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강림 대축일
제1독서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말하기 시작하였다.>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2,1-11
1 오순절이 되었을 때 그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2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 3 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4 그러자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5 그때에 예루살렘에는 세계 모든 나라에서 온 독실한 유다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6 그 말소리가 나자 무리를 지어 몰려왔다. 그리고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지방 말로 듣고 어리둥절해하였다.
7 그들은 놀라워하고 신기하게 여기며 말하였다. “지금 말하고 있는 저들은 모두 갈릴래아 사람들이 아닌가? 8 그런데 우리가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
9 파르티아 사람, 메디아 사람, 엘람 사람, 또 메소포타미아와 유다와 카파도키아와 폰토스와 아시아 주민, 10 프리기아와 팜필리아와 이집트 주민, 키레네 부근 리비아의 여러 지방 주민, 여기에 머무르는 로마인, 11 유다인과 유다교로 개종한 이들, 그리고 크레타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인 우리가 저들이 하느님의 위업을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언어로 듣고 있지 않는가?”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04(103),1ㄱㄴ과 24ㄱㄷ.29ㄴ-30.31과 34(◎ 30 참조)
◎ 주님, 주님의 영을 보내시어 땅의 얼굴을 새롭게 하소서.
○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주님 저의 하느님, 주님께서는 지극히 위대하시나이다.
주님, 주님의 업적들이 얼마나 많사옵니까!
세상이 주님의 조물들로 가득하나이다. ◎
○ 주님께서 그들의 숨을 거두시면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
주님의 숨을 내보내시면 그들은 창조되고,
주님께서는 땅의 얼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
○ 주님의 영광은 영원하리라.
주님께서는 당신의 업적으로 기뻐하시리라.
내 노래가 주님 마음에 들었으면!
나는 주님 안에서 기뻐하노라. ◎
제2독서
<우리는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12,3ㄴ-7.12-13 또는 로마 8,8-17
형제 여러분, 3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
4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5 직분은 여러 가지지만 주님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6 활동은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7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12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 13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또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의 말씀입니다. 8,8-17
8 육 안에 있는 자들은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 9 그러나 하느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사시기만 하면, 여러분은 육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게 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있지 않으면, 그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10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몸은 비록 죄 때문에 죽은 것이 되지만, 의로움 때문에 성령께서 여러분의 생명이 되어 주십니다. 11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는 당신의 영을 통하여 여러분의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12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리는 육에 따라 살도록 육에 빚을 진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육에 따라 살면 죽을 것입니다. 13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입니다. 14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15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16 그리고 이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17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부속가]
<성령 송가>
오소서, 성령님. 주님의 빛, 그 빛살을 하늘에서 내리소서.
가난한 이 아버지, 오소서 은총 주님, 오소서 마음의 빛
가장 좋은 위로자, 영혼의 기쁜 손님, 저희 생기 돋우소서.
일할 때에 휴식을, 무더위에 시원함을, 슬플 때에 위로를.
영원하신 행복의 빛, 저희 마음 깊은 곳을 가득하게 채우소서.
주님 도움 없으시면 저희 삶의 그 모든 것 해로운 것뿐이리라.
허물들은 씻어 주고 메마른 땅 물 주시고 병든 것을 고치소서.
굳은 마음 풀어 주고 차디찬 맘 데우시고 빗나간 길 바루소서.
성령님을 굳게 믿고 의지하는 이들에게 성령 칠은 베푸소서.
덕행 공로 쌓게 하고 구원의 문 활짝 열어 영원 복락 주옵소서.
복음환호송
◎ 알렐루야.
○ 오소서, 성령님, 저희 마음을 가득 채우시어
저희 안에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
◎ 알렐루야.
복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19-23 또는 요한 14,15-16.23ㄴ-26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변호하는 분이시다>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15-16.23ㄴ-26
15 “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16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23ㄴ “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24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25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이것들을 이야기하였다. 26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영성체송
사도 2,4.11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하느님의 위업을 말하였도다. 알렐루야.
