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어린이 예찬_소파(小波) 방정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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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미 | 작성일2011-02-26 | 조회수389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어린이 예찬 _소파(小波) 방정환 어린이가 잠을 잔다. 내 무릎 앞에 편안히 누워서 낮잠을 자고 있다. 볕좋은 첫여름 조용한 오후이다.
어린이는 복되다 ! 이 때까지 모든 사람들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복을 준다고 믿어왔다. 그 복을 많이 가져 온 이가 어린이다. 그래 그 한없이 많이 가지고 온 복을 우리에게도 나누어준다. 어린이는 순 복덩어리다. 마른 잔디에 새 풀이 나고 나뭇가지에 새 움이 돋는다고 제일 먼저 기뻐 날뛰는 이도 어린이다. 봄이 왔다고 종달새와 함께 노래하는 이도 어린이고 꽃이 피었다고 나비와 함께 춤을 추는 이도 어린이다. 별을 보고 좋아하고 달을 보고 노래하는 것도 어린이요, 눈 온다고 기뻐 날뛰는 이도 어린이다. 산을 좋아하고 바다를 사랑하고 큰 자연의 모든 것을 골고루 좋아하고 진정으로 친애하는 이가 어린이요, 태양과 함께 춤추며 사는 이가 어린이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기쁨이요, 모든 것이 사랑이요, 또 모든 것이 친한 동무다. 자비와 평등과 박애와 환희와 행복과 이 세상 모든 아름다운 것만 한없이 많이 가지고 사는 이가 어린이다. 어린이의 살림 그것 고대로가 하늘의 뜻이다. 우리에게 주는 하늘의 계시(啓示)이다. 어린이의 살림에 친근할 수 있는 사람, 어린이 살림을 자주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 ― 배울 수 있는 사람은 그만큼 행복을 얻을 것이다. 어린이와 마주 대하고는 우리는 찡그리는 얼굴, 성낸 얼굴, 슬픈 얼굴을 못 짓게 된다. 아무리 성질 곱지 못한 사람일지라도 어린이와 얼굴을 마주하고는 험상한 얼굴을 못 가질 것이다. 어린이와 마주 앉을 때 적어도 그 잠깐 동안은 ― 모르는 중에 마음의 세례(洗禮)를 받고 평상시에 가져 보지 못하는 미소를 띤 부드러운 좋은 얼굴을 갖게 된다. 잠깐 동안일망정 그 동안 순화되고 깨끗해진다. 어떻게든지 우리는 그 동안 순화되는 동안을 자주 가지고 싶다. 하루라도 3천 가지 마음 지저분한 세상에서 우리의 맑고도 착하던 마음을 얼마나 쉽게 굽어 가려고 하느냐? 그러나 때로는 방울을 흔들면서 참됨이 있으라고 일깨워 주고 지시해 주는 어린이의 소리와 행동은 우리에게 큰 구제의 길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피곤한 몸으로 일에 절망하고 늘어진 때에 어둠에 빛나는 광명의 빛깔이 우리 가슴에 한 줄기 빛을 던지고 새로운 원기와 위안을 주는 것도 어린이만이 가진 존귀한 힘이다. 어린이는 슬픔을 모른다. 그리고 음울한 것을 싫어한다. 어느 때 보아도 유쾌하고 마음 편하게 논다. 아무델 건드려도 한없이 가진 기쁨과 행복이 쏟아져 나온다. 기쁨으로 살고 기쁨으로 커간다. 뻗어나가는 힘! 그것이 어린이다. 인류의 진화와 향상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어린이에게서 기쁨을 빼앗고 어린이 얼굴에다 슬픈 빛을 지어 주는 사람이 있다 하면 그보다 더 불행한 사람은 없을 것이요, 그보다 더 큰 죄인은 없을 것이다. 어린이의 기쁨을 상해 주어서는 못쓴다. 그리할 권리도 없고 그리할 자격도 없건마는…… 무지한 사람들이 어떻게 많이 어린이들의 얼굴에 슬픈 빛을 지어 주었느냐. 어린이들의 기쁨을 찾아 주어야 한다. 어린이들의 기쁨을 찾아 주어야 한다. 어린이는 아래 세 가지 세상에서 온통 것을 미화시킨다. 이야기 세상-노래의 세상-그림의 세상 어린이 나라에 세 가지 예술이 있다. 어린이들은 아무리 엄격한 현실이라도 그것을 이야기로 본다. 그래서 평범한 일도 어린이의 세상에서는 그것이 예술화하여 찬란한 미와 흥미를 더하여 가지고 어린이 머리 속에 전개된다. 