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연중 제4주일 2011년 1월 30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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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강점수 | 작성일2011-01-28 | 조회수421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연중 제4주일 2011년 1월 30일.
마태 5, 1-12.
오늘 복음은 마태오복음서가 전하는 행복선언입니다. 루가복음서에도 같은 행복선언이 있습니다. 루가복음서의 것은 짧고 간결하지만, 오늘 우리가 들은 마태오복음서의 것은 더 길게 발전되어 있습니다. 마태오복음서 공동체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행복선언을 더 쉽게 풀어 기록하였습니다. 성서학자들은 루가복음서의 것이 행복선언의 원형에 가깝다고 말합니다. 마태오복음서는 행복한 사람들을 여덟 가지로 나누어서 말하지만, 루가복음서는 세 부류의 사람들을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가난한 사람, 지금 굶주리는 사람, 그리고 지금 우는 사람입니다.
행복선언은 하나의 예언이고 축복입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에 비록 지금 가난해도, 지금 굶주려도, 또 지금 울어도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열망은 성취된다는 예언적 선언입니다. 예언자는 미래의 일을 미리 알려 주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시선에서 현실을 보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예언자는 이 세상의 통념 따라 말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부자와 권력자들을 기쁘게 하여 그들로부터 혜택을 받아내겠다는 동기로도 말하지 않습니다. 예언자는 강자(强者)의 횡포를 비판하고, 약자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말합니다. 예언자는 권위를 가진 사람의 오만과 독선을 지적합니다. 예언자는 재물과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라고 촉구합니다. 예언자는 자기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괘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유대교 기득권자들이 주장하던 것과 다른 말씀을 하다가 그 대가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초기 신앙공동체는 예수님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마르 8, 34). 예수님은 예언자의 삶을 살다가 그 대가로 십자가를 지셨고, 그분의 제자들도 같은 자세로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이 보여 주신 가치관을 따라 살기 위해 인류역사가 당연시 하는 말들을 수정합니다.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는 예수님의 선언은 많이 가진 자가 행복하다는 인류역사의 통념을 깨는 말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그분의 생명을 살겠다는 신앙인에게 재물만이 삶의 보람일 수 없다는 말입니다. ‘굶주리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선언은 먹고 마시는 일에 자기 삶의 보람을 보지 말라는 말입니다. 비록 현재 굶주려도, 인간으로 또 하느님의 자녀로 보람 있는 삶이 있다는 말입니다. ‘지금 우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선언은 기쁘고 즐거운 것만 찾아 살 수 없는 인생이라는 말입니다. 어떤 저자의 말입니다. “기쁨과 즐거움은 타버린 재만 남기지만 우리가 겪는 비극과 함께 하는 아픔은 우리 삶의 진실을 보게 한다.” 자기가 겪는 고통을 감수할 뿐 아니라, 이웃의 고통에도 참여하면서, 이웃과 더불어 살 때, 인생의 진실을 본다는 말입니다. 그 진실은 하느님의 시선이 우리 안에 살아 있을 때 보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예수님이 가졌던 하느님의 시선에서 우리의 삶을 보게 합니다. 예수님은 재물이 많고 적고,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기쁘거나 슬프거나를 넘어서 하느님과 함께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유대교는 재물을 가진 자, 배부른 자, 웃는 자가 모두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자라고 가르쳤습니다. 가난한 이, 굶주리는 이, 우는 이는 하느님이 버린 결과로 비참하게 된 이들이라고 가르쳤습니다.
행복선언은 하느님이 우리의 염원을 곧 이루어주신다는 축복의 말씀이며 예수님의 삶을 요약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가난한 이, 굶주리는 이, 우는 이도 축복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의 통념에서 그들은 불행한 이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그들을 축복하지 않으셨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도 그들을 외면합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이들입니다. 오늘의 선언은 하느님은 그들과도 함께 계신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그들을 외면하고 버려도, 하느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선언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즐겨 부르셨고, 우리에게도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기도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부모는 자녀가 가난하다고 버리지 않습니다. 굶는다고, 고통을 당한다고 외면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 하느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합니다.
부요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이 있는 것은 하느님이 원하신 일이 아닙니다. 인간이 만드는 빈부의 격차입니다. 19세기 유럽에 산업혁명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산업만 발달하면, 하느님도 해결하지 못한 기근을 우리가 퇴치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였습니다. 그러나 산업이 고도로 발달하였지만, 세상의 빈부격차는 사라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심화되었습니다. 한 편에서는 영양의 과다섭취로 병들어가고, 다른 한 편에서는 굶주려 죽는 이들이 이 지구상에는 아직도 있습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발전에는 소외당하고 피해를 입는 사람들이 발생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어떤 사람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각종 불행한 사람들도 축복하시고, 불쌍히 여기신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을 듣고, 가난과 굶주림의 영적 의미, 슬픔과 아픔의 영적 의미에 대한 이론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불행한 사람들 안에 하느님이 하시는 축복을 설명하기 위해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의 통념으로 하느님을 설명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합리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하느님의 축복이 아닙니다. 행복선언은 단순한 선언이고 축복입니다. 하느님이 축복하시기에,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도 축복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가난한 이, 굶주리는 이, 우는 이에게 무엇이 축복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은혜롭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눈에 비록 근본적 해결책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축복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위한 이해타산을 앞세우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는 가난도 있고, 굶주림도 있고, 슬픔과 아픔도 있습니다. 우리의 통념은 그것을 자업자득이라고 말하며, 외면하게 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행복선언을 들은 신앙인에게 그들은 우리의 축복을 기다리는 이들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 우리라면, 하느님의 축복을 그들에게 실천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자기의 소원성취를 하느님에게 빌지 않고, 그 축복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그것을 실천합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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