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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레위를 보시고' - [유광수신부님의 복음묵상]
작성자정복순 쪽지 캡슐 작성일2011-01-15 조회수373 추천수3 반대(0) 신고

 레위를 보시고(마르2,13-17)

 -유 광수신부-


예수님께서 다시 호숫가로 나가셨다. 군중이 모두 모여 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그 뒤에 길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나를 따라라."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어제 복음에서 시각적으로 볼 수 있는 중풍병자를 볼 수 있었다면 오늘 복음에서는 레위라는 윤리적인 중풍병자, 정신적인 중풍병자를 만난다. 즉 자기가 다른 사람의 돈을 부당한 모습으로 착취하는 일을 하면서도 그것이 죄인지를 모르고 또 자기 자신이 죄인인지도 모른 채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해서 하고 있는 윤리적으로 중풍병자요, 또한 새로운 세계를 보지 못하고 똑같은 일에 고정되어 있고 똑같은 생활을 매일 반복하고 있는 정신적인 중풍병자인 레위를 만난다. 사실 우리 사회는 신체적으로 중풍병자보다는 윤리적, 정신적인 중풍병자가 더 많다. 생각이 고정되어 있는 사람, 자기 생각으로 즉 이기적인 생각으로 고정되어 있는 사람, 자기 사상이나 어떤 선입견으로 고정되어 있는 사람, 세계는 늘 새롭게 창조되고 사회는 늘 새롭게 변화되고 늘 새로운 학문과 새로운 연구로 인간의 삶의 질이 새롭게 향상되고 있는데 자기만 늘 자기 생각으로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새로운 변화를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고 1년 전이나 10년 전이나 늘 똑같은 사고 똑같은 생활 습관 똑같은 정신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모두 정신적으로 중풍병자이다. 중풍병의 특징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감각이 없다는 것이다. 스스로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늘 고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같은 죄를 반복해서 짓는 윤리적인 중풍병자 또는 똑같은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늘 같은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정신적인 중풍병자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길을 지나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나를 따라라."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레위를 부르신 것은 "길을 지나가시다가" 부르셨다. 길은 무엇인가? 길은 목적지가 아니라 목적지에 이르는 통로이다. 따라서 길은 앉아 있을 곳이 아니라 걸어가야 할 곳이다. 물론 목적지에 가다가 힘들어서 잠시 쉬었다가는 것은 용납할 수 있지만 고정된 자세로 "앉아 있는" 곳은 아니다. 인생은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걸어가는 것이다. 이 세상은 우리가 앉아 있을 곳이 아니라 하늘 나라를 향해 걸어가야 할 통로이지 가는 길을 멈추고 앉아 있어야할 곳은 아니다. 예수님은 늘 걸어가셨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루가 9,58)라고 말씀하셨듯이 늘 아버지를 향하여 걸으셨다. 즉 이 세상은 머물 곳이 아니라 지나가는 곳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마치 이곳이 영원히 앉아 있어야할 곳인양 앉아 있다. 이미 이 세상이 영원히 살 곳이라는 착각으로 생각이 굳어있고 삶의 틀이 잡혀있고 정신이 고정되어있기 때문에 그 이상의 세계를 보지 못한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의 삶으로 고정된 사람은 늘 이 세상 안에서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지 그 이상의 세계를 보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한다. 그래서 생각이 좁고 생활 반경의 폭이 좁고 마음이 좁은 답답한 삶을 살아간다.

 

레위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기가 앉아 있는 곳이 나쁜 곳인지를 몰랐다. 비록 행복하지는 못했도 또 그렇게 만족하지는 못해도 세관이라는 직장은 매일 당연히 자기가 앉아 있어야할 자리라고 생각했고 그곳이 자기의 생계를 유지시켜주는 수단이고 나름대로 자기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다른 사람과도 관계를 맺고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자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곳을 떠난다는 것은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으며 아마도 죽을 때까지 앉아있을 자리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는 그 이상의 세계를 생각해 보지도 않았고 생각한다하더라도 한 갖 꿈이지 모든 것이 보장되어있고 안전한 그 자리를 옮긴다는 것은 한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매일 일어나면 나가 앉을 곳이 세관이라는 직장이요, 만나는 사람이나 그가 해야하는 일은 아무런 변화없이 매일 똑같은 사람을 만나고 똑같은 일을 하고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생각을 하는 생활에 이미 익숙해져있다. 생각이 고정되어있고 살아가는 틀이 고정되어 있고 하는 일이 고정되어 있다. 그에게 새로움이란 찾아보기 힘들고 아니 새로운 것을 도전해본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레위는 또 다른 모습의 중풍병자이다. 그는 앉아 있지 말고 걸어가야할 장소에 즉 길에 걸어가지 앉고 앉아 있는 중풍병자인 것이다. 생각이 고정되어있는 중풍병자요, 생활에 아무런 변화없이 매일 똑같은 일을 기계처럼 반복하고 있는 중풍병자이다.