그래 항상 이 세상 모든 것을 아름답게 본다. 어린이들은 또 실제에서 경험하지 못한 일을 이야기 세상에서 훌륭히 경험한다. 어머니와 할머니 무릎에 앉아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을 때 그는 아주 이야기에 동화(同化)해 버려서 이야기 세상 속에 들어가서 이야기에 따라 왕자도 되고, 고아도 되고, 또 나비도 되고 새도 된다. 그렇게 해서 어린이들은 자기가 가진 행복을 더 늘려 가는 것이다. 어린이는 모두 시인이다. 본 것 느낀 것을 그대로 노래하는 시인이다. 고운 마음을 가지고 어여쁜 눈을 가지고 아름답게 보고 느낀 그것이 아름다운 말로 굴러 나올 때, 나오는 모두가 시가 되고 노래가 된다. 여름날 성한 나무숲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보고 바람의 어머니가 아들을 보내어 나무를 흔든다고 보는 것도 그대로 시요, 오색의 찬란한 무지개를 보고 하느님 따님이 오르내리는 다리라고 하는 것도 그대로 시다. 개인 밤 밝은 달의 검은 점을 보고는 저기저기 저 달 속에 계수나무 박혔으니 금도끼로 찍어내고 옥도끼로 다듬어서 초가삼간 집을 짓고 천년만년 살고지고 고운 노래를 높이어 이렇게 노래 부른다. 밝디 밝은 달님 속에 계수나무를 금도끼 은도끼로 찍어내고 다듬어서 초가삼간 집을 짓자는 생각이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이러한 고운 노래를 기꺼운 마음으로 소리 높여 부를 때, 그들의 고운 넋이 얼마나 아름답게 우쭐우쭐 자라갈 것이랴 ? 위의 두 가지 노래는 어린이 자신의 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고 큰 사람이 지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하나 몇 해 몇 십 년 동안 어린이들의 나라에서 불러 내려서 어린이의 것이 되어 내려온 거기에 그 노래에 스며진 어린이의 생각, 어린이의 살림, 어린이의 넋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어린이는 그림을 좋아한다. 그리고 또 그리기를 좋아한다. 조금도 기교가 없는 순진한 예술을 낳는다. 어른의 상투를 재미있게 보았을 때 어린이는 몸뚱이보다 큰 상투를 그려 놓는다. 얼마나 솔직한 표현이냐. 얼마나 순진한 예술이냐. 지나간 해 여름이다. 서울 천도교당에서 여섯 살 된 어린이에게 이 집 교당(내부 전체를 가리키면서)을 그려 보라 한 일이 있었다. 어린이는 서슴지 않고 종이와 붓을 받아들더니 거침없이 네모 번듯한 사각 하나를 큼직하게 그려서 나에게 내밀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이냐? 그 어린 동무가 그 큰 집에 들어앉아서 그 집을 보기는 크고 네모 번듯한 넓은 집이라고밖에 더 달리 복잡하게 보지 아니한 것이었다. 얼마나 순진스럽고 솔직한 표현이냐 ? 거기에 아직 더럽혀지지 아니한 이윽고는 큰 예술을 낳아 놓을 무서운 참된 힘이 숨어 있다고 나는 믿는다. 한 포기 풀을 그릴 때 어린 예술가는 연필을 쥐고 거리낌없이 쭉쭉 풀 줄기를 그린다. 그러나 그 한 번에 쭉 내어그은 그 선이 얼마나 복잡하고 묘하게 자상한 설명을 주는지 모른다. 위대한 예술을 품고 있는 어린이여! 어떻게도 이렇게 자유로운 행복만을 갖추어 가졌느냐? 어린이는 복되다. 어린이는 복되다. 한이 없는 복을 가진 어린이를 찬미하는 동시에 나는 어린이 나라에 가깝게 있을 수 있는 것을 얼마든지 감사한다.
......학창시절 교과서에도 실려 있었던 소파 방정환 선생님의 수필 <어린이 예찬>을 찾아서 옮겨 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읽고 문득 이 글이 다시 읽고 싶어졌어요. 어린이들과 늘 함께할 수 있어 행복한 날들입니다. 지금은 아이들을 키우니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대부분이나 나이가 더 들고 할머니가 되어서도 그랬음 좋겠습니다. 여유롭게 어린이와 예수님에 대해 생각하며 시작하는 이 아침이 또 축복입니다. 모두 주님 안에 축복이 가득하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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