해설과 묵상
제1독서(사도 2,1-11) 해설
<성령께서 내려오시다>
이 대목은 그리스도께서 죽임을 당하고 부활하신 뒤 50일 만에 일어난 사건에 대한 신학적인 해설이다. 그것은 히브리인들이 파스카 축제 뒤 50일 만에 지내는 오순절 축제의 의미가 완전히 성취되고 온전히 채워졌음을 주장하는 내용이다. 이 대목의 첫머리에 벌써 이런 말이 나온다. “오순절이 되었을 때 그들은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1절)
파스카 시기를 결산하면서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농사 축제인 오순절, 가을의 대수확 축제(초막절)를 미리 앞당겨 맛보는 오순절 축제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파스카 시기(예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시기)를 결산하는 축제 곧 성령강림절 축제가 된 것이다. 성령강림 축일은 영광 중에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미리 만나게 해 준다(사실, 성령께서는 예수 부활 후 세상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지신 분이다.).
그리고 히브리인들의 신앙에 의하면, 오순절 축제는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맺은 계약과 율법(십계명)을 기념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염원이 담겨 있었다. 하나는 그 율법(십계명)이 어느 날엔가 모든 사람과 모든 백성에게도 내려질 것이라는 희망이고, 다른 하나는 장차 새로운 계약이 이루어지리라는 희망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이 보기에는, 그 두 가지 염원이 완전히 이루어졌다. 예수 부활 후 지낸 오순절 축제 때 성령께서 불혀의 모양으로 제자들에게 내려와서 기쁜 소식을 모든 사람과 모든 백성에게 선포할 수 있는 능력을 부어 주셨다. 성령강림 축제는 또한 미래를 지향하고 있다. 그 미래란 모든 사람과 모든 백성이 초막절 축제를 지내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모여드는 날이고, 주님께서 모든 사람과 모든 백성을 거느리고 천상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날이다.
화답송(시편 104[103],1ㄱㄴ과 24ㄱㄷ.29ㄴ-30.31과 34[◎ 30 참조]) 해설
<주님, 주님의 영을 보내시어 땅의 얼굴을 새롭게 하소서>
이 시편은 창조주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노래한다. 하느님은 당신 성령의 권능으로 당신이 창조하신 만물을 거듭되는 새로운 창조와 창조의 완성을 향해 이끌어 가신다. 성령께서는 끊임없이 “땅의 모습을 새롭게 하신다.” 성령 밖에서는 피조물과 인류에게 아무 희망도 걸 수 없다.
제2독서(1코린 12,3ㄴ-7.12-13) 해설
<오직 한 분이신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모두 한 몸을 이룬다>
1코린 12-14에서 바오로는 코린토 신자 공동체가 풍성히 받은 성령의 여러 가지 선물(특은)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러나 잘못되어 그 특은들이 교만과 상호 불평의 원인이 되었다. 그래서 바오로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온갖 특은이 모두 가장 출중한 특은인 사랑(13장)에서 우러나온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이 대목에서 바오로는 특은들의 통일성을 이루는 세 가지 요인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1) 모든 특은은 똑같은 성령께서 내려 주신 특은인 까닭에 그 특은을 가지고 아무도 경쟁의식을 느낄 필요가 없다.
2) 온갖 특은은 교회를 건설하기 위해 내려 주신 특은으로서 서로 보완하고 보충하면서 완전성을 지향한다. 사람의 몸이 여러 가지 기능을 가진 지체들로 이루어져 있듯이 교회도 다양한 특은을 받은 모든 신자들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합심하고 협동함으로써 신자들(그리스도다운 삶을 사는 사람들)은 오늘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시는 그리스도의 신비체가 되는 것이다.
3)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란 성령을 생명으로 삼고 성령의 지시에 따라 사랑을 실천하면서 사는 사람이다. 세례는 마치 마술처럼 이마에 물을 붓는 순간에 구원을 이루어 주는 무엇이 결코 아니다. 세례는 사람의 온 생애를 걸쳐 죽는 순간까지 그리스도처럼 온 인류를 사랑하기 위해 몸 바치기로 고통스러운 선택과 결단과 투신을 거듭 새로이 이어가는 것을 뜻한다.
신자(信者)라는 명칭은 구원받기로 결정되고 안심하고 자신할 수 있는 칭호가 결코 아니다. 참된 신자의 자격을 잃지 않는 것은 매 순간 죽기까지 사랑하기로 몸 바치는 선택에 달려 있다.
