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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 제5주간 - 만남 [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작성자박명옥 쪽지 캡슐 작성일2011-02-08 조회수725 추천수10 반대(0) 신고
                                                           
 
 
 
 
 
 

          배티 성지 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사람이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만남이 많이 있는데 나는 이제까지 살면서 큰 만남을 두 번을 겪었다. 첫 번째 만남은 내가 성소를 받게된 그런 만남이다. 내가 일반학교를 다니고 있을 무렵 나의 아버지, 어머니는 성당에 원래 열심이셨고, 나는 장남으로서 마지못해 성당에 가면 40분 졸고 20분 자고 그렇게 60분을 채웠다. 그렇게 살고 있었는데 하느님께서 나를 선택하신 그 방법이 참으로 오묘했다.


그때 부모님과 나는 인천에서 살고 있었다. 우리 집에 백 평짜리 양계장이 있었는데 닭을 기르지 않아 그냥 빈 창고였다. 어느 날 내가 방에서 책을 보고 있는데 창고 쪽에서 “꽝"하는 소리가 났다. 기분이 이상해 창고 쪽으로 가서 안을 들여다보니 참으로 기가 막힌 광경이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아버지가 쓰러져 계셨는데 천장이 뻥 뚫려져 있고 옆에 돌멩이 하나가 커다란 게 있고 아버지는 벌써 거품을 물고 계셨다.

아버지 맥을 짚어 보고 가슴에 손을 대어보니 뛰지 않았다. 그냥 돌아가신 것이었다. 어머니는 동생들을 데리고 인천 시내로 미사를 드리러 가셨고, 내가 항상 도망다니니까 아버지는 내 손을 꼭 잡고 토요일날 특전미사를 드리고서 주일날 둘이서 집을 지키고 있다가 그런 일을 당한 것이었다. 어떻게 할 재간이 없었다.

이미 시체로 변한 아버지를 내 무릎에 끌어안고 그때 생전 처음 기도라는 걸 했다. 지금 사제로 살면서도 그때만큼 절실한 기도를 못하고 있다.

 “하느님, 당신이 정말 존재하는 분이라면 우리 아버지 죽으시면 절대 안 됩니다. 살려 주십시오. 살려주시면 제가 신부될게요.” 그랬다.

좋은 말도 많은데 열심한 신자도 아니었던 내가 왜 그런 약속을 했는지....말 한 번 잘못했다가...여러분들, 하느님과 약속할 때 잘 하세요^^ 아버지를 무릎에 껴안고 “살려만 주시면 내가 신학교 가겠습니다.”

한참을 눈물이 범벅이 되어 기도를 하는데 뭔가 내 무릎을 더듬어 눈을 뜨고 보니 아버지 손가락이 조금씩 움직이는 것이었다. 얼마 후 아버지가 “토마스”하고 내 본명을 부르셨다.

내 눈앞에서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아버지를 눕혀놓고 가까운 마을로 달려가서 앰블란스를 불렀다. 병원에 가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멀쩡했다.

7월 14일(내 생일이기 때문에 안 잊어버림), 초여름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바람이 불어 창고 스레트 지붕이 흔들리자 흔들리는 슬래트 지붕을 눌러 놓으려고 아버지께서 사닥다리를 놓고 돌을 하나 안고 지붕으로 올라가신 것이었다. 아버지의 몸무게가 110㎏정도 되셨는데 거기다가 돌까지 하나 안고 올라가셨으니 낡은 스래트가 어찌 견뎠겠는가. 올라가자마자 “꽝”하고 떨어지면서 안고 있던 돌에 머리를 부딪치고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창고에 있던 책상 모서리에 머리를 찢기고 땅에 또 한 차례 부딪치신 것 것이다. 책상 모서리에는 아버지의 머리카락이 묻어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뇌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아버지는 그 후에 내가 신학교를 간다고 하니까 콧방귀를 뀌셨다. 평소에 성당에나 좀 열심히 다녔던 사람이 그러면 이해를 하겠는데 맨날 땡땡이만 치고 연애하는데는 1등이었던 사람이 신학교 간다고 하니까 도대체 믿지를 않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그때 죽어 계셨고 하느님과 나 사이에 어떤 만남이 있었는지 아실 리가 없었다.

