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무엇이 좀 보이느냐?' - [유광수신부님의 복음묵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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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정복순 | 작성일2011-02-16 | 조회수446 | 추천수7 | 반대(0) 신고 |
'무엇이 좀 보이느냐? (마르 8 22-26)
-유 광수신부-
소경은 보지 못하는 사람이다. 앙상하게 달려 있는 나무 잎을 바라보는 시인에게는 시상이 떠올라야 하고 음악가는 곡이 떠올라야 시인이요 음악가라 할 수 있다 단순히 남들이 보는 것과 똑같은 나무 잎으로 본다면 시인도 음악가도 될 수 없다. 보는 그것을 통해서 그 이상의 세계에로 즉 자기의 세계를 바라 볼 수 있어야 한다.
말씀을 들으면 하느님의 말씀으로 들을 수 있어야 하고 하느님의 업적을 보면 하느님의 위대한 능력을 볼 수 있어야 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아무런 느낌이 없을 때 하느님의 기적을 보면서도 아무런 하느님의 영광을 보지 못할 때 우리는 소경이고 귀머거리이다.
"예수께서는 소경의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고 손을 얹으신 다음" 이라고 소경을 치유해 주시는 예수님의 치유 방법이 비교적 상세하게 그리고 단계적으로 치유시켜 주시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눈을 뜨라"는 한 마디 말씀만으로도 고쳐 주실 수 있으신 분이 이렇게 복잡한 행동을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만일에 예수님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시는 데에만 목적이 있었다면 간단히 한 마디 말씀으로 고쳐 주셨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병을 고쳐 주시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에 대한 당신의 사랑에 대한 표현과 그 사람의 인격을 존중해주시는 표현이시다.
그 사람의 손을 잡아 주시는 어머니와 같은 사랑의 예수님,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시어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만드시지 않으시고 그 소경의 현실을 그대로 받아주시고 존중해 주시는 예수님, 그리고 그의 두 눈에 침을 발라 주셨는데 침은 유다교에서 안질에 특효가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었다. 침을 바르는 것은 곧 병자가 도움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손을 얹으심은 곧 치유의 능력이 병자에게 전달되어 눈을 뜨게 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예수님이 열 두 제자들이 당신을 알아볼 수 있게 하기 위해 어떻게 해 오셨는 지를 요약해서 보여 주시는 것이고 이제는 소경이 점차적으로 볼 수 있게 되듯이 열 두 제자들도 당신을 알아보는 눈이 뜨일 때가 되었음을 예고해 주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수 없이 우리의 손을 잡아 이끌어 주시려고 하셨지만 잡은 손을 뿌리친 것은 우리요, 눈에 바른 침을 닦아 낸 것도 우리다. 예수님이 얼마나 많이 우리의 손을 잡아 주셨는지 그리고 조용한 곳으로 데리고 나가서 우리 두 눈에 침을 발라 주시려고 했는지 기억해보자.
눈먼 벌치기의 주인공인 박광호씨가 의사의 진단을 받고 "수술하면 볼 수 있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가 기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기뻐하던 모습이 떠 오른다. "이제 무엇이 보입니까?"라는 말은 "당신이 한번도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가 보입니까?"는 말이다. 본다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세 개의 눈이 있다고 한다. 육안, 심안, 영안이다. 육안으로는 겉으로 드러난 것을 보는 것이다. 심안이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부분까지도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이다. 영안이란 우리의 능력이 아닌 신앙의 눈으로 좀 더 구체적으로 성령의 인도롤 하느님의 신비를 볼 수 있는 눈이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예수와 함께 나란히 걸어가면서도 예수를 알아 보지 못했던 그들이 빵을 뗄 때 예수인줄을 알아 볼 수 있는 눈을 갖게된 눈이다. 육안으로 사물을 잘 보기 위해서 시력이 좋아야 하고 시력이 좋은 것만큼 잘 볼 수 있듯이 영안은 신앙의 깊이만큼 복음에 눈을 뜬 만큼 볼 수 있게 된다. 영안은 나의 능력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빛을 받아 보는 것이다.
그래서 시편작가는 "당신 빛으로 빛을 보옵나이다"(시편 35, 10)이라고 노래하였던 것이다.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라 오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요한 8, 12)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생활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마태 5, 14- 16)고 하셨다. 우리 자신이 빛이 되기 위해서는 빛이신 예수님한테 그 빛을 받아야 한다. 영안으로 본다는 것은 곧 하느님의 빛을 받아 본다는 것이다. 마치 달이 태양의 빛을 받아 비추듯이 말이다.
하느님의 나라를 보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있는 눈과 빛인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하다. 빛인 하느님의 은총없이 인간적인 눈만 갖고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보지 못한다. 그래서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베드로가 대답하자 예수께서 "시몬 바르요나, 너에게 그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이시니 너는 복이 있다"(마태 16,16-17)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를 보기 위해서는 예수의 일행이 소경을 데리고 와서 손을 대어 고쳐 주시기를 청하듯이 빛인 하느님의 은총을 청해야 한다. 하느님의 은총없이 순전히 인간적인 눈으로만 보고 들으려고 할 때 "너희는 눈이 있으면서도 알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으면서도 알아 듣지 못한다"는 꾸중을 들을 것이다.
무엇이 보이느냐? 하는 질문은 오늘 또 다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던지시는 질문이다. 우리가 육안으로만 보고 영안으로 볼 수 없다면 아직도 우리 마음에 복음의 빛이 들어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엇이 좀 보이느냐?"라는 질문에 소경은 눈을 뜨면서 "나무 같은 것이 보이는데 걸어 다니는 걸 보니 아마 사람들인가 봅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아직 확실히 보이지는 않지만 눈을 뜨면서 무엇인가가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이 이 소경에게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이 사람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형언할 수 없는 이 사람의 흥분된 기분이 우리에게도 전달되는가?
한참 인기있었던 대중 가요 중에서 "이른 아침에 잠에서 깨어, 너를 바라볼 수 있다면"으로 시작되는 노래가 있었다.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었던 사랑하는 애인을 이른 아침에 눈을 뜨면서 바라 볼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하루를 살아도 행복할 수 있다면 나는 그 길을 택하고 싶어"라고 노래한다. 눈을 뜨면서 볼 수 있다는 것 그것도 자기가 보고자 했던 사람을 바라 볼 수 있다는 것은 가장 큰 행복이다.
시편작가는 "주여 당신 얼굴을 찾고 있사오니 그 얼굴 나에게서 감추지 마옵소서"(시편 26, 9)이라고 애원하였다. 하느님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모든 성인들의 희망이며 꿈이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이른 아침에 바라 볼 수 있는 것이 행복이라면 하느님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기쁨이며 행복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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