참된 신자란 그리스도처럼 사람・인류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이고 그런 폭넓은 사랑을 품고 있는 사람 외에 다른 사람이 아니다. 그런 사람 안에 성령께서 살고 계신다. 사람의 얼굴이 천차만별이듯 각 사람을 통해 성령의 사랑이 발휘되는 모양도 천차만별이다. 그러나 그 다양성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기 위한 것이며 인류의 단합과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기 위한 것이다.
또는 (로마 8,8-17) 해설
<성령의 법>
성령의 법은 새로운 내적 활력으로서 하느님의 능력으로 인간을 ‘죄와 죽음의 율법’에서 자유롭게 해 준다. 인간의 존재와 활동을 규정하는 죄악 또는 이기심 대신에 이제 성령 또는 사랑이 존재한다. 죽음(죽이는 일) 대신에 이제 생명(살리는 일)이 존재한다. 선을 바라는 일과 선을 행하는 일 사이의 일치가 다시 이루어진다. 인간의 절망적인 상황을 뛰어넘는다. 그렇게 하여 인간관계와 사회관계를 다시 맺고 불의하고 억압적인 사회질서를 뛰어넘을 수 있다.
바오로에게 ‘육’은 자신과 이기심에 사로잡힌 인간, 우상을 섬기거나 스스로 우상이 되는 인간을 가리킨다. 육에 따라 사는 사람은 자신을 모든 일의 중심에 놓는다. 온 세상이 자신과 자기 이익을 위해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을 섬기고 스스로를 흠숭하고 자기만족을 좇고 자기 이름이 알려지기를 바란다. 이기적인 본능과 충동에 따라서 눈을 감고 무작정 살아간다. 그러나 세례를 받고 예수처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세계의 중심으로 놓지 않는다. 그런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생애의 중심은 예수 자신과 그분의 계획이다.
바오로는 육에 따라 사는 생활과 성령에 따라 사는 생활이 아주 다르다고 말한다. 육에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을 멀리 떠나 이기적 본능을 따라서 살아간다. 이기적인 본능은 하느님의 계획을 반대한다. 그러나 성령에 따라서 사는 사람은 실제 인간 조건 속에서 예수님의 선택을 자기 선택으로 삼아 이기심을 버리고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바친다.
14-17: 이기적인 활동과 반대되는 성령의 활동은 하느님과 맺는 새로운 관계, 인간끼리 맺는 새로운 관계를 창조한다. 즉, 참된 가족관계를 엮어 낸다. 이제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다. 이 사실이야말로 새롭게 맺어지는 인간관계와 사회관계의 기초다. 기존의 가족중심주의가 무너지고 모든 인간이 형제자매가 되는 새로운 가족관계가 생겨난다. 하느님께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약속하신 유산은 하느님 나라에 참여하는 데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에 참여하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목숨을 걸어 놓고 그 나라를 증거하는 일을 뜻한다.
복음(요한 20,19-23) 해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성령을 불어넣어 주신다>
요한 복음서의 이 대목은 흔히 ‘요한의 성령강림’이라고 부른다. 요한의 성령강림 이야기를 루카의 성령강림 이야기와 동시에 읽어 보면, 파스카(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와 성령강림이 긴밀히 연관되어 있음이 분명해진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비추어서만 성령강림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다. 성령강림 사건이 언제 어느 날 일어났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잘 생각해 보면, 성령강림은 교회 안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어 일어나는 사건이다. 세례와 성찬례가 행해지는 그때마다 새로이 성령께서 강림하시는 것이다. 이때 세례와 성찬례는 단순한 예식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불의와 미움을 버리고 정의와 사랑의 합심을 택하는 삶 자체를 나타내는 표지(標識)인 것이다.
오늘의 복음이 상기시켜 주는 파스카와 성령강림의 의미는 다음과 같이 종합할 수 있겠다. 성령을 선물로 보내 주시는 사실(22절)은 부활하신 분께서 당신을 따라 당신처럼 사는 사람들과 그들의 모임 안으로 성령을 통하여 마치 생명처럼 침투하여 들어오심을 뜻한다(19절). 그리스도께서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합심하여 모여 있는 ‘그 가운데’ 성령을 통하여 현존하여 계신다.
그리스도께로부터 ‘평화’가 나온다(19절). 그 평화는 인류 대부분의 희생 위에 소수가 안일과 풍요를 누리기 위한 보호장치(군비경쟁과 전쟁)로 지켜지는 평화가 아니다. 참된 평화다.
