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 왜 복인가?
복이란 무엇입니까. 전직 두 대통령(전두환, 노태우)의 부정 축 재와 구속
사건을 보면서 부귀와 권세, 그리고 세상의 영화라는 것 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국민 모두에게 깨우침을 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그 복이라는 것이 세월만 지나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모릅니다.
성서가 말하는 복이란, 가난한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나 가난 그 자체는
분명히 악입니다. 그리고 그 가난을 하느님이 원하시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성서는 그들이야말로 바로 하늘나라(마태6,19∼21참조)요,또한
그리스도 자신(마태25,31∼46참조)임을 천명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야말로 하느님을 차지하는 가난한 마음의 소유자이기
때문입니다.
가진 것이 많으면 기댈 것이 많고 가진 힘이 커도 붙잡을 것이 많게 됩니다.
많이 배운 사람은 또 많이 배운 대로 자기 지혜에 의지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있는 자들과 높은 자들, 그리고 지식이 많은 자들은 붙잡고 기댈
수 있는 세속 사정 때문에 하느님이 잘 안 보입니다.
잘 안 보이니까 매달리지도 않고 찾지도 않으며 붙잡지도 않습니다.
거기서 불행이 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여덟 가지 행복에 대한 말씀을 하셨는데 이
여덟 가지의 행복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바로 가난한 사람이 라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슬퍼하는 사람, 박해받는 사람 등 그들 모두는 그
자체로 가난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헬라어에 '가난'이라는 말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Penes' (페네스)
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노동을 해야 먹을 수 있는 가난을 말합니다.
그러나 극빈자는 아니며 그날 벌어 그날 먹는 자들을 말 합니다.
그러니까 끼니 걱정은 없습니다.
다음에는 'Ptochos'(프토코스)가 있는데, 이것은 절대적인 극빈을 말합니다.
사흘에 한 끼 먹기도 어려운 자들입니다. 거지 라자로(루가16,19∼31참조)
처럼 누가 돌봐 줄 이도 없고 그렇다고 제 손 으로 벌어먹지도 못하는 극심
한 가난을 말합니다. 이런 가난이 바로 프토코스인데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가난은 바로 이 프토코스를 말합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참으로 가난했습니다. 오랫동안 외세의 침략과 억압
속에서 착취를 당했으며 마땅하게 일할 자리도 없었고 또 일을 해도 가난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삶에 대해 희망이 없었습니다.
있다면, 오로지 하느님의 손길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난하게 되었을 때 하느님을 진실로 순수하게 찾았습니다.
오늘 1독서에서 스바니아는, 하느님은 진정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서 계신
다는 것과 그리고 그들 가난한 자들을 돌보아 주시리라는 위로의 말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 은 늘 가난한 자들
이었으며 그들이야말로 하느님 백성의 맥을 잇는 주체들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부귀와 영화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때 당시에는 멋지게
보이고 훌륭하게 보이지만 그러나 시간만 지나면 허무한 것이 됩니다.
그래서 참된 행복은 세상을 믿지 않고 자기 자신이 교만하지 않으며
하느님 앞에 겸허한 마음을 갖는 것이 됩니다. 많은 사람 들 중에는
실패한 뒤에야 비로소 세상을 깨닫는 자들이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
해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가난의 참된 의미는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 그래서 자신의 무력함을 알고 전적으로 하느님께 매달 리고 의지할
수 있는 가난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런 자가 바로 행복 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형제가 과음을 자주 하다가 위장을 버리게 되었습니다. 술 때문에
그 좋은 건강 다 버리고 이제는 소화가 잘 되지 않아서 조금 만 지나쳐도
탈이 나고 고생을 합니다. 이 사람이 식사 전의 기도를 할 때 보면 그렇게
경건하고 진지할 수가 없습니다. 마치 그것이 마지막 식사인 듯이 감사한
마음으로 먹고 있으며 밥풀 하나라도 정성드려 삼키고 있습니다.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 사람은 자기 잘못으로 건강을 잃어 불행
하게 되었지만 자신의 건강,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오로지 하느님께 매달릴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는 참 행복을 찾은 것이 됩니다. 그러나 이미
건강하면서도 건강을 하느님께 기도하고 감사드릴 줄 안다면 그는 더 행복한
사람입니다.
교회는 물질적인 가난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이상적인 삶의 형태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지향하고 원하는 것은 어떤 처지에서든지 가난한 마음,
마음을 비우는 겸손한 자세로 하느님 앞에 나서는 것입니다.
즉 어떤 경우에도 하느님만을 붙잡고 매달릴 수 있는 믿음을 가집시다.
이것이 참된 행복의 길입니다.
- 강 길웅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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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도
주님,
행복을 찾아 나섰지만
진짜 행복을 외면했던
저희의 어리석음을 용서하소서.
구슬치기를 하던 시절
구슬을 주머니 가득 따가지고
세상을 얻은 듯이 으스대다가
어른이 되어서야
그것이 쓸모없는 것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주님,
이미 하늘나라를 아시고
저희에게 귀띔해주신
주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게 하소서.
저희에게 지혜를 주시어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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