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티 성지 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찬미예수님
작년 2월 1일부터 11일까지 매일같이 하루에 3000명이상의 순례자들이
이곳 감곡매괴순례지를 다녀갔습니다.
그 이야기가 평화방송에 그대로 재방이 되어서 사람들에게서 전화가 옵니다.
“2월 1일부터 11일 사이에 전대사가 있느냐?”
하도 그 문의 전화가 많이 와서 방송국에다 얘기했더니
자막에다가 [이 방송은 2007년도 방송입니다.] 이렇게 썼다는 겁니다.
작년 2월 1일부터 11일까지는 루르드 성모님 발현 150주년을 기념해서
루르드 성당과 특별한 관계가 있는 그런 성지에 열흘 동안 한시적인 전대사가 내렸습니다.
바오로 탄생 2000년을 맞이해서 작년 6월 29일부터 올해 6월 29일까지 교회에는
전대사의 은혜가 내리고 있고, 이 매괴성지도 역시 그런 전대사를 받을 수 있는 성지입니다.
전대사란 우리들이 살면서 죄를 지으면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고백소에 들어가서 죄 사함을 받습니다.
사제가 그 죄를 듣고 보속을 주죠.
그런데 사제가 주는 보속이 내가 지은 죄에 대한 보속과 딱 들어맞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차라리 고백소에서 보속을 모질게 받으면 나중에 연옥에 가서 보속할 것이 적겠지만 예를 들어서
지금 이 사람이 지은 죄에 따른 보속이 최소한 십자가의 길을 열 번이상해야 하는 보속거린데
신부님들은 한 번만 해주세요.
그러면 실제로 몇 번 남은 겁니까?
아홉 번 남은 것, 그것이 바로 잠벌입니다.
이렇게 살면서 못 다한 보속거리가 쌓이겠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숨이 끊어지면 바로 천국으로 못가고 어디에 갑니까?
연옥으로 가서 보속거리 그 잠벌을 해결해야만 천국으로 올라갈 수 있다... 이겁니다.
우리 천주교회에서는 특별한 해에 이제껏 내가 살면서 쌓였던 잠벌을
일정한 조건을 갖춰서 미사를 드리고, 영성체를 하고, 영성체 후에 사도신경 주모경을 바치면
내가 이제껏 살면서 쌓였던 잠벌덩어리가 한순간 사해집니다.
이게 바로 전대사예요.
전대사는 본인이 가질 수도 있고, 살아있는 다른 사람에게는 양도를 못하지만
죽은 영혼에게는 양도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전대사미사를 할 때는 늘 오늘 이 전대사의 은혜를 내가 가질 것이냐?
아니면 친정어머니에게 돌려드릴 것이냐? 결정을 해야 합니다.
우리 신자들은 조상들이 돌아가시면 늘 좋은 쪽으로 해석을 합니다.
'천당 가 계실 거야.....'
그러나 여러분 천당 가 보셨습니까?
천당에서 이메일 왔습니까?
좋은 쪽으로 해석할 뿐이지, 십 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아직도 연옥에서 그 보속을 하고 계신다....
그러면 자식들은 천당에 간 줄 알고 기도 놓은 지도 벌써 한참이야.
돌아가신지 일이년은 열심히 연도도 바치고 그랬는데
'이제 한 십년 넘었으니까 이제는 천당 들어가 계시겠지~~ '
그런데 아직도 거기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니까 이런 전대사 기회가 올 때마다 열심히 전대사 성지라든지 성당을 찾아다니면서
전대사의 은혜를 죽은 영혼들에게 한사람씩 명단을 짜가지고
오늘 전대사는 외할머니, 내일 전대사는 친정 할아버지... 이런 식으로
그래서 부지런만 떨면 적어도 수십 번 전대사 미사에 참석할 수 있습니다.
내가 이제껏 살면서 지은 죄에 대한 잠벌은 한 번이면 족합니다.
그 나머지는 죽은 영혼을 위해서 전대사 미사를 드릴 때마다 봉헌하십시오.
연옥에서 아직도 혼자 힘으로 보속을 다 못해서 고통 중에 있는 내 아버지가 어머니가
아들이 올려주는 전대사의 은혜를 받고 오늘 이 미사와 동시에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돌아가신지 오래된 할아버지가 손자가 올려주는 전대사의 은혜를 받고 천국으로 갈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큰 은혜가 있겠느냐!