참된 평화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게 된 관계, 하느님과 인류(모든 사람) 사이의 부모・자식의 관계, 똑같은 하느님 자녀들로서 서로 위해 주고 함께 나눠 먹고 사는 가운데 합심하고 뜨겁게 사랑하게 되는 관계를 뜻한다(에페 2,14.18).
이 평화(하느님과 인류, 인류 서로간의 합심과 사랑의 성장)는 필연적으로 사명을 지운다. 이 참된 평화를 인류의 사회관계 안에 구현(具現)하라는 사명이다. 이 사명은 끊임없이 사회제도의 혁신을 통해서 수행된다. 사회제도가 ‘사람이면 모두가 한 형제’라는 신앙의 원리에 따른 제도가 되도록 고쳐가기 위해 공동 작업을 펴고 거기에 참여할 사명을 지운다.
자기가 참된 신자인가 아닌가 여부를 가려내는 기준은 그 사명을 수행하고 있는가, 수행하지 않는가를 반성하면 된다. 그런 노력을 하고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또 그런 사람만이, 그런 노력을 하고 있는 때만이 성령께서 그 안에 계시고 그리스도의 삶을 오늘에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또는 (요한 14,15-16.23ㄴ-26) 해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변호하는 분이시다>
변호사는 억울한 사람을 변론하는 사람이다. 예수께서는 성령을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변호사로서 파견하신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 예수께 대한 기억을 늘 끊임없이 생생하게 살아 있도록 해 주는 분이시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말씀과 활동을 간직하고 시대와 장소에 맞추어 해석하도록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도와주신다. 성령께서는 또한 그리스도인 공동체로 하여금 사람을 살리는 일과 사람을 죽이는 일을 가르고, 역사 속에서 예수님의 활동을 새롭게 펼치면서 해방의 과정을 이어받게끔 사건들을 가려낼 줄 알도록 이끌어 주신다.
예수께서는 활동을 펼치실 때 성령의 인도를 받으셨다. 모든 일을 성령의 힘으로 이루셨다. 예수께서는 바로 그 성령을 당신처럼 살려고 하는 사람들과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에게 주신다. 예수님의 성령께서 불의한 사회 및 세계와 맞서고 있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을 보호하실 것이다.
유다 이스카이옷이 아닌 또 다른 유다가 실망한 빛을 보인다. 예수께서 지배권력을 잡는 왕이 되기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 자신과 예수님의 몸이 하느님이 머무시는 성전이시다. 예수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자신과 그들의 몸도 마찬가지로 하느님이 그 안에 머무시는 성전이며, 그런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들 역시 성전이다.
묵상
<성령강림과 예수님의 생애>
교회(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공동체)가 태동하기 시작할 때의 모습은 예수님의 생애가 시작할 때의 모습과 매우 닮았다는 사실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예수께서는 세례를 받으신 다음 나자렛의 한 회당에서 설교를 하심으로써 당신의 사도적(使徒的) 활동을 시작하신다.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인 교회도 베드로가 성령을 받은 다음 예루살렘에서 설교를 함으로써 자기의 사명을 수행하기 시작한다(사도 2,1-4).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과 교회의 사명 수행의 시작은 그 형태에 있어서만 동일한 것이 아니라, 그 내용까지도 동일하다. 예수께서 나자렛에서 행하신 설교는 교회가 수행해야 할 사명을 의도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예수님의 설교에 보편적 구원(사람이면 누구나 포함되는 온 일류의 구원)의 의지(意志)가 분명히 천명되었던 것과 똑같이, 베드로의 설교에서도 구약의 예언자들의 증언에 기초를 둔 보편적 구원의 의지가 명백히 천명된다.
예수께서도 당신이 행하실 직분 수행을 마치시는 마당에, 당신 제자들에게 ‘오래지 않아’(사도 1,5) 성령으로 세례를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성령의 세례는 ‘오순절 날’에 베풀어졌다. 아버지께로부터 성령을 받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그 날 예루살렘에 모인 사도들 위에 성령을 쏟아 붓듯이 보내 주셨다.
