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연중 제2주일 2011년 1월 16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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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강점수 | 작성일2011-01-14 | 조회수448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연중 제2주일 2011년 1월 16일
요한 1, 29-34.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자기 앞으로 오시는 것을 본 세례자 요한은 말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다.’ 이 말은 초기 신앙인들이 예수님에 대해 하던 신앙 고백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고 믿는 신앙 공동체는 예수님의 죽음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에 대해 가르치다가 죽임을 당한 분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이 그분을 당신 안에 살려 놓으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부활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하느님이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도록 버려두었다는 사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신앙인들은 구약성서에서 그 해답을 찾습니다. 이사야서에는 “야훼의 종”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스스로는 죄가 없으면서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벌을 받는 인물에 대한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이 말하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는 표현은 이사야 예언서의 ‘야훼의 종’을 가리켜 한 말입니다. “그는 온갖 굴욕을 받으면서도 입 한번 열지 않고 참았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가만히 서서 털을 깎기는 어미 양처럼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53, 7). 이 말씀은 그 시대 유대인들의 해방절 관행을 상기시킵니다. 유대인들은 해방절에 어린 양(탈출 12장 참조)을 잡아 성전 구내에서 피를 흘리고, 집에 가져와 가족들이 그것을 함께 나누어 먹었습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야훼의 종’에 대한 이사야서의 말씀과 성전에서 거행되는 ‘어린양’의 희생 의례를 참고하여 이해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진 ‘야훼의 종’과 같고, 우리를 위해 해방절에 성전에서 피를 흘리는 ‘어린 양’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시작하여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으로 우리 죄에 대한 대가(代價)를 치렀다는 믿음이 발생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을 대신해서 속전으로 목숨을 내어준다.”(마르 10, 45)는 말씀도 나타났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오늘도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 죄를 대신한 죽음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초기 신앙인들의 해석이었습니다.
과거 사회에서 사람들은 높은 사람 덕분으로 산다고 쉽게 믿었습니다. 백성은 임금님의 성은(聖恩)을 입고 삽니다. 고을의 주민은 원님을 잘 만나야 합니다. 원님이 사람 하나 죽이려 들면, 죽을 수밖에 없는 시대였습니다. 자기 운명을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세상이었습니다. 이런 시대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셔서 우리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셨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그 말에 쉽게 수긍하였습니다. 우리를 위해 은혜로운 일을 한 예수님이라는 뜻으로 알아들었습니다. 남의 몸값을 대신 치러주고, 그를 자유롭게 만들어주는 일은 그 시대의 관행입니다. 노예나 전쟁 포로가 자유를 누리기 위해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상황은 다릅니다. 우리의 운명은 우리 자신이 결정합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나의 운명을 마음대로 하지 못합니다. 남의 몸값을 대신 지불하는 관행도 오늘은 없습니다. 소말리아 해적들에게 인질로 잡혔다가,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난 선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 사회의 관행이 아니라, 해적이 하는 만행(蠻行)이고 범행입니다. 그런 짓을 하는 사람들은 세계적으로 소탕의 대상이 되어 있습니다. 오늘 인간은 각자 자기의 삶을 자유롭게 살 권리를 가졌습니다. 지위와 재물이 있다고 남의 운명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닙니다. 인권은 이제 우리 사회의 기초질서가 되었습니다.
이런 현대인에게 2000년 전 예수라는 한 인물이 십자가에 죽어서 우리 죄에 대한 대가를 치렀다고 말하면, 현대인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성서가 예수님을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말하는 것은 해방절 관행을 아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은혜로운 일을 하셨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율법준수와 성전 제물봉헌을 강요하던 유대교 당국에 맞서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깨닫고, 그것을 실천하여 하느님의 자녀 되어 살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이라고 버려진 병자들을 고쳐 주고, 마귀 들렸다고 외면당한 이들을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생명을 사는 하느님의 자녀가 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유대교 당국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행위였고, 그것 때문에 그분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알고 실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해 은혜로운 일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요한의 세례는 예수님의 성령 세례를 예고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요한은 사람이 물에 잠기게 하는 세례를 주었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성령 안에 잠기게 하셨다고 복음은 말합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숨결입니다. 성서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인류 역사 안에 일어난 모든 변화를 성령이 하신 일이라고 말합니다. 창조도 성령이 하신 일이었고, 예언자들의 입을 빌려 말하는 분도 성령이십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교회의 설립도 성서는 성령이 하신 일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 일어난 일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세례를 베푼다는 오늘 복음의 말씀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을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의 입을 빌려 이렇게 요약합니다. “진리의 영, 그분이 오시면 여러분을 모든 진리 안에 인도하실 것입니다...그분은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니, 이는 내 것을 받아서 여러분에게 알려 주시겠기 때문입니다.”(16, 13-14). 성령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게, 또 그분이 하신 일을 실천하며 살게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삶이 신앙인에게는 하느님을 보여주는 진리입니다. 그것을 돋보이게, 곧 영광스럽게 하시는 성령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실의와 절망에 빠진 환자들과 장애인들을 고쳐 주면서, 예수님은 그 불행들이 죄에 대한 벌이 아니라고 가르쳤습니다. 이웃을 고치고 살리는 실천들 안에 하느님의 숨결인 성령은 그 생명으로 계십니다. 인류는 심판하고 벌주는 하느님을 즐겨 상상하였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 사람들이 하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는 ‘하느님의 어린양’은 우리가 상상하는, 두려운 하느님을 버리고, 베풀고 용서하는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이 하신 일을 실천하는 것이 성령이 우리 안에 일하시게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녀가 할 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것을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의 세례라고 부릅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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