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 7일 성녀 페르페투아와 성녀 펠리치타 순교자 기념일
‘This is the heir. Come, let us kill him,
and the inheritance will be ours.’
(Mk.12.7)
제1독서 토빗 1,3; 2,1ㄴ-8
복음 마르코 12,1-12
어제 아침 이른 시간에 자전거를 타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겨울 내내 춥다고, 땅이 미끄럽다고 자전거를 타지 못했거든요. 아직 쌀쌀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기분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타고 있는 자전거 도로에 단 한 대의 다른 자전거를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저 혼자서만 잘 꾸며진 자전거 도로를 차지하고 있었지요. 아마도 너무 이른 시간이었는지 또 추워서인지 자전거 타는 사람을 단 한 명도 만날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전날 늦게까지 술자리가 있었기에 아침 운동 하러 나가는데 얼마나 갈등을 했는지 모릅니다. 어둡기도 하고, 춥기도 하고, 또 전날의 숙취로 머리도 아프고……. 하지만 힘들어하는 몸을 이끌고 밖으로 억지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저는 혼자 자전거 도로를 다 쓰는 등 너무나도 좋은 시간을 가질 수가 있었지요.
만약 어둡다고, 춥다고, 머리 아프다고 운동하는 것을 포기했다면 그렇게 좋은 시간을 가질 수가 있었을까요? 분명 운동을 나서기 전에는 밖으로 나간다는 것이 큰 고통처럼 생각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을 넘어섰을 때, 오히려 잘 했다는 생각을 그래서 더 큰 행복을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아마 우리의 삶 안에서 이러한 체험은 누구나 할 것 같습니다. 내게 닥치는 고통과 시련에 대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주님께 불평과 불만을 할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우리의 눈에만 고통과 시련이라는 모양으로 보였을 뿐이지, 결국 주님께서 가장 좋은 길로 이끄셨음을 후에야 깨닫게 됩니다. 실제로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꿋꿋하게 주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사람은 가장 커다란 행복이라는 선물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말씀을 건네주십니다. 주인이 종을 보내어 포도밭 소출의 얼마를 받아오도록 시켰지만, 소작인들은 소출을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보낸 종을 매질하고 더러는 죽이기까지 합니다. 주인은 ‘무슨 오해가 있어서 그랬겠지.’라는 생각을 하고서는 사랑하는 아들을 보냅니다. 하지만 소작인들은 ‘저자가 상속자다. 저자를 죽여 버리자. 그러면 이 상속 재산이 우리 차지가 될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아들을 죽이고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립니다. 이렇게 배은망덕한 사람들이 어디 있을까요?
그러나 이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었습니다. 이 땅에 우리들을 보내어 열심히 살라고 하신 주님이지만, 우리들은 항상 주님께 불평불만만 던질 뿐입니다. 잘된 일은 내가 잘했기 때문이고, 안 된 일은 주님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우리들의 이기적인 마음이 앞선 못된 소작인들과 무엇이 다를까요? 또한 주님 뜻과는 정반대로 살아가는 우리의 죄 많음 역시 앞선 소작인들과 너무나 많이 닮았습니다.
철저히 주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사람만이 큰 행복이라는 선물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래서 많은 성인 성녀들이 주님 뜻에 맞게 살아가는 것을 가장 큰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살았던 성인 성녀들은 주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우리도 이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 하지 않을까요?
인간이 아름다운 이유는 슬퍼도, 상처받아도 서로를 위로하고 사랑하며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추구할 줄 알기 때문이다(장영희).
바위도 칭찬하라(‘좋은생각’ 중에서)
다산 정약용이 시골에 내려와 지낼 때다. 친지들과 정자에 모여 술잔을 기울이는데 술이 거나하게 취한 어떤 사람이 “누구는 부끄러운 줄 모르고 권세와 명예를 거머쥐었으니 분통 터질 일이야.” 하며 한탄했다. 그러자 다산은 벌떡 일어나 “사람은 품평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벌주를 드려야겠네.” 하고 상대에게 술을 권했다.
얼마 지나자 어떤 이가 묶어 둔 말을 보며 “저 말은 짐도 지지 못하면서 꼴만 축내는구나.” 하고 혀를 찼다. 다산은 또 일어서서 “말도 사람 말을 알아듣는 법일세.”하며 그에게 벌주를 주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이 정자에서는 놀기가 참 힘드네. 입을 꿰매야겠어.”하고 핀잔을 줬다. 다산은 웃으며 말했다. “하루 종일 품평해도 화낼 줄 모르는 것이 있네. 저 소나무 아래 바위를 보구려. 바위가 없었더라면 이 멋스러움은 아마 없었을 것이오. 그래도 이곳에서 입을 묶어 둘 필요가 있소?” 이에 한 사람이 “화낼 줄 모르기 때문에 바위에 대해서는 자유롭게 품평할 수 있다는 말인가?”하고 묻자, 다산은 “나는 바위에게 칭찬만 했지. 모욕을 준 적은 없소.”라는 말로 참된 품평은 칭찬에 있음을 강조했다.
그 후 이 정자는 ‘바위마저도 칭찬해야 한다.’라는 의미의 ‘품석정(品石亭)’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다산은 자신의 일기에서 이를 소개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남을 품평하는 것은 참으로 쓸모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남을 평가하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하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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