<성령강림은 종말론적 사건이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예수님의 죽음과 현양(부활의 영광을 받으심)으로 끝나지 않고,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써 거듭 출발했다. 루카 9,31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당신의 변모 때 예고한 대로, 예수께서 이집트 탈출을 인류 전체의 해방으로 완성시키기로 결단을 내리셨음이 강조된 것처럼, 사도행전의 장엄한 서두에서 성령을 보내시겠다던 그리스도의 약속이 참으로 실현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성령께서 쏟아 부어지듯 보냄을 받으신 사건은 종말론적 사건이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하느님께로부터 나오는 능력 자체인 분으로서 인류 역사 안으로 들어오신 까닭이다.
성령께서는 역사 자체의 내부 힘에서 우러나신 분이 결코 아니고, 하느님께로부터 내려온 하느님의 능력 자체이시다. 그 성령께서 인류를 살리려고 인류 역사 안으로 들어오신 것이다. 이는 인류가 거저 받은 크나큰 선물이다. “예수께서는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사도 2,33)
성령께서 쏟아 부어져 인류 역사 안에 들어오시게 된 사건은 마지막 날의 인류공동체(새 인류: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생명을 받아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게 된 인류가족)의 기원(起原)이 되는 사건이기 때문에 종말론적 사건이라 한다.
베드로는 성령강림의 사건과 요엘의 예언을 직접 결부시킨다. 요엘의 예언을 인용하여 베드로는 ‘마지막 날들’이란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성령께서 오심으로써 종말론적 차원이 열렸음을 명백히 한다.
성령께서 인류 역사 안으로 들어오심으로써 주님의 재림에 앞선 구세사의 마지막 국면이 시작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인 교회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당신의 부활로 역사의 주님이 되신 예수 자신이 성령을 통하여 당신의 구원 사업을 계속하시는 것이다.
인류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신 한 형제로서 서로 위해 주면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인류가 되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으며, 성령께서는 모든 사람 안에서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서로간의 형제의 정을 키우기 위해 모든 사람을 통하여 활동하고 계신다.
<성령강림의 선교적 차원>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사도 2,4) 복음 선포의 출발과 내용은 성령의 활동이다. 사도행전의 이 말씀은 루카 복음서와 사도행전 전편에 걸쳐 전개되는 핵심적인 내용으로서, 성령이야말로 교회 사명 수행의 원동력이며 나아갈 길을 지시하는 분이시라는 말씀이다.
성령께서는, 사람이면 모두 하느님의 한 자녀로 알아 똑같은 관심과 애정을 기울이는 모든 사람 안에서, 그런 관심과 애정을 기울일 때의 그 사람 안에서 당신 사랑의 능력을 펴서 인류가 한마음으로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행복을 누리고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신다. 그리고 사람 안에서 사람에 대한 참된 정을 느끼게 하시는 분도 다름 아닌 성령이시다.
모든 사람을 하느님의 자녀로 알아 사랑하기로 자유로이 결심하고 노력하는 사람 안에 성령께서 그 사랑을 부어 주신다. 그 사랑이야말로 구원을 주는 영원한 가치를 지닌다. 그러므로 구원은 혼자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헌신과 수난을 통하여 인류와 함께 받게 되어 있다.
<성령의 예언자적 차원>
성령강림 때 내려오신 성령께서는 예언자적 직능도 가지고 계신다. 베드로는 자기 시대의 종교적・역사적 상황에 대처하여 하느님의 말씀인 요엘서의 예언을 인용함으로써 자기의 설교를 시작한다. 그렇게 하여 예언자적인 시각으로 역사를 읽어 내고 역사 안에서 하느님이 나타나시는 모습을 밝혀낸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청중들은 바로 얼마 전에 일어난 사건들(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구약의 예언서들과 맞아떨어짐을 깨닫도록 독려 받고 있으며, 선택과 결단을 내려야 할 입장에 처하게 된다. 예수께서 주님이고 메시아이심을 그냥 알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을 인정하고 났을 경우 인정한 그 진실에 자기실존(實存)을 투신(投身)하느냐 마느냐 결단을 내려야 할 처지가 된다. 신앙의 고백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생활의 목표와 방향을 바꾸는 결단과 실천을 뜻한다. 이때 실천이 신앙고백의 알맹이다.
예수를 주님이시라고 고백한다는 의미는 예수님의 진리, 곧 예수께서는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요, 동시에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인류 안에 들어온 참 사람이라는 진리, 그리고 그분은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 모든 사람을 당신과 하나 되게 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게 했으며, 모든 사람이 하느님 아버지의 한 자녀로서 서로 사랑할 수 있게 하셨다는 진리를 깨닫고 그 깨달음대로 살아감(실천함)을 뜻한다.
