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령성월 기획 II] ‘오늘은 나, 내일은 너’(HODIE MIHI CRAS TIBI) - 그리스도인의 죽음
죽음, 구원 가능성 열린 ‘희망의 사건’ “기억하소서. 제 인생이 얼마나 덧없는지를 당신께서 모든 사람을 얼마나 헛되이 창조하셨는지를. 누가 영원히 살아 죽음을 아니 보겠습니까? 누가 저승의 손에서 자기 영혼을 빼내겠습니까? 셀라”(시편 89,48-49). ‘죽는다’는 것에 대한 일반적인 의미는 ‘죽음으로써 육체의 삶이 끝난다’고 통속적으로 죽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죽음 이해는, 동물들과 같이 원소로 구성된 인간은 원소로 환원되고 의식이나 정신 작용은 물질의 부수적인 현상에 불과하여 육체의 분해와 함께 스스로 사라지고 마는 것으로 보는 것”으로 설명한다. 유물론자와 무신론자들은 ‘단지 생명이 사라져 가는 과정’으로 죽음을 받아들이며, 반면 범신론자, 윤회론자, 심령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사람이 죽어도 영혼은 어떤 모양으로든 존재한다는 측면’으로 해석한다. 우리나라에서 ‘돌아가셨다’고 표현하는 죽음의 의미는 저 세상으로 건너감이 아니라 원점으로 돌아가는 환원의 뜻이 크다. 성경에 나타난 죽음 구약에서는 죽음의 기원을 아담의 범죄에서 비롯된 것으로, 또 그 죄의 대가로 이해하고 있으며 죽음은 인간이 생활하던 자리를 떠나 행복도 하느님의 찬미와 찬양도 없는 어두운 곳, 우울한 곳으로 옮겨가는 것으로 드러냈다. 또 때로는 죽음을 하느님 축복으로 여기기도 하는 등 인간이 경험 가능한 사실들을 바탕으로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신앙과 연관시키고 있다. 그런 바탕 안에서 구약은 죽음에 대해 ‘온 세상이 가야할 길’(1열왕 2,2 집회 8,7) 등 모든 사람들이 삶을 살아간 다음에 다가오는 보통의 사건, 즉 보편성으로 짚고 있으며 이와 함께 인간이 죽음과 관련돼 있는 ‘인생의 허무함’을 살아간다고 드러내고 있다. 신약성경에서는 죽음을 죄의 결과로 받아들이며 모든 육체적 요소는 죽음에 이르는 것으로, 또 죽음은 사건인 동시에 상태로서 이 죽음을 종결시킨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며 이는 종말론적인 사건으로 ‘지금’ 시작되지만 완성은 종말의 때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해한다. 신약에서의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결돼 있다. 그리스도 없는 인간의 죽음은 그늘에 잠겨있게 되지만(마태 4,16 루카 1,79),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과 부활을 통해 죽음의 세력을 물리쳤으며(히브 2,14 2디모 1,10), 그의 부활로 인류는 최후의 암흑에서 해방되고 인간은 하느님 안에서 삶의 완성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한 11,25)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죽음은 저주에서 축복으로 변화되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교회 가르침에서의 죽음 전통적 교회 가르침은 죽음을 ‘죽음 후의 부활 심판 지옥 하느님 나라’와 함께 다루면서 “죄의 결과이며, 원죄로 인해 세상에 들어왔다”고 보았다. 즉 “물질적 궁핍, 부당한 억압, 육체적·정신적 질병 또 죽음 등과 같은 다양한 형태의 인간의 비참은 원죄 이후 인간이 놓이게 된 타고난 나약한 처지와 구원의 필요성을 명백히 드러내는 표지”라고 하였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죽음에 관한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재확인하면서 죽음에 관해 보다 깊은 성찰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공의회는 “죽음 앞에서 인간 운명의 수수께끼는 절정에 이를 것”이며, “믿음이 부족하면 죽음의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은 채로 남아 있을 것”, 또 “인간은 언제나 자기 인생의 의미, 자신의 활동과 자신의 죽음 의미를 갈망할 것”이라고 밝혔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교황 즉위 전 학자 입장에서 죽음에 대한 의견을 피력한 바 있다. 즉, “인간은 하느님 사랑과 자비의 손길로 다가가려는 자유로운 행동을 하며 이것이 죽음의 신학을 드러내는 중심의 신비”라는 것이다. 인간의 죽음은 그 자체로 볼 때 자연적이며 인간의 유한성을 드러내는 것이지만, 신앙 안에서 볼 때 이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 희망의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죽음은 좌절이 아니라 희망의 사건이며 구원의 가능성이 열려있는 믿음의 때이다. 학자들은 “죽음은 실존의 거울이며 삶을 완성으로 이끌어 가는 것으로 죽음 안에서 삶의 전체가 궁극적인 것이 된다”고 밝히면서 “삶이 당연히 주어진 어떤 것이 아닌 하느님의 선물임을 체험하는 것이 죽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올바른 태도”라고 역설한다. 위령성월을 보내는 신자들이 깊게 묵상해야할 시사점이 아닐 수 없다. [가톨릭신문, 2011년 11월 13일, 이주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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