올해 6월 29일까지 이 성전은 전대사의 은혜가 내리는 성지입니다.
오늘 복음으로 돌아가면 ‘예수님의 말씀이 권위가 있었다.’
하는 표현이 두 번 나옵니다.
권위가 뭡니까?
현대는 권위 실종시대, 부재시대라고 합니다.
총과 칼을 들고 ‘너 나에게 복종해.’
독재자들은 수십 년 동안 권위 있는 척하지만 그것은 권위가 아닙니다.
참다운 권위란 자기 스스로 권위가 있다고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주는 겁니다.
권위가 있다고 하는 것은 감동을 주고 그리고 열매를 맺게 해줍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첫 번째, 치유라고 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두 번째, 마귀를 쫓아냈던 구마라고 하는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세 번째, 믿음이라고 하는 옷을 입혀주는 권위로 나타납니다.
‘에헴’하고 폼 잡는다고 권위가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나 권위 있게 대해다오.’ 한다고 해서 권위가 생기는 것은 아닐 겁니다.
제 셋째 동생도 사제인데 일본의 사이따마 교구에서 사목하고 있습니다.
동생이 있는 오따 성당은 신자수가 만오천명인데
그 만 오천명 가운데서 삼천명이 일본사람이고 나머지는 다국적 신자입니다.
그 중에 한국교포는 20여명밖에 안됩니다.
동생은 한국에서 신학교를 나왔기 때문에 동창들이 대부분 서울에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동창신부 본당과 자기본당과 일대일 자매결연을 맺어서
한해는 일본 신자들이 한국으로 와서 한국교회를 배우고 또 그 다음해는
한국 신자들이 일본으로 갑니다.
그곳 신자들이 이곳 감곡순례지에도 다녀 갔습니다.
어느 해에 한국 신자 40여명이 일본 하네다 공항에서 내려
차가 있는 곳으로 나가보니까 사이따마 교구청 버스가 한 대 나와 있더래요.
버스를 타니 버스기사가 문 앞에 서서 고개를 90도로 숙이면서
“어서 오십시오. 환영합니다.”
하면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 한국 신자들이 다 타니 그 기사가 올라와서
90도로 머리를 숙이면서 “반갑습니다. 제가 이 사이따마 교구의 주교입니다.”
그날 한국 신자들이 다 뒤로 넘어갔데요.
세상에~~ 주교님이 버스를 몰고 와서 환영을 하더래요.
한국 같으면 상상을 할 수 있습니까?
어느 신자는 그 주교님이 운전을 하는 그 뒷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데요.
참다운 권위라고 하는 것은 감동을 줍니다.
‘아, 나도 저렇게 살아야겠구나!’
주교님의 겸손한 모습을 보면서 그 차안에 있던 40여명이 치유되었음을 믿었고, 내 안에 있는
어둠이 저 주교님을 통해서 구마가 되었음을 믿었다고 합니다.
너무 너무 행복했데요.
권위라고 하는 것은 좋은 옷을 입고 그럴듯하게 폼을 잡는다고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권위는 우러나오는 존경심과 경외심이 생겨야합니다.
동생신부가 그 어려운 일본사목을 하면서 저에게 어려움을 호소할 때마다
‘아우야! 너는 그 훌륭한 주교님 밑에서 사는 것만으로도 참아야 된다.’
어느 날 밤 11시가 됐는데 주교님한테 전화가 왔더래요.
“신부님, 주무십니까?”
“이제 자려고 합니다.”
“그럼 신부님 성당 앞에 맥주집으로 나오세요. 제가 와 있습니다”’
교구청에서 그 성당까지는 세 시간이 걸리는 거리인데 동생신부가 깜짝 놀라서 옷을 입고 나가보니
조그만 맥주 집에 주교님이 와 계시더래요.
“신부님과 술 한 잔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위로해주러 온 거예요.
그런 주교 밑에 어느 사제가 충성을 안 할까요?
사제서품 때 그런 말이 나옵니다.
‘당신은 본 주교에게 존경과 순명을 서약합니까?’