신학교에 보따리를 싸서 다 보내고 아버지께

“신부가 되려면 한 10년 걸린다고 들었습니다. 신부가 되어 첫 미사를 드리는 날 다 말씀 드릴 테니까 그때까지는 왜 신학교에 가려고 하는지 묻지 말아 주십시오.”

라고 요청드렸다. 그 후 아버지께서는 정말 한번도 묻지 않으셨다.


그렇게 시작된 신학교 생활을 10년동안 잘 하다가 부제 때 디스크에 걸렸다. 병원에 가니까 디스크가 너무 심해 오른쪽 다리에 마비가 와서 꼬집어도 감각이 없었다. 부제로 1년 있으면서 공부도 제대로 못하고 후배들이 타다주는 밥을 방에서 받아먹으며 침대에만 누워 지냈다. 서품은 가까와 오고 있었지만 주교님께서

“너 못 주겠다” 얘기를 안하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제의도 맞추고 서품상본도 만들고 수녀원에서 첫 미사를 드릴 계획을 잡으며

‘야, 그래도 신부가 되나보다’하며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고 아주 들떠 있었다.


드디어 사제서품식 전날 밤, 주교관에서 서품 받을 사람 넷이 자고 있는데 새벽 한 5시정도 되어서 신부님이 나를 따로 부르셨다.

“왜 그러십니까?” 하니까 말을 못하셨다.

“어떻게 얘길 해야 되냐? 주교님이 못 주시겠대.”

바로 몇 시간만 지나면 신부가 되는 그 순간에 주교님께서 서품 못 주시겠다며 당장 빈센트병원으로 가 입원해 있으라고 하니 이런 날벼락이 없었다.

기가 막혔다.

부모님은 벌써 그 전날 와서 여관에 머무르고 계셨다.

인천에서 차를 대절해 가지고 서품식을 보러 오셨던 것이다.

그런데 그날 새벽에 서품 못 주시겠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이유가 뭡니까?”

“니 몸 때문에 그렇지.”

“그럼 그전에 얘기하시지 왜 오늘 얘기하십니까? 이래도 되는 겁니까?”

그날 나는 다른 신부님 차에 실려 수원 빈센트 병원으로 끌려갔다고 하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일 것이다.


서품식이 시작되어 입장을 할 때, 사진에는 분명 네 사람인데 세 사람만 입장하고 아무리 기다려도 아들이 들어오지 않으니 아버지, 어머니는 물론 모두들 얼마나 어리둥절하셨겠는가!


그때 별의별 얘기가 다 있었다고 한다.

‘감춰둔 애인이 나타나서 새신부를 나꿔챘다.’

‘고무신을 거꾸로 신었다.’

바로 전날까지도 네 사람이 서품을 받기로 돼 있었으니까.... 그런 상상들을 할만도 했다.


나는 빈센트 병원에 있으면서 참 고민을 많이 했다. 의사들도

“부제님은 성직생활 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상태로는 그냥 포기하시는게 안 좋겠습니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절대 포기할 수가 없었다.

왜? 

내가 성소를 받는 그것부터가 주님께서 나를 특별히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부르셨기 때문에 내가 포기하지 않는 한 하느님께서는 나를 꼭 사제로 만들어 주신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내가 병원에 있었던 한 달 동안 주교님은 기다리셨던 것 같다. 내가 포기하고 “나 이제 집에 갈래요.” 하기를….

그런데 암만 지나도 포기하겠단 소리를 안 하고 입원비만 자꾸 늘어가는 것이었다.


결국 우리 주교님은 주교좌성당인 청주 내덕동 성당, 일거리 제일 많은 데로 나를 보냈다.

일하다가 지겹고 힘들면 집에 간다고 하길 원하셨던 모양이다.

그곳 본당 신부님이 얼마나 시집살이를 시키시던지 정신이 없었다.