 

레위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기 이전까지만 해도 전혀 새로운 삶을 생각해 본적이 없다. 아니 다른 삶을 생각해 볼 수도 없었다. 이미 세관에 앉아있는 생활로 고정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중풍병자의 특징은 자기 혼자서는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레위는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고 또 다른 세계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즉 새로운 세계로 눈을 돌리게 되었고 그 새로운 세계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레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고 했다. 그 동안 자기를 안전하게 지켜주었고 모든 것이 보장되어있는 자리를 버리고 또 익숙해져있던 자리를 버리고 낮선 분의 한 마디 말씀을 듣고 따라 나선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커다란 위험이 뒤따르는 인생 도박이다. 그러나 레위는 예수님을 따라나섰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그의 인생이 새로운 삶으로 바뀌었고 그것은 대 성공이었다. 레위가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모험을 시도하지 않았다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의 삶은 보장 받았겠지만 그 이상의 삶은 살지 못했을 것이고 오늘날 우리의 입에 그의 이름이 오르 내리지 않았을 것이고 마태오 복음이라는 기쁜 소식을 전해주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의 삶을 변화시킨 것은 세관에 앉아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나섰기 때문이다. 그가 죄인으로 남아 있지 않고 사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세관의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그분의 말씀을 기록하였기에 오늘 우리에게 마태오 복음을 남겨줄 수 있었다. 사람은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느냐 또 누구를 따라다니는가? 누구를 만나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생이 달라진다.

 

예수님은 오늘도 길을 지나가시다가 사람들을 부르시고 나를 부르신다. "나를 따라라."하고.
내가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는지 아닌지는 내가 얼마만큼 예수님을 닮아 가고 있느냐에 달려있다.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지에 대한 유일한 기준은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하였느냐, 얼마나 봉사를 많이 하였느냐, 사제이고 수도자이고 회장이고 단장이라는 신분과 직책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가에 달려 있다. 아무리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고 기도를 하고 봉사를 하고 신부이고 수도자이라 하더라도 예수님의 생각으로 생각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으로 말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따른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나를 따라라."고 따름의 대상을 제시하셨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장애되는 것은 버린다는 것이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필요한 것만 취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여전히 자기를 따르고 돈과 명예를 따르고 쾌락과 안일함을 따른다면 예수님을 따른다고 할 수 없다. 

 

"일어나"라는 말은 부활하다는 말이고 출애굽이다. 완전히 새로운 세상에로의 첫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고향을 버리고 하느님이 지시하는 곳을 향한 신앙여정의 길을 내딛는 것이다. 레위는 어디로 가는지 어떤 길을 가는 것인지 모른다. 오직 예수님만이  아시는 길이다. 따라서 레위가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예수님뿐이다. 예수님을 놓치면 따라갈 수 없는 길이다. 예수님만이 그의 길을 안내해주실 분이시고 예수님만이 그가 의지해야할 분이시다. 예수님에게서 눈을 돌리게 하는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예수님을 따라 가는데 장애가 되는 것은 모두 버려야 따라 갈 수 있는 길이다. 그 길은 죄인에게서 의인으로 변화시켜주는 길이며 중풍병을 치유시켜 주는 길이며 노예에서 해방되는 길이다.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하나는 의인이다. 그러나 그 자신은 자기를 죄인이라고 믿고 있다. 그래서 의인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또 하나는 죄인이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을 의인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죄인이면서도 죄인인지를 모르고 죄인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지 않기 때문에 늘 죄인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다.

 

예수님은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5,48)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따라 가야할 예수님은 완전하신 분이시다. 그래서 그분을 따라가면서 우리는 완전한 모습으로 발전되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결코 완전한 존재가 될 수는 없다. 인간은 영원한 미완성의 존재이다. 그러기 때문에 완전과 완성을 향하여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 인간이요, 인간다운 자세이다. 나의 가장 존귀한 것, 나의 가장 아름다운 것, 나의 가장 참된 것, 나의 가장 진실한 것, 나의 가장 깊은 욕망을 채우는 것, 나의 가장 완전한 모습인 하느님을 닮으려고 노력한 것이 인간이요, 인간의 가장 큰 목표이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었고 건강을 주었고 재능을 주었고 시간을 주었고 인격을 주었고 활동력을 주었고 정열을 주었고 사랑을 부어주셨다. 우리는 이것을 가지고 무엇인가 보람있는 것을 만들어야 하고 가치 있는 것을 창조해야 한다. 산다는 것은 창조한다는 것이요, 완성시켜나가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부족한 것을 완성시켜 나갈 때 이루워지는 것이다. 그 일은 매일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생각을 갖고 똑같은 방법으로 이루워지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신 아버지를 향해서 끊임없이 걸어갈 때 가능한 일이다. 그러한 삶을 지향하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삶이 곧 신앙생활이요, 영성생활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영성생활을 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앉아 있는 것을 좋아한다. 하루에도 몇 시간씩 텔레비젼 앞에 앉아 있고 자기취미 생활에 앉아 있다. 이 세상의 것에 앉아 있는 사람은 결코 새로운 세계를 향해 걸어가지 못할 것이고 세상의 것에 앉아 있다가 세상의 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걸어가는 이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며 젓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영원한 안식은 이 세상이 아니라 아버지 품이다. 아버지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릴 때까지 부단히 노력하는 인생은 늘 새로운 삶을 살 것이며 나를 위해서 늘 새롭게 펼쳐보여 주시는 새 하늘 새 땅을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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