그 얘길 들을 때마다 이런 거부감이 듭니다.
‘순명은 서약할 수 있어도 어떻게 존경까지 서약할 수 있느냐?’
아우신부가 문화가 다른 그곳에서 사목을 하면서 힘들다고 할 때마다 저는
“참다운 권위가 뭔지 당신주교를 보고 깨달았다.” 고 합니다.
우리 크리스천은 이 세상에서 분명 권위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권위는 참 권위자이신 예수그리스도의 권위에 비하면 불완전하지만 적어도 닮을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 권위 있게 말씀으로 치유와 구마를 시켰듯이 사제들도
자신감을 갖고 내가 말하는 이 말의 원천이 성령이 함께하시고 주님이 뒤에 계시다고 하는 확신을
갖고 신자들에게 자신 있게 말씀으로 치유와 구마를 시켜줄 때, 우리는 예수님을 닮을 수가 있습니다.
사제, 수도자, 아버지, 어머니, 선생님, 수도회장상들은 권위 있는 사람으로 평가를 받아야합니다.
권위가 있는 사람으로 평가를 받으려면 첫 번째 위선자가 되어서는 안 될 겁니다.
사전적인 의미로 위선자는 말과 행동이 다른 겁니다.
저도 입만 열면 좋은 얘기를 많이 하는 피정지도신부지만 내가하는 말을 다 못 지킵니다.
그러나 무던히 지키려고 애는 씁니다.
우리 아버지가 우리들에게 충고할 때 하는 말과 아버지 개인의 행동이 전혀 다르다면
어느 자식이 그 아버지를 존경하겠습니까?
베드로전서 2장 12절에
‘이방인들 사이에서 행실을 단정히 하십시오.’
고린도전서 8장 9절에
‘여러분의 자유로운 행동이 믿음이 약한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세례 안 받은 남편이 세례 받은 아내를 지켜봅니다.
시집오기 전부터 천주교신자인 아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쉽게 분노하고 더 많은 말을 하면서
상처를 준다면 믿음이 약한 그 남편은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당 안다니는 며느리가 이방인입니다.
성당 안 나가는 시누이가 이방인입니다.
이방인이 그 사람을 통해서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지...성당에 나가려고 수십 번 마음을 먹다가도 오히려
‘너 하는 꼬라지만 보면 내 천주교 정나미가 떨어진다.’
‘예비자 교리에 몇 번 나가려고 하다가도 너 하는 꼬라지만 보면 나도 나가서 너처럼 망가질까봐
못나가겠다. 내 차라리 이렇게 사는 게 낫겠다.’
성당 열심한 자매가 성당에서 오만 일을 다 합니다.
그러나 동네에 가면 다 손가락질을 합니다.
동네에서는 돈 빌려 가면 떼어먹는 것으로 유명하고, 없는 말 꾸며내기로 유명하다면
그 동네 이방인들이 성당 다니는 그 자매를 보고 성당에 나오겠느냐~~ 천만의 말씀.
‘이방인들 앞에서 행실을 단정히 해라.’
진실을 향해서 몸부림치는 말과 행동을 가졌을 때 참다운 권위가 시작되며
참다운 권위를 가지기 위해서는 위선의 삶으로부터 벗어나야 됩니다.
두 번째 자기가 만들어 놓은 거짓 법에 얽매여 살아서는 안 됩니다.
부모가 다르고,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상식이 다르고, 배운 정도가 다르고, 가지고 있는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그런 것이 다 얽히고 설켜서 자기만의 개인적인 법과 주관적인 잣대가 있습니다.
문제는 그 잣대의 눈금이 맞느냐?
맞지도 안습니다.
맞지도 않은 잣대를 가지고 사람을 잽니다.
하느님을 잽니다.
본당신부를 잽니다.
자기 인생을 재단합니다.
법이라고 하는 것은 내용을 담고 있는 그릇이기 때문에 모든 법은 하느님과 인간위에 있으면 안 됩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주관의 법은 성령의 불로 태워서 예수님의 잣대로 만들어야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과 관용의 잣대가 아닌가?
내 삶의 비교의 대상은 인간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한분이어야 합니다.
사람을 중심으로 비교하는 사람들은 교만이 쌓일 수밖에 없습니다.
‘저 인간 나보다 못해.’
