영적 체험을 알기 쉽게 전달하는 일이다. 공동체는 자기 영적 체험을 예언자들로부터 물려받은 문학유형들과 당시에 유행하던 묵시문학적 흐름 안에서 사용하던 문학유형들로 표현했다. 이 이야기에서는 일어난 일을 정확하게 보도하려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순전한 환상(불가지론)을 전달하려 하지도 않는다. 이 이야기는 역사적 진실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하느님의 계시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해설의 목적은 문학유형을 폭넓게 다루는 데 있지 않다. 우리는 단지 이 이야기가 구약의 이야기들에서 유래한다는 점을 말하고자 할 따름이다. 이 이야기의 형식과 목적은 이른바 예수께서 나타나신 이야기들과 매우 비슷하다. 예로서, 마르코 복음서에서 물 위를 걷는 예수님과 세례를 받으시는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들 수 있다(참조. 마르 6,45-52; 1,9-11). 이는 중요한 일과 사건을 이야기하는 식의 신학 유형으로 표현한다고 말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어떤 분이며 그분이 무슨 일을 하시는지를 알리는 일이다. 즉 이야기하는 형식의 그리스도론이라 할 수 있다.
이 이야기는 예수부활 이후에 일어난 일을 소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일을 연대적으로 예수께서 지상에 살아계실 적에 일어난 것처럼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테일러가 말하는 것처럼, 그런 가정은 베드로가 하는 말과 반대된다(마르 9,33. ‘초막 셋’). 그렇지만 우리는 후대에 가서 전례에 적용된 내용들이 이야기 속으로 흘러들어왔을 수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즉 ‘여드레쯤 되었을 때’(28절)라는 말은 장막절을 여드레 동안 지낸 예절을 암시할 것이다. 그리고 ‘엿새’(마르 9,2)는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은 다음 지나간 엿새를 암시할 것이다(참조. 탈출 24,15 이하).
이 대목은 9,26에 나오는 ‘영광’(‘독사’)이라는 개념을 다시 취한다. 그 개념이 여기에서는 열쇠가 되는 낱말이다. 이 개념은 9,18-27에 이미 나온 개념이다.
이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ㄱ) 연대적인 틀(‘여드레쯤 되었을 때’)이 나온다. 예수님의 유아기 복음에서와 같다(루카 1,5-2,44). ㄴ) 예수님의 모습이 변하고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이 등장한다(29-31절). ㄷ) 일어난 일과 관련하여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에 대하여 말한다(32절). ㄹ) 베드로가 개입한다(33절). ㅁ) 구름이 일고 목소리가 들린다(34-35절). ㅂ) 제자들이 자기들이 본 것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침묵을 지킨다(36절).
28절. “이 말씀을 하시고 여드레쯤 되었을 때…” 예수님의 모습이 변한 사건은 당신이 방금 하신 말씀, 즉 수난과 영광에 관한 말씀과 관련이 있다. 변모 사건은 예수께서 앞에서 주신 전언을 확인해 준다. 즉 고통은 영광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이다. 마르코와 달리, 루카는 예수께서 기도하러 산에 오르셨다고 말한다(루카 3,21; 9,18의 주 참조.). 그리고 당신이 사랑하던 세 명의 제자를 증인으로 데리고 가셨다고 말한다(참조. 8,51; 마르 13,3; 14,33). 이스라엘의 전승에서 산은, 이집트 탈출 이야기들에서처럼(참조. 탈출 33,18-23), 하느님과 만나는 장소다. 루카는 예수께 대한 인격적인 체험에 관심을 기울인다. 예수께서 모습이 변하고 기도에 몰두하고 계시는 사이에 하늘로부터 빛을 받으신다. 당신이 ‘떠나시기’ 전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 그 ‘떠나가심’(그리스어로 ‘엑소도스’)은 당신의 죽음을 뜻한다(참조. 지혜 3,2; 7,6; 2베드 1,15). 예수께서는 예언자들을 죽인 도시 예루살렘에서 죽임을 당하실 것이다(참조. 13,33-34).
29-31절: 루카는 마르 9,3에 나오는 옷에 대한 묘사를 더 시적인 모양으로 바꾸어 놓는다(참조. 시편 104,2). 예수님 모습이 변하고 옷이 변한 상태는 독자들을 초자연적인 분위기속으로 들여놓는다(참조. 사도 1,10; 2마카 3,26; 2코린 5,2-4).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람이 하느님의 영광 속으로 들어갈 때에만 변한다고 생각했다(참조. 다니 12,3). 이 이야기는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의 영광 앞에서 머물러 있던 일, 하느님과 만난 다음 그의 얼굴이 빛나던 일을 상기시킨다(참조. 탈출 24,12-18; 34,29-35). 더구나 예수님 시대의 묵시문학적 개념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마지막 때에 모습이 변할 것이었다(참조. 1코린 15). 이렇게 예수님의 변모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앞당겨 보여준다. 그와 같은 예수님의 천상적 모습과 그 분위기 속에서 제자들은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하는 것을 본다. 그 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엘리야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엘리야의 돌아옴에 관해서는, 참조. 말라 3,23; 루카 1,17; 3,16; 7,19와 그 주 참조). 모세와 관련해서는, 하느님이 그와 같은 예언자를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셨다(참조. 신명 18,15.18; 1마카 4,46; 14,41). 따라서 모세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다리던 예언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어떤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를 기다리기까지 했다. 어떤 전승들에 따르면 모세도 엘리야처럼 하늘로 들려 올라갔다고 여겼다. 성경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예수님 변모 이야기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율법과 예언자들’을 대신한다고 생각한다(참조. 루카 16,29-31; 24,27). 이는 이 본문의 또 다른 상징적 가치를 말해주고 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 이는 일반적인 번역이다. 그러나 그리스어 본문은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져야 할(‘플레로운’) ‘엑소도스’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엑소도스’라는 낱말은 루카의 작품 전체에서 단 한번밖에 나오지 않는다. 이 사실은 구체적인 목적, 즉 예수께서 하신 일을 제시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리키고 있다. 예수께서는 새로운 모세로서 할 일을 하셨다. 이 생각은 신약성경이나 루카 복음서에서도 낯설지 않다.