인류 중에서 가난하고 못나고 천대받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애정을 품고 그 사람들을 질곡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참된 신앙고백이요 성령의 세례다. 이기심으로 마음이 굳어 있고 몰인정한 소수의 사람들을 회개(回改)하게 하여 인정 있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 그리고 몰인정할 때의 나를 끊임없이 인정 있는 나로 고쳐가는 것이 예수를 주님으로 모시는 신앙 고백이요 죽을 때까지 일생을 통하여 받아야 할 성령의 세례다. 성령의 세례는 정적(靜的)인 완결된 상태가 아니고, 거듭 거듭 돌아서고 나아가야 하는 생동하는 미결상태다.
<성령께서 계시는 곳>
외형적으로 세례를 받았거나 아니 받았거나 모든 사람 안에는 성령께서 계시면서, 뚜렷하게 의식적이든 잠재의식적이든,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셔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하신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셔야 할 필요성을 절감한다는 말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주어야 할 궁극적 이유가 절실해진다는 말과 통한다.
사람을 사람이기 때문에 진정으로 사랑해 보려고 몸부림치는 고뇌는 모두 성령의 형언할 수 없는 사랑의 탄식이다. 그런 사람 안에는 성령께서 계시고 그럴 때의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성전임이 참으로 진실이다.
바람의 향방을 어림할 수 없듯이 성령께서 어디 계신지 잘라 말할 수 없다. 세례를 받았다는 자신도 그 세례의 요청대로 죄(이기심, 무관심, 미움)에 죽고 사랑에 살아야만 성령을 모실 수 있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죽을 때 그 세례 받은 정도가 결정된다.
외형적으로 세례를 받지 않았어도 정말 따뜻한 사람의 인정(人情)은 성령의 사랑이다. 그 인정과 사랑이 성령의 세례를 받았다는 표시다. 성령이 그 사람 안에 계시다는 말이다. 그 사람도 그리스도다운 사랑을 실천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에 포함된다는 말이다. 인정스러워진다는 것은 일생 순간순간 자신의 포기요 바침이기 때문에 수난의 길이다. 따뜻할 때의 자신과 따뜻할 때의 모든 사람 안에 계시는 성령을 서로 알아 모시고 거듭 새로이 더 많이 따뜻하기로 부축하고 노력할 때 성령께서 인류를 한마음 되게 하여 아버지이신 하느님께로 데려가실 것이다.
복음해설(2)
새로운 계약을 맺어주시겠다는 약속과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심으로써 그 계약이 채결됨(14,12-25)
‘약속’은 이 대목에서 본질 요소다. 그리고 이 대목은 고별연설에 딱 들어맞는다. 그 약속은 새로운 계약을 맺어주시겠다는 약속이다. 특히 성령을 보내주시겠다는 약속이다. 믿는 사람을 거룩한 거처로 삼으시겠다는 약속이다. 새로운 계약에 대한 언급은 예언서들(예레미야서와 에제키엘서)에도 들어 있다.
- “더 큰 일을 하게 해 주고 기도를 들어주시겠다는 약속”(14,12-14). 이 대목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14,12)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 연설에서 맨 처음으로 나오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라는 표현은 우리가 장엄한 선언 양식 앞에 서 있음을 가리켜 보인다. 예수께서 믿는 사람더러 당신이 하고 계신 일을 하고, 그보다 더 큰 일을 하게 되리라고 약속하신다. 더 큰 일이란 의심할 여지없이 온 세계와 온 인류를 복음화하는 일일 것이다. 그 일이 가능한 것은 예수께서 아버지께로 가시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그리스도의 구원 제사 덕분이고 또한 당신의 영광스러운 부활 덕분이라는 것이다. 부활한 예수께서는 아버지께로 가시어 우리를 위하여 전구하고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요한 2,2).