‘나 정도 되어 봐라.’
‘우리 성당에 나만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우리 레지오 나 없으면 벌써 깨졌어.’
이런 식으로 사람을 기준으로 삼는 사람은 늘 교만으로부터 헤어나질 못합니다.
세 번째, 고통을 대하는 자세가 긍정적일 때 참다운 권위를 갖습니다.
고통의 밑바닥까지 내려간 사람은 담대하며 지혜가 있습니다.
많은 경험과 수많은 십자가를 통해서 그때그때마다 영적으로 이것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되는지....
지혜와 분별이 있기 때문에 권위가 있습니다.
우리 신자들은 사제건 수도자건 평신도건 주님 앞에 갈 때까지
영혼의 어두운 밤을 자주 겪게 됩니다.
사제는 사제대로 그 어둔 밤은 다른 색깔로 찾아옵니다.
어느 한 순간에 모든 의욕을 잃어버리고, 미사 드리는 것도 귀찮고, 신자들 만나는 것도 귀찮고
어디로 도망하고 싶습니다.
절벽 끝에 선 느낌을 받습니다.
사막 한가운데 버려진 느낌을 받습니다.
성체 앞에 앉아도 아무런 느낌이 없습니다.
신자들도 살아가다보면 이런 영혼의 어두운 밤을 겪습니다.
‘하느님에게 버림받았다는 느낌’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런 어두운 밤이야말로 어느 때보다도 주님이 옆에 계실 때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런 영혼의 어두운 밤을 겪을 때마다 희망을 가져야 됩니다.
때로는 하느님이 손을 놓은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걸음마 하는 아이에게 엄마는 처음에 아이의 옷을 잡고 걸음마를 가르칩니다.
그러다가 슬그머니 옷을 놓고 엄마는 문 뒤에 숨어서 아이가 걷는 것을 봅니다.
아이는 엄마가 뒤에서 옷을 잡고 있다고 생각하고 뒤뚱뒤뚱 걷다가
느낌이 이상해서 뒤를 돌아보니 엄마가 있어요? 없어요?
없죠?
그때 아이는 완전히 후들후들 거립니다.
아이의 눈에는 엄마가 안 보인다 하더라도 엄마는 내 사랑하는 자식이 넘어질 때는
언제라도 몸을 날려서 아이를 잡을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주님에게 버림받았다는 느낌, 세상에 나 혼자라는 느낌, 고통의 밑바닥까지
떨어져있는 그 순간이라고 하더라도 주님의 눈길은 우리들에게서 떠난 적이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살아서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저도 26년 사제생활 하면서 수없이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그때마다 죽을 것 같았지만,
사제복을 벗어야하는 상황이 수도 없이 많았지만.....
이렇게 살아서 은경축을 지내고 여러분들 앞에서 사제생활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고통을 대하는 자세가 담대해야 됩니다.
손에 가시가 하나 박혔다고 호들갑을 떨어서는 안 됩니다.
‘박혔구나!’
야고보서 1장 2절에
‘여러 가지 시련을 당할 때, 그것을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1장 12절에 ‘시련을 견뎌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
‘내게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예상치 않았던 고통, 육신이 주는 고통, 남편 자식 인간이 주는 고통, 환경이 주는 고통,
물질 때문에 당하는 고통......
그 모든 순간순간을 잘 이겨나갈 때, 우리는 권위 있는 사람으로 주님 앞에 성숙한 신앙인이 될 겁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은 권위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치유의 능력이 있었고, 마귀를 떼어내는 구마의 권위가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가정에서 자식에게 권위 있는 아버지로 살 때에는그 자식들이 치유가 됩니다.
아버지의 따뜻한 말 한마디에 자식의 어두움이 물러갑니다.
본당신부가 정성을 다해서 강론을 준비하고, 성령께 도움을 청하면서 말씀을 선포할 때는
그 강론을 듣는 사람들, 그 피정을 듣는 사람들에게 영적변화가 일어납니다.
오늘 이 거룩한 성모님의 성지에 초대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이 험악한 세상에
주님이 주신 참다운 권위로 무장하도록 노력합시다.
아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카페에서
tILLJerry Vale - Till
Till
CateriTTillTnaTT Valente - Till
Til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