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성찬 주님의 최후 만찬을 기억(anamnesis)하여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고,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으며 하느님을 찬미"(사도 2,46-47)하던 초기 교회 공동체의 소박한 성찬은 콘스탄티누스 시대에 이르러 장엄한 공회당(Basilica) 전례로 바뀌었다. 중세에 접어들어 프랑크 제국의 통합을 위하여 전례 통일을 주도한 칼 대제의 영향으로 전례는 더욱 화려하고 엄숙하게 변하였고, 분리된 공간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거행되는 '거룩한 예식'에서 신자들은 점점 소외되어 수동적인 존재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그리스도 신자들이 이 신앙의 신비에 마치 국외자나 말 없는 구경꾼처럼 끼여 있지 않도록"(전례 헌장, 48항) 신자들의 "능동적인 참여(participatio actuosa)'를 강조하였고, 미사란 사제가 자신의 '거룩한 힘(potestas sacra)' 으로 하느님 백성을 '위해서' 바쳐 올리는 제사가 아니라, 하느님 백성과 '더불어' 거행하는 감사(eucharistia)와 찬미(eulogia)의 잔치이며,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들을 위해 몸소 마련해 주시는 "자비의 성사요 일치의 표징이며 사랑의 끈"(전례 헌장, 47항)임을 일깨워 주었다. 또한 미사가 "고귀한 단순성(simplicitas nobilis)으로 빛나야 한다."(전례 헌장, 34항)는 대원칙 아래, 주님 성찬의 참된 의미를 왜곡하거나 잘못 끼어든 요소들을 개혁해야 하고(전례 헌장, 21항 참조), "시대의 흐름에 따라 중복된 것이나 덜 유익하게 덧붙여진 것은 삭제되어야 한다."(전례 헌장,50항)고 천명하였다. 참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개혁은 가톨릭 신자들의 교회 생활에서 엄청난 변화와 쇄신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끊임없이 성경과 교부들의 원천으로 돌아가 미사 전례 안에서 주님 성찬의 본질적인 의미를 더욱 충실히 회복해야 할 과제도 남겨 주었다(전례 헌장,21.50항 참조). 오늘도 우리는 2000여 년 전 예수님께서 어느 이층방에서 애틋한 사랑으로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던 바로 그 빵을 받아 먹고 그 술을 받아 마신다. 우리가 먹는 한 조각의 빵은 세상의 불의와 거짓에 맞서 하느님의 정의와 진리를 증언하다 처절하게 부서지고 찢겨 십자가에 매달리신 주님의 몸이요, 우리가 마시는 한 방울의 술은 일생을 남을 위해 살다 마침내 목숨마저 내놓으신 예수님의 심장에서 뚝뚝 흘러내리는 사랑의 피다. 이 보잘것없어 보이는 빵과 술안에 예수님의 삶과 죽음이 담겨 있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현존하신다. 우리는 이빵을 먹고 이 술을 마실때마다 "먹보요 술꾼"이라는 비난을 받으시면서도 창녀와 세리, 죄인과 병자들과 더불어 즐겨 먹고 마시며 그들의 벗이 되어 주시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마태 11,19 참조), 나병환자의 움막에서 그들과 더불어 호탕하게 술잔을 돌리시고 가난한 빵을 떼어 그들의 일그러진 손에 쥐어 주시던 주님을 만나 뵙는다(마르 14,3 참조), 마지막 이별 회식 때 제자들 앞에 무릎을 꿇고 발을 닦아 주시던 그분께서는 부활하신 후에도 손수 숯불을 피워 아침 식사를 마련하시고, 밤새 고생하던 제자들을 불로 빵도 집어 주시고 생선도 집어 주시며 지금도 우리를 섬기고 계신다(요한 21,1-14 참조). 미사는 수난하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온 인류를 향하여 지니고 계신 그 애틋한 사랑의 마음이 살아 숨 쉬는 자리이다. 