방금 말한 약속과 밀접하게 결합하여 기도를 들어주시겠다는 약속이 나온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14,13) 이 약속은 공관복음서들(마태 7,7-11과 병행 대목들)과 넷째 복음서(15,16; 16,24.26)에서도 거듭 되풀이하여 나오는 약속과 같다. 간청을 들어주시는 분은 다름 아닌 아버지이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우리 기도와 간청을 이루어주시는 분이 아드님으로 나와 있다. 예수께서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예수께서 제시하시는 그 목적은 ‘영광 받으심’에 관한 요한의 신학에 잘 들어맞는다(13,31-32; 17,1-5). 14,14의 양식(“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은 되풀이되는 양식이다. 그러면서도 이 양식은 기도와 간청을 드릴 분이 아드님이실 수도 있음을 가리켜 보인다.
- “성령을 보내시겠다는 약속”(14,15-17). 이 약속은 고별연설에서 중심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주석가들이 고별연설에 나오는 성령께 대한 말이 원래 연설에는 들어 있지 않았다고 여기는 것은 이상스럽게 보인다. 그런 주장의 근거는, 본문비평 및 문학비평에서 볼 때에, 아무 것도 없다. 어떻든 그 약속은 연설 문맥에 완벽하게 들어맞는다.
이 대목은 약속 앞에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14,15)라는 조건부 연설로 시작한다.
이어서 본격적인 약속이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14,16) 여기에서 행동하는 분이 여럿이심을 유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청하는 분은 예수님이시다. 청을 들어주는 분은 아버지이시다. ‘선물’은 ‘다른 보호자’이시다(‘다른’이라는 형용사는 예수그리스도이신 첫 보호자를 상정해서 붙인 것이다.). ‘보호자’(위로자)라는 개념은 여기에서 매우 적합하다. 왜냐하면 스승이 없는 상태에게 제자들을 보호하고 위로할 분이 계셔야 하기 때문이다 보호자(위로자)를 보내시는 목적은 제자들과 늘 함께 계시면서 그들을 도와주시게 하는 데 있다. 그 목적은 예수께서 떠난다고 예고하시는 문맥에서 볼 때 적합하다.
이어서 ‘다른 보호자’가 어떤 분이신지 그 몇 가지 특징을 말한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14,17) 그 보호자(위로자)가 ‘진리의 영’이시라고 하는 것은 요한 학파의 전형적인 표현이다. ‘진리의 영’은 사람들을 진리를 향하여 인도하시는 성령(16,13), 참된 계시를 주시는 성령이시다(1요한 2,20.27). 요한의 전승에 따르자면 진리는 사람들을 거룩하게 한다(17,17-19). 뒤에 나오는 몇 구절이 가리켜 보이겠지만(14,16), 그 표현은 분명히 성령을 가리킨다. ‘진리의 영’이라는 명칭은 꿈란 문헌에도 나온다. 그리고 ‘거짓의 영’과 대조하기 위하여 약간 묵시문학적인 색채를 띠고 있다(참조. 1요한 4,1-6). 그러나 꿈란 문헌에서는 맥락이 단일위격 유일신론을 띠고 있고, 요한 복음서에서는 삼위일체적 유일신론을 띠고 있다.
성령께서 믿는 사람 안에 머무르신다는 표현은 아버지와 아드님이 믿는 사람 안에 머무르신다는 말씀을 보완하고 있다(14,23).
“제자들에게 다시 오시겠다는 약속”(14,18-20). 예수께서 이어서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14,18)고 말씀하신다. 14,1에 나오는 약속을 되풀이하신다. 그러나 지금은 분명히 부활한 분으로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신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14,19) ‘세상은 보지 못할 것이다.’는 사실과, 그와 반대로, ‘살아 있을 것이다.’는 사실은 부활-승천의 신비에 대한 분명한 언급이다. 그 사실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제자들의 믿음을 확인시켜줄 것이다. “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14,20) 여기에 다시금 ‘연계하여 내재함’을 나타내는 양식이 나온다. 즉 아드님이 아버지 안에 머물러 계시고 제자들이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고 그리스도께서 제자들 안에 머물러 계신다는 말이다. 거룩한 생명의 흐름을 그렇게 묘사한다. 그 생명은 사람이 되신 말씀을 통하여 제자들 안으로 흘러들어간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사제로서 바치신 기도를 떠올리는 것이 좋다(17,21.23.26).
- “하느님(아버지와 아드님)이 믿는 사람 안에 거처하시리라는 약속”(14,21-24). 이 대목에서 우리는 새로운 계약에 따른 약속의 정점에 도달한다. 요한 복음서 저자는 우리를 하느님과 인간이 하나 되는 가장 깊을 곳까지 데려간다. 이 대목은 또한 커다란 두 가지 약속 형태로 짜여 있다. 그 약속 하나하나는 조건이 붙은 주요한 기원(‘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또는 그와 같은 의미의 기원(‘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으로 시작한다.
