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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四末![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작성자박명옥 쪽지 캡슐 작성일2011-03-02 조회수534 추천수5 반대(0) 신고
                                                          
 
 
 
 
 

            배티 성지 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찬미예수님

본당 교우 여러분들, 또 순례오신 순례자 여러분들...

오늘 하루 동안 또 이 미사 중에 말씀과 성체로 축복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삶과 죽음입니다.

이 세상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냉정하게 본다면 저 세상 삶에 비하면  참으로 티끌보다도 작은.... 그리고 짧은 순간입니다.

바다에 빗방울이 떨어질 때 얼마나 적겠습니까?

영원한 세상에 비하면 이 세상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짧은데, 문제는 그 짧은 삶에 그토록 신경을 쓰면서 영원한 세상에는 우리들이 얼마나 신경을 쓰면서 살아가는가!

우리는 이 세상을 잘 살기 위해서 시간도 투자하고 돈도 투자하고 자기가 얻으려고 하는 것에 최선을 다해서 삽니다.


이 세상에 쏟은 정성의 1/100, 1/1000분의 일이라도 영원한 세상을 위해서 우리들이 신경을 쓰고 산다면 지옥에 갈 자가 누가 있으며 연옥에 떨어질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비극에 보면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하고 어느 극작가가 외쳤습니다.

죽음에 대해서는 아예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또 죽은 다음의 세상에 대해서 아예 신경을 쓰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죽음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기 때문에 늘 피해갑니다.


오늘 성서를 보면 우리식으로 따지면 이해가 안 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형이 아이 없이 죽었는데 둘째, 셋째, 넷째, 다섯째, 여섯째 일곱째 동생이 형수를 차례차례 마누라로 맞이해서 살다가 죽었다 이겁니다.

이건 개 족보입니다.

그런데 유대나라에서는 그게 가능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자식을 내야 되는 것이 장손의 의무이기 때문에 형이 아이 없이 죽으면 그 다음 동생이 형수를 취해서 그 집안에 아이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일곱 남자와 살았는데도 아이가 없으면 분명히 여자 쪽에 문제가 있는 겁니다.

거기다가 포커스를 맞추자는 것이 아니라 사두가이파(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가

부활을 믿지 않기 때문에..... 어쨌든 일곱사람이 한 여자를 데리고 살았다 이거죠?

당신 부활 있다고 믿나 본데 그럼 부활한 뒤에는 그 여편네는 누구 아내가 될 것이냐?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부활한 후에는 시집가는 일도 없고 장가가는 일도 없다!>

이런 말씀으로 명쾌하게 부활한 모습에 대해서 설명해 주십니다.


부활한 후에는 시집가는 일도, 장가가는 일도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떤 자매님은

“ 신부님, 아~~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신부님도 아시다시피 지금 내 남편, 그건 남편이 아니라 평생 웬수입니다. 죽고 난 다음에마저도 그 인간이 쫓아다닌다면 아, 어떻게 살겠습니까만.... 오늘 성서 말씀을 들으니 죽은 다음에는 영의 존재라고 하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하는 자매님들도 있었습니다.

또 금슬이 너무 좋은 어느 형제는 아내를 먼저 보내고 난 다음에 이 성서구절을 읽고 나서 너무너무 슬픈 얼굴로

“신부님, 정말 서운합니다. 저도 언젠가 죽으면 아내와 다시 부부가 될 줄 알았는데 죽고 난 다음에는 시집가는 일도 없고 장가가는 일도 없다고 하니 너무너무 슬픕니다.

이렇게 얘기 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본당 신부는 이 성서 구절을 들으면

‘아, 정말 억울하다! 한평생 성가정을 이루는 방법에 대하여 피정지도를 하고 다녔는데 죽어서 내가 장가를 가면 내가 가르친 것을 실습하고 싶었는데 다 틀려버렸구나!’

이렇게 쓸 데 없이 부질없는 생각을 합니다.