허리에 코르셋을 하고 하루에 진통제를 열 알씩 먹어가면서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시키는 걸 그대로 다 했다.

석 달 동안을 하다가... 하다가 너무 아파서 하느님께

“하느님! 저 이제 할 만큼 했습니다. 제가 이게 하기 싫어서... 뭐 애인이 생겨서 이렇게 관두는 게 아니고 어떻게 할 재간이 없습니다. 저 이제 보따리 싸 가지고 집으로 가렵니다.”

하며 넋두리하듯 기도를 드렸다.


보따리를 다 싸놓고 내일이면 주교님께 가서 얘기 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 전날 김대건 신부님 유해를 신자들이 꽃가마로 모시고 오는 것을 보고 ‘그래, 김대건 신부님께 한번 부탁드려 볼까!’

하는 마음이 생겨 신자들이 다 가고 난 다음 추운 밤중에 몰래 담요를 뒤집어쓰고서는 성당 문을 열고 들어갔다.

김대건 신부님 유해 앞에서 3일 밤을 혼자 지샜다.

철야를 한 것이었다. 그러나 밤을 새면서도 내가 아프니까 낫게 해 달라는 말은 한 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너무 속보이는 것 같아서….

 ‘아이고, 형님은 내속 알겠지.....’

그냥 그 소리만 했다.


그렇게 3일째 되던 날 새벽에 잠깐 잠이 들었다가 깼는데 기분이, 몸이 아주 가볍게 느껴졌다.

그래서 일어나 보니 쉽게 일어나지는 것이었다. 다른 때 같으면 너무 아프기 때문에 바로 못 일어나고 몸을 한 바퀴 빙그르 돌리며 팔을 짚고 일어나야 했다.

‘야, 이상하다.’

무릎을, 허벅지를 꼬집어보니까 감각이 왔다.

신기했다. 

한번 뛰어봤다.

껑충껑충 뛰어졌다.

디스크가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여도 움직일 때마다 신경을 누르기 때문에 그 고통은 앓아본 사람 아니면 모른다. 그런데 껑충껑충 뛰어도 통증이 없었다. 성당 안에서 왔다 갔다 해 보기도 하고 막 뛰어도 보고 그랬다.

처음에는 치유가 된 거라고는 생각 못했고, 너무 낫고 싶어 하는 간절한 마음 때문에 일시적으로 올 수 있다는 마취현상인가보다 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 열흘 동안은 아무한테도 얘기를 못하고 진통제를 끊어 봤다. 진통제를 끊어 봐도 아프지 않아 코르셋을 풀러 봤다. 1년 이상 코르셋을 하고 지내며 나는 이 코르셋을 풀면 몸이 오징어처럼 흐물흐물 하게 될 것 같아 잠잘 때도 항상 차고 있었다. 그러나 찬 걸 조심스럽게 끌러보았는데 허리가 꺾이지 않았다.

너무 이상해서 병원을 찾아가 한번 검사 좀 해 달라고 그랬다.

의사 양반이 정밀검사를 하고 나오더니

“아니, 부제님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디스크가 나았어요!”

하는 거였다. 나는 그때서야 우리 종씨가 고쳐 줬다고 대답했다.

“누구신대요, 그분이?”

“김대건 신부님이 고쳐준 것 같아요.”

이렇게 김대건 신부님과의 인연은 시작되었고 내 인생에 있어 두 번째 큰 만남이 되었다.


며칠 후 교구체육 대회가 있었다.

주교님과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내가 100m 달리기 계주를 했다.

주교님 앞은 지날 때 일부러 손을 막 흔들었다.

 주교님이 본부석에 앉아 계시다가

“저거 누구야 뛰는 거? 김 부제 아니야? 저 사람이 어떻게 뛰어?” 

하시며 놀랐다.

마침 그 옆에 내 담당의사가 앉아 있다가.

“주교님, 의학적으로는 완치가 됐습니다.”

그렇게 해서 10일 뒤에 서품을 받게 되었다.

서품을 받는 날 나는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 카페에서

 

          

 

 

                              

                                              사랑의 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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