맨 첫 선언에서 예수께서는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14,21)라고 말씀하신다. 그 조건은 예수께 충실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에 충실히 응답하는 것이다. 당신 계명을 충실히 실천하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이 받는 약속은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으리라는 것이다. 사람으로서는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는다고 느끼는 것보다 더 큰 일이 없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게 되리라는 약속은 그리스도 자신의 사랑을 받게 되리라는 약속 및 끊임없이 점차로 그 사랑을 나타내 보이시리라는 약속과 일치한다. 그렇게 하여 믿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흐름 속에 잠기는 것이다.
이스카리옷이 아닌 다른 유다가 그 약속을 더 깊이 알아듣게 해 준다.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14,22) 유다는 예수께서 당신을 세상에 온전히 드러내지 않으시는 이유를 묻고 있다(우리는 7,1 이하에서 예수님의 친척들이 한 말을 기억하고 있다.).
그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충실한 사람에 대한 아버지와 아드님의 사랑, 믿는 사람 안에 아버지와 아드님이 머무르시겠다는 약속을 중심으로 두 번째 선언을 이룬다. 사실, 유다의 질문을 받은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14,23)라고 강조하신다. 계약을 선물로 받는 조건은 말씀을 따르고 지키는 데서 나타나는 충실한 사랑이다. 그 선물에 대한 언급은 주요 연설에 나타나 있다. 우선 믿는 사람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약속한다. 그 사랑은 아주 특별한 사랑이다. 영원한 우정 관계를 기초로 삼는 사랑이다. 아버지의 사랑과 더불어 그 선물은 믿는 사람 속에 아버지와 아드님이 머물고 거처하시는 관계를 맺어주시겠다는 약속으로 표현된다.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라는 표현은 광야에서 장막 안에(탈출 40,35) 그리고 다음에는 성전 안에(1열왕 8,10-11) 머무르러 하느님이 오셨음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하느님이 믿는 사람을 차지하신다는 뜻이다. 그렇게 하여 믿는 사람은 하느님이 아끼시는 소유가 된다. 이제 성전은 새로운 하늘이 된 사람의 마음이다. 14,17에서도 이 거처를 성령께 돌린다. 이로써 신약의 위대한 약속이 실현된다. 즉 믿는 사람의 마음속에 하느님이 거처하시게 된다. 요한묵시록에도 그와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사랑과 우정이 어린 만찬의 친교 안으로 들어간다는 심상으로 그것을 표현한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이어서 요한 복음서 저자의 독특한 문체가 나온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14,24) 14,21과 14,23에서 말하는 조건을 채워야 할 필요성을 말한다. 이렇게 14,23-24 대목은 문학적으로 다음과 같은 구조로 짜여 있다. ㄱ) 조건(14,23ㄱ). ㄴ) 거처하시겠다는 약속(14,23ㄴ). ㄱ') 조건을 채워야 할 필요가 있음을 다시 강조함(14,24).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에 대한 예수님의 언급, 요한 복음서 저자가 그렇듯 자주 보여주는 언급이 여기에서는 이 장 첫 대목에서 말한 내용(14,1-11)을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 “예수님의 시대 뒤에 성령께서 수행하시는 역할”(14,25-26). 잠시 숨을 고른 다음 요한 복음서 저자는 이렇게 덧붙인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이것들을 이야기하였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14,25-26) 이 말씀으로 저자는 성령의 기능을 보여주려 한다. 그렇게 하여 14,15-17의 약속을 채우고 그와 동시에 성령을 예수께서 하신 일을 계속 이어받는 분으로 제시하려 한다. 여기에서는 보호자(위로자)를 성령이시라고 부른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제자들에게 보냄을 받으신 분이라고 말한다. 성령의 기능은 예수께서 행하신 모든 일을 가르치고 기억하게 하는 데 있다. 이 자리에서 성령을 언급한 것은 후대에 끼워 넣은 표시라고 말할 수 없다. 그와 반대로 이 언급은 새로운 계약을 약속하기 그 마지막에 그리고 고별연설 대목이 시작될 때 완벽하게 자리를 잡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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