분명 부활한 후에는 육체가 없이 영의 상태인데, 이성이 뭐가 그립고, 무슨 성욕이 생길 것이요... 다 부질없는 생각입니다.

그야말로 부활한 후에는 사람에 대한 사랑보다는 오직 애덕!

신덕(信德), 망덕(望德)은 없어지고 애덕(愛德)만 남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순수한 사랑만이 남기 때문에

시집가고 싶은 생각도 없고 장가가고 싶은 생각도 없다! 그겁니다.


이 세상 살 때, 우리는 향주삼덕을 가지고 삽니다.

신덕, 망덕, 애덕

죽은 뒤에는 신, 망은 없어지고 오로지 애덕만이.... 하느님께 대한 뜨거운 사랑만 남아서 영원히 하느님과 같이 머물게 될 것이 아니겠는가!


위령성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위령성월은 사말(四末)에 대해 묵상하는 시기입니다.

사말이 뭡니까?

아시는 분 계십니까?

뭡니까? 

알면서도 신부님이 정말 아나? 확인해 보려고 얘기 안 하시는 거죠? ^^


위령성월은 사말에 대해서 묵상하는 시기라고 하는데 뭐가 사말이냐?

첫 번째, 죽음입니다.

누구나 한 번은 죽어야 된다고 하는 죽음에 대한 문제입니다.

네 가지의 마지막에 부딪히는 문제가 사말입니다.

두 번째는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세 번째는 천국, 네 번째가 지옥입니다.

이걸 사말이라고 그럽니다.

죽음과 심판과 천국과 지옥에 대한 묵상을 하는 것,

이 사말에 대한 묵상시기가 위령성월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마지막 이 네 가지 문제에 부딪힙니다.

어느 위치에 살더라도 죽음을 겪게 되고, 심판을 받게 되고, 천국이나 지옥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이런 가을이 되면 괜히 센티해지고, 우울해지고, 삶에 대하여, 죽음에 대하여 저절로 생각하게 됩니다.

사람이 죽으면 다시 살 수 있을까!

부활이라는 게 뭘까!

부활은 예전에 육신의 부활에 대해서 생각하지만 지금 교리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사람이 땅에 묻히면 이 몸뚱아리는 다 분해가 됩니다.

물론 공중에는 떠다니겠지만 나중에 부활 때가 되면 공중에 떠다니던 모든 내 조직이 그냥 조립하듯이 착착착..... 만들어져서 옛날에 내 모습으로 만들어지느냐!

그건 아닐 겁니다.

부활은 상태입니다.

어떤 상태로 만들어집니다.


내 곁을 떠난 사랑하던 사람이 지금 어디에 가 있을까!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동양에서는 황천 간다고 그랬고, 고대 이집트에서는 배를 타고 저 나라로 간다고 합니다.

희랍인들은 시체의 입에다 돈을 한 닢 넣어주면서 노잣돈으로 쓰라고 그랬습니다.

이렇게 세상에 많은 종교들은 내세에 대한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막연한 희망은 뭐냐!

고통과 괴로움이 없는 곳임은 분명합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예비자 교리 때부터 부활신앙을 가장 중요한 교리로 배웠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부활신앙을 믿지 않고 있다고 하는 통계가 나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왔던 사두가이파처럼 부활을 믿지 않고

‘지금 여기서 잘 살면 된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에만 관심을 두는 사람이 많습니다.

기복종교입니다.


사두가이파들은 그래서 원수의 나라인 로마에 아부하면서까지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이 세상을 잘 살기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았던 족속들이 바로 사두가이파, 기회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이런 그들이 볼 때, 부활에 대해 가르치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가소로웠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는 말은 말도 안 되는 말이었습니다.

부자가 행복하지....어떻게 밥 한 끼도 못 먹는 인간들이 행복하다는 말인가!

