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hold, the Lamb of God,
who takes away the sin of the world.
(Jn.1.30)
제1독서 이사야 49,3.5-6
제2독서 1코린토 1,1-4
복음 요한 1,29-34
주일 아침, 성당에 가려고 준비를 하던 아내가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천 원짜리 몇 장만 주머니에 넣고 지갑 자체를 서랍에 넣어둡니다. 그 모습을 본 남편이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친구 만날 때에는 제일 먼저 챙기던 지갑을 성당 갈 때에는 왜 두고 가는 거야?”
“지갑을 가지고 가면 봉헌 성가로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네.’라고 할 때 너무나 괴롭더라고.”
아내의 이 대답에 남편이 걱정스러운 듯이 이렇게 말했다고 하지요.
“예수님도 당신 기도 소리 듣고 괴로울까봐 응답 주머니를 하늘에 두고 오시면 어떻게 하려고 해?”
받는 데에는 익숙하지만 주는 데에는 너무나도 인색한 우리들의 모습을 꼬집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받는 것, 소유하는 것에만 신경을 쓰다보면 다른 사람들을 볼 수가 없습니다. 이는 곧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시는 하느님도 제대로 볼 수 없지요. 왜냐하면 내 안에 하느님의 모습이 있는 것처럼, 다른 이들 안에서도 하느님의 모습은 분명히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하느님께서는 자기만을 위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성인 성녀들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하느님을 발견했던 성인 성녀들은 항상 자신이 아닌 이웃에 관심을 두고 있었고, 이로써 하느님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어떤 학생이 버스를 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버스에 함께 타고 있었던 할머니께서 자기 옆에 있는 부추 다발을 두고 내린 것입니다. 이 학생은 착한 행동을 하려고 창문을 열고 “할머니, 여기 부추여!”하면서 부추 다발을 창밖으로 던졌습니다. 바로 그 순간 옆에 계신 아주머니께서 황급히 말씀하십니다. “그거 내건데…….”
제대로 보지 않았기에 원 주인의 것을 창밖으로 던지는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역시 하느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않으면 어리석은 행동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세례자 요한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철저하게 하느님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판단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부귀영화를 버리고 광야로 나갈 수가 있었으며, 그 결과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제는 하느님을 제대로 알아 볼 수 있도록, 그래서 세례자 요한처럼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고백할 수 있도록, 철저히 나의 입장은 배제하고 하느님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고 판단해야 합니다. 그러한 노력들을 통해 하느님 나라에 더욱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으니까요.
지극한 즐거움 중에 책읽는 것에 비할 것이 없고 지극히 필요한 것 중 자식을 가르치는 일 만한 것이 없다.(명심보감)
퍼즐인생(손명찬, ‘꽃단배 떠가네’ 중에서)
1,000조각짜리 퍼즐을 선물 받았습니다. 유럽의 유명한 고성 풍경이었습니다. 진지하게, 인내심으로, 스스로 감탄해가며 열심히 맞추다가 거의 끝날 무렵에 그림 조각 하나가 없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내가 잃어버린 건지, 원래부터 없었던 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참 허탈했습니다.
내내 찾다가 결국 제작 회사에까지 연락하는 상황이 됐습니다. 해당 부서 직원은 친절하게 몇 번째 줄 몇 번째 칸인지 묻다가 “이렇게 해결하는 게 더 복잡하니 차라리 통째로 반품을 하라.”는 겁니다. 한 조각이 없어서 완성되지 못한 퍼즐은 결국 제작 회사로 보내졌고 감사하게도 며칠 수 같은 모델의 퍼즐을 다시 새것으로 받았습니다.
어느 미래에는 외톨이가 된 퍼즐 한 조각이 장롱 밑에서 나올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한 조각이 없는 999개의 퍼즐 조각들은 재활용되지 않고 그냥 버려진다고 합니다. 1,000개가 모여 완성되는 것만이 그 목적의 상품으로서 의미를 갖는 순간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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