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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1-02-20 조회수804 추천수12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1년 2월 20일 연중 제7주일
 
 
 
I say to you, love your enemies
and pray for those who persecute you,
that you may be children of your heavenly Father,
(Mt.5.44-45) 
 
 
제1독서 레위기 19,1-2.17-18
제2독서 1코린토 3,16-23
복음 마태오 5,38-43
 
어제 점심에 부모님과 식사를 함께 했습니다. 내일이 두 분 결혼하신 지 58주년 되는 해인데, 저의 바쁜 일정으로 당일 날 축하드릴 수가 없어 어제 점심 식사를 함께 하며 작게나마 축하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식사를 하던 중에, 53년 결혼하신 해에 피난 가신 이야기를 처음으로 듣게 되었습니다. 충남 부여에서 사시다가 부산으로 피난을 가야 했던 이야기였지요. 저는 부산에서 피난살이를 하며 힘드시지 않았느냐고 여쭈었습니다. 그랬더니 두 분의 대답이 이렇게 똑같습니다.

“글쎄, 그렇게 힘든지 몰랐는데? 오히려 그때가 제일 재미있었던 것 같아.”

방 군불을 때기 위해 직장을 마치고서는 함께 땔감을 구하러 산으로 가야 했고 먹을 것도 부족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가 재미있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저 역시 생각해보니 좋은 일만 가득했을 때보다, 오히려 어렵고 힘들었던 시련의 순간이 지금에 와서는 더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그리고 그때가 더 재미있었고 신나게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렇게 피하고 싶어 하는 고통과 시련의 순간이란 과연 어떤 시간일까요? 어쩌면 나를 가장 재미있고 신나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축복의 시간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그냥 어렵다고 포기하고 좌절에 빠지게 되면 어떨까요? 그 축복의 시간을 나의 것으로 만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어떠한 순간에도 좌절에 빠지지 않는 자신감 넘치는 자세 그리고 긍정적인 마음이 필요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통해서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면서 이웃을 사랑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심지어 원수까지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내 오른뺨을 친 사람에게 내 왼뺨을 내밀 수가 있으며, 내 속옷을 빼앗으려는 사람에게 내 겉옷을 내어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야만 하는 상황에 처한다면 억울해서 좌절에 빠지게 될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관점으로 생각하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용서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세상의 관점에서 벗어나, 용서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마음을 갖고 하느님 앞에 힘차게 나오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를 어디부터 어디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눈에 보이는 거리를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도 더 먼 거리는 아마 내 머리에서 발끝까지라고 생각됩니다. 내 머리에서는 모든 것을 생각하고 모든 것을 다짐하지요. 그러나 내 발까지 내려가서 행하는 실천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따라서 다짐하는 내 머리에서부터 실천하는 내 발끝까지의 거리는 가장 가까워 보이지만 사실은 보통 먼 거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거리를 짧게 줄일 수 있는 적극적인 실천이 우리들에게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사랑 말씀은 단순히 우리의 머릿속에서만 머무는 관념적인 것이 아닌 우리의 발끝까지 다다라서 행동하는 실천이 따를 때, 이 세상에서 가장 힘 있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실천을 통해서만이 우리들은 하느님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우리 역시 완전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희망은 명예에, 어떤 사람의 희망은 황금에 있다. 그러나 나의 큰 희망은 사람에 있다(윌리엄 부스).




 

나무 스스로(한페이, ‘뭐 될래?’ 중에서)

아버지는 고향 집 맞은편에 있는 널따란 땅을 마호가니 묘목을 기르는 사람에게 임대했다. 그는 묘목을 심은 뒤 물을 뿌리러 나왔다. 이상한 것은 물 주는 날짜나 물의 양이 제멋대로라는 사실이었다. 사흘이나 닷새, 열흘 만에 올 때도 있었다. 물을 많이 줄 때도, 겨우 적실 정도만 줄 때도 있었다. 더욱 이상한 일은 묘목이 메말라 죽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올 때마나 묘목 몇 그루를 가져와 심었다. 처음에는 게을러서 묘목을 말려 죽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게으른 사람이 새 묘목을 가져오는 것도 이해되지 않았다.

나는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해 그에게 물었다. “날마다 물을 주면 마호가니가 말라 죽지 않을 거 아녜요?” 그는 말했다. “나무는 한두 달 가꿔 수확하는 채소와 달리 무릇 백 년을 내다보고 길러야 하네. 나무 스스로 땅속에서 물이 나오는 곳을 찾을 줄 알아야 하지. 내가 물을 주는 것은 하늘을 흉내 내는 것뿐일세. 하늘이 예고하고 비와 바람을 내린 적 있던가? 불규칙한 날씨에 적응 못한 묘목은 자연스레 말라 죽지만, 죽자사자 땅속으로 파고들어 수원을 찾아내는 나무는 백 년이 지나도 거뜬히 살아남는다네.”

그는 말을 이어 나갔다. “만일 내가 시간 맞춰 꼬박꼬박 물을 준다면 묘목은 의지하는 습관이 생길 걸세. 뿌리가 땅 표면에서만 겉돌고 깊게 파고들지 못해 물 주는 횟수가 줄면 금세 말라 죽지. 살아남는다 해도 세찬 바람에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기 쉽지.” 나는 큰 감명을 받았다. 어디 나무뿐이랴, 사람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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