못내 사랑하신 제자들을 끝내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의 마음이 살아 있는 곳이요, 은전 서른 닢에 스승을 '건네주었던(tradere)' 배신자 유다에게도 당신의 몸과 피를 '건네주시던(tradere)' 그분의 한결같은 사랑과 자비가 '기억(anamnesis)'되는 곳이며, 십자가에 고통스레 매달린 순간에도 죄인들을 용서해 달라고 아버지께 간절히 기도하시던 예수그리스도의 자비와 용서가 선포되는 자리이고, 서로 잡아먹으며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이 남을 위하여 피 흘리고 먹히는 성찬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자리이다. "전례는 교회 활동이 지향하는 정점이며, 동시에 교회의 모든 힘이 흘러나오는 원천이다"(전례 헌장, 10항), 미사 전례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충만히 드러나지 못하고, 공동체에서 우러나오는 찬미와 감사가 하나로 어우러지지 못할 때, 우리 교회 안에는 주일 의무를 채우기에 급급한 신자들이 늘어나고 교회의 규정과 규율만을 중시하는 신앙의 형식주의가 확산되어 갈수밖에 없다. 주일마다 함께 모여 성찬을 거행하는 것은 아름답고 오랜 우리 교회의 전통이지만(유스티노, [첫째 호교서]Apologia prima 67장 참조 - 150 ~ 160년 무렵), 주일 의무를 지키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자의로든 타의로든 성찬의 식탁에서 소외되는 것은 주님의 성찬이 지닌 참뜻에 어긋난다. 성찬은 그야말로 사랑과 자비의 성사이다.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더불어 나눈 식사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나타내는 명백한 징표였듯이, 주님께서는 성찬을 통하여 당신의 용서를 보증해 주신다. "모두 이 잔을 마셔라. 이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태 26,28)라는 최후의 만찬에 대한 증언은 성찬 자체가 죄의 용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우리는 미사 첫머리에,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루카 18,13)라고 기도하던 세리처럼 가슴을 치며 참회하고, 한마음으로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간구한다. 이어서 우리 죄를 헤아리지 마시고 당신 자비와 용서를 신뢰하는 교회의 믿음을 굽어보십사 기도한 후, 성체를 모시기에 앞서 거듭 주님의 자비를 간청하면서 비록 부당하기 짝이 없는 우리이지만, 주님의 한 말씀으로만으로도 죄와 허물에 병든 우리 영혼이 당장 낫게 되리라는 이방인의 믿음을 고백한다. 과연 하는님께서는 이토록 자비와 용서를 간청하는 당신 자녀를 성찬의 식탁에서 내치실까? 성찬 식탁의 주인도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당신 자신을 식탁의 선물로 내어 주시는 분도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면, 그 식탁에 모여드는 사람이 죄인이라 하여 가로막는 일을 예수님께서 정말 원하실까? 파견된 사람은 파견하신 분이 지니신 사랑의 마음과 구원의 의지를 충실히 드러내야 한다. 사제가 예수님의 마음으로 행동하고, 예수님의 눈으로 바라보고, 예수님의 말씀으로 말할 때, 신자들은 거기에서 살아 계신 하느님의 현존을 더욱 생생하게 체험하게 된다. '종(minister)'의 '직무(ministerium)'를 잊지 않고 살아가는 사제들은 미사 전례 안에서 주인공의 자리를 언제나 예수님께 내어 드릴 줄 안다. 그래서 그들은 비록 인간적으로 부족할지라도 날마다 당신 제단에 나아와 "봉사하게(ministare)" 해 주심에 감사한다. 교부들의 한결같은 가르침에서 보듯, 성사의 주인은 언제나 그리스도이시고, 모든 전례와 성사는 '하느님의 일(opus Dei)'이며 '그리스도의 행위(actus Christi)'이기에, 성직자들은 언제나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 17,10)라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다. 전례를 거룩하고 아름답게 거행하는 공동체는 그 구성원들의 삶도 성찬적이고 전례적이다. 본당 공동체의 전례 봉사자들이 사제와 더불어 각자의 역할에 따라 한마음 한뜻으로 정성스레 준비하여 드리는 미사를 통하여 신자들은 하느님의 사랑에 젖어들고 공동체적 친교에 맛들이게 된다. 미사 전례야말로 교회 생활의 중심이며, 주님 몸소 가르치고 양육하시는, 비할 데 없이 소중한 신앙 교육의 자리이다. [사목, 2007년 3월호, 최원호 신부 / 김종헌 신부의 전례 & 전례음악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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