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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연중 제9주일 2011년3월6일).
작성자강점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1-03-06 조회수373 추천수3 반대(0) 신고

연중 제9주일 2011년 3월 6일


마태 7, 21-27.


오늘 우리는 복음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여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복음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고도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이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신앙인이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유대교는 하느님에 대한 모세의 깨달음으로 시작하였습니다. 모세는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탈출 3, 12 참조),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계신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장소는 우리의 실천입니다. 구약성서의 탈출기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모세가 기도 중에 하느님께 “당신의 영광을 보여 주십시오.”하고 청하였습니다. 하느님은 답하십니다. “내 모든 선한 모습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며, 야훼라는 이름을 너에게 선포하리라. 나는 돌보고 싶은 자는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고 싶은 자는 가엾이 여긴다.”(33, 19). 이웃을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인간의 선한 실천들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확인하라는 말입니다. 야훼라는 이름도 함께 ‘계시다’는 동사에서 나온 것입니다. 인간이 직접 하느님의 모습을 볼 수는 없고,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한 인간의 실천들 안에서 하느님을 알아보라는 말입니다. 원초의 이 체험을 중심으로 십계명과 율법이 나타나고, 사제의 직분 및 유대교의 제도들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흐르면서, 사제들은 제물 바칠 것을 요구하고, 율사들은 율법 지킬 것을 강요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바치고 지키는 일에 시선을 빼앗긴 이스라엘은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한’ 사람들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잊어버렸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인식이 이렇게 왜곡된 것입니다. 그러자 예언자들이 나타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무엇하러 이 많은 제물을 나에게 바치느냐?...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말아라.....착한 길을 익히고 바른 삶을 찾아라. 억눌린 자를 풀어 주고, 고아의 인권을 찾아 주며,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1, 11.17). 제물을 바칠 것이 아니라, 억눌린 사람과 노동력이 없어, 스스로 살아가지 못하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한 실천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아모스 예언자도 하느님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의 순례절이 싫어 나는 얼굴을 돌린다....너희가 바치는....제물이 나는 조금도 달갑지 않다....다만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서로 위로하는 마음 개울같이 넘쳐흐르게 하여라.”(5, 21-22.24). 여기서 정의는 하느님이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분이라, 우리도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실천을 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 실천을 강물과 같이 도도히 또 개울과 같이 곳곳에 흐르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하느님을 잊어버렸을 때, 나타난 예언자들입니다. 그들은 선하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여 하느님이 이스라엘 안에 살아 계시게 하자고 외쳤습니다. 예수님이 활동을 시작하셨을 때, 일부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도 예언자의 한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복음서들은 군중이 예수를 예언자로 생각하였다고 여러 곳에서 언급합니다. 복음서들에 따르면, 예수님도 모세와 예언자들을 여러 번 언급하셨습니다. 루가복음서가 전하는 부자와 라자로의 예화에서에서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도 듣지 않는다면 죽은 이 가운데서 누가 살아나더라도 믿지 않을 것이다.”(16, 31)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도, 그분은 “모세와 모든 예언자들의 기록에서부터 시작하여 성서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이야기를 설명해 주셨다.”(루가 24, 27)고 복음서는 말합니다.


모세와 예언자들의 가르침은 예수님에게 이렇게 중요하였습니다. 안식일 법 자체를 예수님은 절대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생겼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생기지 않았다.”(마르 2,27).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말씀들과 행동은 그 시대 유대인들에게는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의 것으로 보였습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이 안식일 법을 범하면서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지키고 바칠 것을 요구하는 율법이 은폐해버린 하느님을 사람들에게 다시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율법으로 가려져버린 하늘에 구멍을 뚫어서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하신 하느님을 보여 주려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하느님이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분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사용된 호칭입니다. 그 시대 아버지라는 호칭에는 어머니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녀들을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아버지와 어머니 같은 하느님이라는 말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이 하시는 일, 곧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한 실천을 함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그대들을 사랑했습니다. 내 사랑 안에 머무시오...내가 그대들을 사랑한 것처럼, 그대들도 서로 사랑하시오...내가 명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서로 사랑하시오.”(15, 9.12.17). 예수님을 배우고 따르는 신앙인이라면, ‘돌보아 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한 실천으로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바울로 사도는 고린토 사람들에게 이 사랑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여 설명하십니다. “사랑은 너그럽고,...허세를 부리지 않고,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으며,...분통을 터뜨리지 않습니다.”(1고린 13, 4-5). 그리스도 신앙인은 이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너그럽고, 허세를 부리지 않으며, 무례하지 않고, 분통을 터뜨리지도 않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정의를 실현한다는 구실로 사람을 비난하거나 폭로하며, 고발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행위들은 예수님이 남기신 유일한 계명, 곧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의를 실현하겠다면서 남을 비난하고 성토하는 행위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 저속한 우리의 뜻을 이루려는 야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비하신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치셨습니다.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여러분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시오.”(루가 6, 35).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여, 우리 삶의 현장에 하느님이 살아계시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웃을 위한 우리의 사랑과 자비와 섬김이 있어서 열리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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