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를 살다] 신앙고백 사람들의 대화는 실제로 서로 경청하면 할수록 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말에 더욱 진중하게 귀를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그만큼 더 생동적이고 더 효과적입니다. 한 사람이 말할 때 다른 사람은 귀기울이고 다른 사람이 대답할 때 첫 번 사람은 다시 귀를 기울입니다. 이와 같이 대화는 서로 연결되어 갑니다. 실제로 대화에 있어 서로 경청을 잘못하면 오해와 불신이 야기되고 심지어는 더 깊어집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향해 열린 마음을 가지면 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그 사람의 진심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것은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충분히 가능합니다. 대화의 상대방에 귀를 기울임을 통하여 서로의 생각과 말과 느낌을 알아가고 서로에 대한 이해가 깊어집니다. 우리의 미사 전례도 말을 건네고 응답하는 교류 안에서 거행됩니다. 하느님은 당신 사랑의 말씀을 이 세상에 선포하셨고 또 거듭해서 말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미사 전례 안에서 늘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말씀은 우리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속 깊이 새겨들은 경청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응답을 할 때 우리는 하느님과의 만남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 봉독과 화답송은 서로 밀접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신앙고백이라고 하는 신경은 구약과 신약성경에서 발췌한 독서들과 그 해설로 우리에게 전달되는 하느님 말씀에 대한 우리의 응답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느님 말씀에 마음을 열고 신뢰할 때에 비로소 제대로 응답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못할 경우 우리의 신앙고백은 허공을 치는 빈말뿐입니다. 신앙고백이 처음부터 항상 미사의 구성 요소였던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주일과 대축일에만 말씀의 선포 후에 합니다. 사실 신앙고백은 미사 안에서 손님 역할을 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본 자리는 다른 곳, 즉 세례식에 있기 때문입니다. 긴 신앙고백은 동방교회에서 유래하며 그 핵심 부분은 예루살렘의 초세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세례 예식 때 말하는 신앙고백에까지 소급됩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짧은 사도신경은 서방교회에서 생성, 발전되었고 로마의 초기 그리스도 공동체의 세례 예식에서 유래합니다. 밀라노의 주교였던 암브로시오(339-397) 성인은 파스카 직전 주일에, 세례성사를 받기 위해 준비를 갖춘 세례 후보자들에게 다음의 말로 신앙고백의 의미를 설명해 주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우리 신앙의 모든 진리를 일목요연하게 알아볼 수 있도록, 거룩한 사도들이 함께 모여 그 신앙의 핵심을 정리해 놓았습니다.” 이렇게 완성된 신앙고백을 ‘사도신경’이라고 부릅니다. 이처럼 신앙고백은 그 두 가지의 양식으로 수세기를 통하여 동방과 서방 교회의 영세한 그리스도교 신자들과 오늘의 우리를 연결해 주고 있습니다. 긴 신앙고백은 일치의 염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신앙고백 양식은 그리스도교가 신앙의 분쟁과 분열로 동요되던 시대에 형성되었으며 신앙 역사의 발자취를 담고 있습니다. 초세기에 일어났던 신앙의 큰 분쟁 중에 신앙을 올바로 설명해 주고자 노력한 니체아 공의회(325년)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년)의 교부들은 신앙고백 안에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참된 고백을 삽입하여 보완하였습니다. : “참 하느님에게서 나신 참 하느님으로서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한 본체로서 만물을 창조하셨음을 믿나이다.” 성령의 참 신성에 대한 신앙은 발전되고 심화된 언사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나이다.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영광과 흠숭을 받으시나이다.” 이와 같이 신앙고백은 단번에 불변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교회가 점진적으로 깊이 성장하고 살아 온 신앙의 생생한 표현입니다. 시대를 거쳐 오면서 교회는 새로운 연관성을 발견하고 신앙의 관점을 새롭게 하였습니다. 이는 전체 교회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 모두에게도 해당이 됩니다. 실제로 신앙은 생활하고 성장하면서 결실을 맺어갑니다. 그러므로 신앙고백은 언제나 미래로 연장됩니다. 이러한 뜻에서 합송이나 노래로 하는 신앙고백은 많은 사람들에게 자기들의 다양한 생활 과정 중에 얻는 확증보다는 오히려 희망과 염원의 표현일수 있습니다.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마르 9,24) “주님, 과연 저는 당신을 믿을 수 있을까요? 저의 불신앙을 도와주소서!” 이런 고백도 하느님 말씀에 대한 진정한 대답일 수 있습니다. 말씀의 전례에서 성찬의 전례로 들어서는 문턱에서 우리가 신앙을 고백할 때 역시 여러 가지 사실이 함께 표현됩니다. 신앙고백은 공동체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함께하고 있음을 증거하며 하느님 말씀에 대한 신앙의 응답입니다. 이 신앙고백은 천 수백 년을 거쳐 오면서 동서방 교회 안에서 세례 받은 이들과 우리를 연결시켜 주는 생생한 세례 갱신의 한 부분입니다. 신앙고백은 결국 의심하면서도 찾고 있는 자에게 기쁜 희망의 표현입니다. 인간 이성이 오직 세계 내적 실재와 규범만을 인정하는 시대, 그리스도의 구원 행위와 가르침이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는 이 시대에 신앙고백은 신앙의 내용과 신앙인의 마음을 새롭게 다지게 합니다. 신앙인 각자는 신앙고백을 할 때 자신이 지난날과 오늘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신앙의 증거자들과 순교자들의 대열에 서 있다는 것을 의식해야 합니다. 그러한 자의식은 자신의 신앙을 지키고 또 증거하도록 용기를 줍니다. 미사전례 안에서 신앙고백은 동시에 구원을 이루시는 하느님을 찬양하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신앙고백은 찬미와 찬양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마치 찬미가처럼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놀라운 업적을 선포합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본당에서는 니체아 - 콘스탄티노플 신경이 단순히 길다는 이유로 사도신경을 선호합니다. 그러나 미사의 공식 신앙고백문은 니체아 - 콘스탄티노플 신경입니다. 신앙고백을 할 때 규정된 몸가짐은 서는 자세입니다.(미사경본 총 지침 43항) 신앙고백을 기도하거나 노래로 할 때, 특별히 일러두어야 할 점은 그리스도의 강생과 탄생에 대해 고백하는 부분에서는 모두 허리를 굽혀야 하며 성탄 대축일과 예수 탄생 예고 대축일에는 더 나아가 무릎을 꿇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하느님의 하강과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 시작을 경외스런 눈길로 바라보는 자세입니다. [월간빛, 2013년 12월호, 최창덕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부설 평신도신학교육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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