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8,34ㅡ9,1
그때에 34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3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3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37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38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9,1 예수님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바르나바’라는 청년이 있습니다. 삼십대 중반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아직도 갓난아이처럼 그의 어머니가 밥을 먹여 주고 대소변을 처리해 주어야 할 정도로 중증 장애인입니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는 잠시도 그를 떠나 있지 못하고 마치 한 몸처럼 움직입니다.
사람들은 그 어머니를 볼 때마다 “‘애물단지’를 안고 사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으냐?”고 인사를 하곤 합니다. 그런데 바르나바의 어머니는 정작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장애인 아들을 통해서 자신의 인생에서 받은 은총이 얼마나 큰데, 왜 사람들이 애물단지로만 보는지 오히려 이해가 안 간다.’는 것입니다. 어느새 그의 어머니는 신앙 안에서 자신이 안고 사는 십자가와 한 몸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지고 사는 십자가가 더 이상 고통의 십자가가 아니라 은총이 된 것입니다.
어느 날, 바르나바의 어머니는 ‘복음 나누기’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르나바가 너무 몸이 아파서 지난주에는 성당에 데리고 가지 못했습니다. 혼자 하는 미사가 너무나 외로웠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언젠가 하느님 나라에 갈 때, 바르나바와 함께만 있다면 아무것도 부러울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 어머니는 자신의 삶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미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지상에서 이미 하느님 나라를 살고 있습니다. 삶의 십자가가 없는 것이 하느님 나라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운명처럼 지고 살아야 하는 삶의 십자가와 한 몸이 되어, 그 안에서 주님을 깊이 만나며 사는 것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참된 기쁨과 행복은 이런 사람들의 몫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