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주년이란? 가. 전례와 시간 그리스도의 육화로 ‘시간’ (tempus)은 더 이상 단순히 우주적이고 역사적인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시간은 낮과 밤, 주간, 한 해의 달과 계절의 단순한 연속이 아니다 (kronos). 시간은 전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신비의 구원적인 현존과 권능의 경험을 하는 뛰어난 순간으로 변했다 (kairos). 왜냐하면 전례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원활동을 직접 체험하기 때문이다. 곧, “교회의 전례 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무엇보다도 당신의 파스카 신비를 나타내시고 실현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지상 생활 동안 가르침을 통해 파스카 신비를 알려 주시고, 이를 행동으로 예고하셨다. 당신의 때가 이르자 예수님께서는 지나가 버리지 않는 유일무이한 역사적 사건을 겪으신다. 예수님께서는 ‘단 한 번’ (로마 6,10; 히브 7,27; 9,12) 돌아가시고 묻히시고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어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신다. 이는 우리의 역사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이면서도 유일무이한 사건이다. 다른 모든 역사상의 사건들은 한 번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과거에 묻혀 버린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는 과거 안에만 머물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죽음을 통해 죽음을 물리치셨으며, 그리스도의 모든 것, 곧 모든 인간을 위하여 그분이 행하고 겪으신 모든 것들이 하느님의 영원성에 참여하고, 그럼으로써 그리스도께서 모든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시대에 현존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십자가와 부활 사건은 영속하는 것이며, 모든 것을 생명으로 이끌고 있다” (가톨릭 교리서 1085). “그리스도의 시간”, 곧 메시아적이고 사제적인 당신의 활동으로 이루어진 시간은 “교회의 시간”에,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시간”에 통합된 전례적 시간에 기원을 주었다. 그렇다, 전례를 거행할 때 우리는 “교회의 시간”의 여기 지금 (hic et nunc) 그리스도의 구원의 현존과 힘을 경험하는 단계에 있기 때문이다. 전례가 장엄하게 Hodie, “오늘”을 선포할 때 전례가 종종 이것을 언급한다. 따라서 전례적 시간은 교회가 기도와 매일의 거행들에 의무를 다할 때 “교회의 시간”에 확장되는 “그리스도의 시간”이다. “그리스도의 시간”이 당신의 메시아적이고 사제적 활동에 일치하는 순간부터, “교회의 시간”은 그분의 백성을 위한 그리스도의 계속적인 돌봄을 표현한다. 매일의 기도와 전례적 축제들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맡기신 사명과 분리될 수 없다. 곧 교회적 형식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만이 아니라 설교, 치유와 해방의 활동도 표현한다. 그러나 전례적 시간은 교회를 역사적인 시간에서 분리시키지 않는다. 이보다는 전례적 시간은 육화하신 말씀을 본받으면서 교회가 역사적 과정에 참여하게 하고 인간적 가련함의 크로노스 (kronos)를 하느님 은총의 카이로스 (kairos)로 변모하도록 부추긴다. 전례적 시간을 말할 때 원칙적으로 시간전례와 전례적 날들과 주년의 축제들과 시기를 언급한다. 어째든, 한 가지 중요한 전제를 고려하는 것이 필요하다. 곧 성찬례, 성사들과 준성사들은 시간과 공간에서 거행되고, 시간전례와 전례주년은 항상 성찬례와 성사들에 연관하여 거행된다. 나. 전례주년 전례와 시간이 결합된 한 형태가 전례주년이다. 전례헌장(SC) 102에 따르면, “거룩한 어머니인 교회는 한 해의 흐름을 통하여 지정된 날들에 하느님이신 자기 신랑의 구원 활동을 거룩한 기억으로 경축하는 것을 자기 임무라고 여긴다.” 