32절: 루카는 제자들이 잠에 빠져 있었다고 말한다. 제자들은 깨어나 놀라운 일을 체험한다. 그런 체험을 묵시문학 전승들이 이야기하고 있다(참조. 다니 10,9). 베드로는 얼떨결에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예수님께, 하나는 모세에게, 하나는 엘리야에게 드리면 좋겠다는 뜬금없는 제안을 한다. 베드로는 너무나 놀라고 황홀한 나머지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다.”라는 구절은 제자들을 모세나 엘리야처럼 권위를 가진 증인으로 만든다. ‘하느님의 영광’(히브리어로 ‘카보드’, 그리스어로 ‘독사’)은 구약성경의 개념으로서 하느님의 권능(구원하시는 권능)이 나타나 빛남을 가리킨다. 그런 나타남의 특권적인 자리는 장막이다(참조. 탈출 40,34; 1열왕 8,10-11). 루가 2,9의 주 참조.
33절: ‘초막 셋’에 대한 언급은 초막절을 암시한다(탈출 23,16; 34,22; 참조. 즈카 14,16). 초막절을 지내는 날들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푸른 나뭇가지로 엮은 초막들에서 지냈다. 하느님이 과거에 펼치신 활동을 상기시키는 그 초막들 안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쁜 마음으로 종말론적 구원을 기다렸다(참조. 레위 23,39-43; 느헤 8,13-18; 즈카 14,16-19). 베드로는 초막절에서처럼 그 체험을 이어가고 싶어 한다. 그러나 실은 베드로가 한 말(마르코에게서 물려받은 말)은 이야기 논리와 맞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 그 말은 베드로 사도의 성품에 어울린다. 베드로는 자기가 느끼고 있는 체험을 계속 누리고 싶은 것이다. 아마 그래서 베드로가 그런 요청을 드렸을 것이다. 모세와 엘리야가 자기들을 떠나기 전에 붙잡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본문이 전하려고 하는 전언은 분명하다. 즉 메시아의 영광을 본 체험은 이제 한정되어 있다(이제 앞으로는 박해를 받는 가운데서 그 영광을 체험해야 한다. 루카 18,29 이하).
34-35절: 여기에서는 시나이 산에서처럼, 광야를 떠돌 때처럼, 솔로몬 성전을 축성할 때처럼 구름이 나타난다. 구름 속에서 들리는 소리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지칭한다(참조. 이사 42,1; 시편 2,7; 창세 22,2.12.16). 루카 3,21-22의 주 참조. ‘선택한 사람’이라는 말은 구약성경에서 일정한 임무를 맡은 사람을 가리킨다. 아론(시편 104,26), 주님의 종(이사 42,1; 참조. 44,1 이하, 49,7), 모세(시편 106,23), 다윗(시편 89,19) 등이 그런 사람이다. 헤녹서에서는 그 칭호를 메시아적 의미로 사람의 아들에게 적용한다. 꿈란에서는 공동체를 다스릴 정의로운 스승에게 적용한다. 루카 23,35에서는 그리스도께 적용한다. ‘들어라.’라는 명령은 이 장면에서 중요하다. 모세와 엘리야는 사라졌다. 그리고 하늘에서 앞으로는 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고 선언한다. 특히 당신 수난과 죽음에 관하여 하시는 모든 말씀, 영광과 구원에 이르는 길에 관하여 하는 모든 말씀을 들어야 한다고 선언한다. ‘듣다.’라는 동사는 종말론적인 예언자에 대하여 말하는 신명 18,15를 상기시킨다.
36절: 루카는 대구법을 사용함으로써 그 체험이 끝났다는 인상을 준다. 이제 영광이 아니라 십자가가 기다리는 일상생활이 이어진다. 침묵은 독자들을 메시아 비밀 안으로 몰아넣는다. 즉 예수께서 메시아라는 사실을 발설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침묵은 예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다리던 메시아와 다른 메시아시라는 생각을 암시한다. 예수께서는, 많은 유다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세속 영광과 정치세력에 기댈 분이 아니셨던 것이다.
위에서 한 말을 요약해 본다. ㄱ) 이 대목에서 루카 9,18에서 제자들이 던진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 나오기 시작한다. 여기에서 루카는 베드로가 내놓은 답변의 의미를 이야기하는 식으로 제시한다. 즉 나자렛 예수님은 ‘하느님이 보내신 그리스도’시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수난을 겪으셔야 한다. 그러나 그분은 당신 영광 속에서 나타나실 것이다. 이 이야기는 그 영광의 한 끝자락을 맛보게 한다. ㄴ)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일(수난, 죽음, 부활)은 ‘엑소도스’(탈출)로서 예수님을 새로운 모세로 만든다. 당신 기도, 당신이 겪으신 수난, 당신 십자가는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에 속한 독자가 따라야 할 길, 새로운 ‘이집트 탈출’의 길이다. 새로운 모세가 보여주는 길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고 편안한 길이 아니다. 생명에 이르게 하는 좁은 길이다. ㄷ) 예수께서 갈릴래아에서 활동하는 동안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동안 바치신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기도가 차지하는 비중과 중요성을 알게 해 준다. ㄹ) ‘들어라.’ 종말론적 예언자의 말을 듣는 일은 새로운 모세의 영도를 받는 새로운 백성에게 빼놓을 수 없는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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