따라서 이렇게 황당한 이야기를 만들어서 예수님을 조롱하면서

‘부활은 허무맹랑한 것이니 웃기지 말라!’

이렇게 오늘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한 여자가 일곱 형제의 부인이 되었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꾸며낸 겁니다.


여러분들, 내세가 없고 심판이 없고 부활이 없다면....

세상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제 멋대로 설쳐대면서 사는 사람들이 축복받은 사람들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 엉망진창으로 남의 눈에 피눈물 나게 하면서 그렇게 산 사람들이 이 짧은 세상, 호의호식하며 살지는 몰라도 하늘나라에서는 절대로 그렇게 그 자리에 있지 못할 것입니다.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것도 부활이 있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요.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올라가는 것도 부활이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오늘 1독서에 일곱 형제 이야기가 나옵니다.

희랍사람들한테 잡혀서 하느님을 배반하라고 돼지고기를 억지로 입에다가 집어넣습니다.

일곱 형제들이 먹었습니까? 안 먹었습니까?

안 먹었습니다.

이해가 안 갑니다. 그 맛있는 삼겹살을 왜 안 먹는지...

저는 주면 언제나 먹습니다.^^

아무튼 지금도 유대인들은 돼지고기를 안 먹습니다.

그게 그 사람들의 법입니다.


희랍인들은 유대인들을 조롱하기 위해서 돼지고기를 억지로 입을 벌려서 먹였습니다.

그러나 신실한 이 일곱 형제들은 희랍사람들과 맞서서 혀가 뽑히고, 손이 잘리면서까지도 율법에 어긋나는 것을 안 했던 것은 부활에 대한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1독서에 나오는 넷째 동생은

“니들이 나를 쳐 죽인다고 할지라도 나는 부활할 것이지만, 너희들은 부활하지 못 할 것이다... 죽여라!”

우리 가톨릭교회의 유명한 로렌조 성인을 순교할 때는 석쇠에 그 성인을 얹어 놓고 펄펄 끓는 불에다가 마치 생선 한 마리 굽듯이 성인의 몸을 앞으로 뒤로 구우면서 죽였습니다.

뒤가 지글지글 타니까

“이놈아, 너 이래도 하느님을 배반하지 않느냐!”

“뒤가 다 익었으니 앞으로 돌려주십시오!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뭐라 그랬느냐!

“너희가 내 몸을 구울 수는 있어도 부활에 대한 내 마음은 못 태운다. 주님 제 영혼을 받아주십시오.

이렇게 석쇠에서 타죽은 성인이 로렌조 성인이십니다.


교우 여러분,

부활은 죽으면 되는 거지만 우리는 살아서도 하루에 수십번씩 부활을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부활은 죽어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이 미사를 드리면서 나에게 상처 준 사람을

“주님, 용서하려고 노력하겠습니다..”

그 말을 봉헌할 때 여러분은 부활하는 겁니다.

나에게 용서 청하는 사람을 따뜻하게 맞아주면 바로 그 사람을 부활시켜 주는 겁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  분노 때문에 과거의 상처 때문에.....

누군가가 용서 청하러 올 때, 아예 문을 닫아걸고 만나주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내가 니놈 용서하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용서 청하러 온 사람을 거부합니다.

용서하십시오!

그러면 그 사람을 부활시켜 주는 겁니다.

걱정거리가 늘 나를 힘들게 하지만 하루하루 기도하면서 어둠 쪽을 보지 않고, 주님이 나에게 주시는 축복을 생각하면서 희망과 기쁨을 가지고 사는 것이 부활하는 겁니다.

매일매일 내 입을 다스리면서 침묵가운데 분별을 청하는 것이 부활하는 겁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말씀과 성체로서 우리를 부활시켜주시러 오십니다.

예수님께  감사드리면서 정성되이 미사를 봉헌합시다 아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카페에서

 

                    
                    
  
 
           

             

                             

                                                            I Love You More and More Every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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