성무일도가 하루의 시간들에 관하여 언급하는 것에 반하여, 전례주년은 한해의 요일, 주간과 시기를 바라본다. 다음의 사실을 주의하는 것이 유익하다. 곧 전례주년이 단지 전례 축제들의 전체적인 총합도, 단순히 한 해의 흐름에 축제들의 기능적인 배분도 아니라, “그리스도의 시간”을 “교회의 시간” 속에 확장하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육화를 통하여 우주적이고 역사적인 시간에 합치되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의 주기와 계절로 일정하게 움직이는 우주적 시간과, 그 안에 우리가 기념하는 사건들이 자리하는 역사적 시간이 하느님의 구원 행위의 자리 (locus)가 된다. 그리스 사람들이 크로노스 (kronos)라 하는 낮과 밤, 주간과 달, 그리고 한 해의 다양한 계절의 연속이 그리스도인들의 카이로스 (kairos)가 된다. 하느님께서 준비되셨을 때, 하느님께서 우리의 시간, 우리의 우주적 시간, 우리의 역사적 시간 안으로 들어오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하느님의 구속 행위가 시간 안에 이루어졌다. 이 행위가 목록화되거나 기록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는 주어진 해에, 주어진 달에, 주어진 주간에, 또는 주어진 날이나 밤에, 주어진 시각 등 시간의 과정 안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자, 모든 해는 Anno Domini (주님의 해: AD)이기 때문이다. 파스카 성야미사 가운데 빛의 예식에서 주례 사제는 초를 들고 십자 표시, 그리스 문자 알파 (A)와 오메가 (Ω), 그리고 현재 연도를 쓰면서 명확히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어제도 오늘도, 시작이요 마침이요, 알파요 오메가이시며, 시대도 세기도 주님의 것이옵니다.” 이 선포는 그리스도인들이 시간을 이해하기 위한 매개가 그리스도이시다는 신앙의 고백이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이 우주적이고 역사적인 시간에 기록되었다. 교회의 전승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이 히브리 백성이 역사적인 탈출을 기념하는 파스카를 거행하는 주간 동안 이루어졌다고 보았다. 더 나아가, 춘분과 보름으로 우주적 시간과 부합하여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안다. 공관복음서는 금요일 오후 세 시쯤 돌아가셨다고 첨가한다. 요약하면, 역사와 우주가 파스카 신비의 그리스도를 거행하는데 토대를 함께 마련했다는 것이다. SC 102에서 전례주년의 본질적 요소를 요약한다. “주간마다 주일이라고 불린 날에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고, 또 일년에 한 번 주님의 복된 수난과 함께 이 부활 축제를 가장 장엄하게 지낸다. 한 해를 주기로 하여, 강생과 성탄에서부터 승천, 성령강림 날까지, 또 복된 희망을 품고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까지 그리스도의 신비 전체를 펼친다. 이것에 전례헌장의 다른 항들을 첨가해야 한다. 곧 마리아, 성인들, 그리고 전례주년의 시기들에 대한 연례 거행들이 그것이다. 평일과 축일과 전례 시기의 거행들은 “그리스도의 시간”을 현존하게 하고 우리 시대의 백성에게 베풀도록 한다. SC 102에서 분명히 밝힌 것처럼, “구속의 신비들을 기억하며, 자기 주님의 풍요로운 힘과 공로가 모든 시기에 어떻게든 현존하도록 그 보고를 신자들에게 열어, 신자들이 거기에 다가가 구원의 은총으로 충만해지도록 한다.” 한편, 전례주년은 한 해에 걸쳐 하느님의 구원 신비를 여러 가지 주제로 거행하고 되새기는 것이다. 그렇지만 전례주년을 중심으로 매년 구원 신비를 거행하는 것은 하나의 되풀이가 아니라 완성을 향해 올라가는 운동 또는 움직임이다. 이렇게 교회가 여러 구원신비를 경축하기 위하여 한해를 나누었듯이, 우리 그리스도인 삶은 하느님의 구원신비를 끊임없이 경축하는 삶이고 이 신비를 중단 없이 더 깊게 되새김질하는 삶이다. 더 나아가 전례주년을 지내면서 궁극적으로 오실 주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인 끌레멘스 신부,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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