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어린이와 같이 되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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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노병규 | 작성일2011-01-24 | 조회수600 | 추천수12 | 반대(0) 신고 |
어린이와 같이 되라
적성 성당에 온 지도 벌써 3개월이 가까워져 옵니다. 부임해 올 때는 단풍이 곱게 물들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성큼 겨울 속으로 들어와 버렸습니다. 제가 있는 적성 성당은 작은 본당 공동체입니다. 교적상의 신자 수는 560명 정도이고 주일미사에 나오시는 분은 200명을 채 넘지 못합니다.
많은 분이 이렇게 묻곤 합니다. “신부님, 작은 본당이라서 밥숟가락 숫자도 다 알고, 정말 화목하지요?” 저는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200명인 본당이 화목하다면, 둘만 사는 부부는 얼마나 화목하겠습니까?” 그러면 서로 그냥 웃고 말지요. 화목은 그저 숫자가 가져다주는 선물이 아닙니다.
날이 추워지면서 처음으로 고민했던 문제는 ‘평일미사를 어디서 해야 할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전임 신부님은 미사 참석 숫자는 적고 난방비는 많이 나와서 유아실에서 평일미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매님 한 분이 오셔서 그곳에서 앉아서 하면 무릎이 아프다며, 어르신들도 많은데 그냥 성전에서 하면 안 되겠느냐고 어렵게 의사를 밝혀 왔습니다.
사실은 저도 성전에서 하는 것이 편한 터라 마음이 동하였습니다. 하지만 새로 부임하면 6개월 혹은 적어도 3개월은 전임 신부님의 사목 방식을 따르며 지켜보는 것이 관례이고, 또 본당을 익히는 데 필요한 일이기에 불편한 마음을 무릅쓰고 전임 신부님이 하셨던 그대로 유아실에 간이 제대를 차렸습니다. 유리창을 등지고 앉으면 제대 십자가가 보여 어떤 장식을 하지 않아도 그만입니다.
유아실에서 평일미사를 드려 보니 바닥은 전기패널로 되어 있어 전원을 넣으면 이내 온기가 전해져 옵니다. 그리고 작은 히터 하나를 틀면 곧 훈훈한 기운이 방안을 감쌉니다. 제대를 중심으로 바닥에는 방석을 스무 개 정도 깔아 놓고 뒷자리에는 긴 의자를 두어 무릎이 불편하신 분들을 앉게 했습니다.
제의방에서 제의를 입고 걸어 나와 유아실 문을 열면 시작기도와 성가를 바칩니다. 그러면 할머니들이 궁둥이 한쪽씩을 들어 마련해 준 틈을 헤집고 들어가 제대에 인사하고 자리에 앉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또한 사제와 함께!” 그런데 순간 그리 멀리만 있던 신자 분들의 얼굴이 확 클로즈업되어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앞자리로 나오라고 해도 늘 뒷자리를 고집해 오던 분들도 이곳에서는 별수 없었나 봅니다. “오늘 오후에 봉성체를 다녀왔는데 몸과 마음의 병고를 겪고 있는 분들을 기억하며 미사를 드립시다.” 하고 말문을 엽니다. 마이크는 없지만 제 목소리에는 평소보다 더 힘이 실려 근사하게 들립니다.
강론하는 데에도 전에는 보이지 않는 거리감과 물리적 거리감 때문에 다소 말투가 굳어져 있었다면 이곳에서는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가까이 두고 먼 사람처럼 행세하는 것도 어색하니 말입니다. 그냥 편하게 대화를 주고받고 제 사는 이야기도 하곤 합니다.
물론 저는 복음 이야기를 하나도 하지 않고 대충 강론을 때우는 연천 사는 제 친한 동창 신부와 다릅니다. 나름대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말씀 한 구절만큼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집니다. 할머니들이 대부분이지만 신자 분들의 얼굴은 살아 있습니다. 한 분 한 분, 그분들의 표정이 변화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심장에 지병이 있어 쌕쌕 숨을 몰아쉬는 할머니의 숨소리가 작지만 규칙적으로 들려옵니다. 소통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편안함만을 좇았다면 도무지 맛볼 수 없는 소중한 기쁨을 배웁니다. 우리가 편리함을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버리고 사는지 이 유아실 미사에서 몸으로 터득하고 있습니다.
▦ 김동희 모세 신부(적성성당 주임) / 성서와 함께1월호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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