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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1-02-02 조회수916 추천수11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1년 2월 2일 주님 봉헌 축일
 
 
 
When the days were
completed for their purification
according to the law of Moses,
Mary and Joseph took Jesus up to Jerusalem
to present him to the Lord,
(Lk.2.22) 
 
 
제1독서 말라키 3,1-4
복음 루카 2,22-40
 
오늘부터 설 연휴가 시작됩니다. 즐거운 명절이지만 힘든 것 중 하나가 그리운 고향으로 내려가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제 저녁 뉴스를 보니까 저녁에 부산까지 7시간 40분 정도 걸린다고 하더군요. 아마 오늘 낮에는 더 답답한 귀성행렬을 체험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차 안에서는 답답함을 느끼지만, 고향에 내려가는 순간 그러한 모든 부정적인 마음들이 사라지게 되지요.

하긴 이처럼 힘들게 고향에 다녀오시는 분들과 고향에 내려가지 않고 그냥 자기 집에 계셨던 분들의 설 체험은 많이 다를 것입니다. 힘들게 다녀온 만큼 설 명절의 기쁨을 더 많이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어쩌면 우리들의 삶 안에서도 이러한 모습은 똑같이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즉, 아무런 노력 없이 원하는 것을 얻는 것과 어렵고 힘든 상황을 정말로 어렵게 극복한 뒤에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의 기쁨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어제 저는 아주 기쁜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제 조카가 대학에 합격했다는 소식이었지요. 초등학교 때부터 가고 싶었던 학교였고, 그 꿈을 키우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였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전 수시에서 떨어지고 대안으로 다른 대학에 지원했음에도 계속 불합격 통지서를 받고서는 얼마나 불안해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어제 정시를 통해 가고 싶었던 대학 합격 통지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기뻐하는 지, 저와 전화 통화를 하는데 충분히 느낄 수가 있겠더군요. 아마 불합격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합격의 기쁨이 더욱 더 컸던 것 같습니다.

우리의 삶 안에서도 어렵고 힘든 일은 계속됩니다. 문제는 이러한 고통과 시련에 쉽게 좌절하는 우리들 자체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포기하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당신께서 직접 인간의 고통과 시련을 체험하시기 위해 이 땅에 내려오셨고, 온전히 당신 자신을 우리들을 위해 봉헌하십니다. 하느님이시기에 부족하고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취할 필요가 없지요. 하지만 우리들을 위해 그 모든 고통과 시련을 완전한 인간의 몸으로 이겨내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봉헌되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과연 온전히 내 몸과 마음을 봉헌하고 있을까요? 봉헌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 맞게 내 몸과 마음을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렇게 온전히 봉헌하기보다는 편하고 쉬운 것만을 찾을 때가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불평불만을 더 많이 간직하며 살았던 것 같습니다.

온전히 당신의 모든 것을 봉헌하신 예수님을 기억하는 오늘. 우리 역시 온전히 봉헌하기 위해 고통과 시련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이 모든 것을 이겨내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더욱 더 주님 앞에 드러내야 합니다. 그때 나에게 더 크게 다가오는 참 행복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이란 자기가 바라는 환경을 찾아내는 사람들이다. 발견하지 못하면 스스로 만들면 된다(조지 버나드 쇼).




바보네 당나귀(‘좋은 글’ 중에서)

옛날 어느 마을에 착하고 부지런한 청년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왜 그랬는지, 마을 사람들은 그 청년을 바보라고 불렀습니다.

“바보야! 바보야!”

그래서 청년의 이름은 바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남들이 뭐라고 하든지 바보는 자기 일만 열심히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아직 쿨쿨 자는 새벽부터 들에 나가 일을 했고요, 다른 사람들이 덥다고 쉬고 있을 때에도 논밭에서 일을 했지요. 그래서 바보네 땅에는 매년 풍년이 들었고, 그래서 바보는 점점 부자가 되어 농사짓는 당나귀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이웃집에 사는 약은 사람이 바보네 집으로 당나귀를 빌리러왔습니다.

“이보게 바보, 당나귀 좀 빌려주게.”

“잠깐만 기다리세요. 당나귀한테 물어보고 올께유. 당나귀가 좋다고 하면 금방 빌려드릴게요.”

바보는 그렇게 말하고 당나귀가 있는 뒤뜰로 갔어요. 그리고 한참 만에 돌아와서 말했어요.

“당나귀한테 물어 보았는데유. 아무래도 말을 듣지 않는구먼유. 고개를 흔들면서 하는 말이, 채찍으로 얻어맞고 발로 차여도 꼭 일해 주러 가야만 하느냐구 나한테 자꾸 묻는구먼유. 그러니 어떻게 하면 좋겠어유?”

그 말을 들은 이웃집 사람은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갔지요. 지난번에 당나귀를 빌려갔을 때, 거칠게 다룬 게 생각났기 때문이지요.

이 동화를 읽고 나면 누가 진짜 바보인지 얼떨떨해집니다. 아이들이 자라서 나갈 사회에도 동화 속의 약은 사람같이 헛똑똑이가 많습니다. 이 동화는 화내는 가장 슬기로운 방법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바보 청년은 당나귀를 학대한 이웃집 어른을 부끄럽게 만듦으로써 자신의 화를 우아하게 처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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