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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대축일] 2014년 6월15일 삼위일체 대축일 /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작성자성경주 쪽지 캡슐 작성일2014-06-16 조회수10,222 추천수0


2014년 6월 15일 일요일 [(백)삼위일체 대축일]

 (청소년 주일 / 생명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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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insys.tistory.com/322한암의 누리사랑방

도라는 물감으로 그림그린 화가 15세기 러시아 이콘화의 정점을 보여준 화가, 안드레이 루블료프, 삼위일체


교회는 성령 강림 대축일 다음 주일을 삼위일체 대축일로 지내고 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 고백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마태 28,19 참조)에 따라 초기 교회 때부터 이어져 왔다. 삼위일체 대축일이 로마 전례력에 들어온 것은 14세기의 요한 22세 교황 때였다.

오늘 전례
▦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고 그분께 의탁하는 사람입니다. ‘삼위일체’는 어려운 개념과 공식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일치와 사랑을 뜻하는 말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에게서 흘러나온 사랑에서 교회는 탄생하였고, 우리는 그 사랑의 힘으로 살아갑니다. 삼위일체의 사랑에 따른 삶의 길은 일치와 헌신입니다. 그러한 삶을 실천할 것을 다짐하며 기쁜 마음으로 이 미사에 참여합시다.


복음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16-18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영성체 후 묵상

▦ 신학생 때 신학을 공부하다 보면 어려운 개념을 만나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특히 삼위일체에 대한 교의가 그렇습니다. 성삼위의 일치로서의 사랑이 세상과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으로 드러난다는 뜻의 개념들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 자체이시고 그 사랑이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신다는 것은 학교의 신학 공부만으로 온전히 알 수 없으며, 삶을 통하여 배워야 하는 것임을 한참 뒤에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배우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길이란 결국 우리가 고백하는 삼위일체의 하느님 사랑을 마음으로 온전히 받아들이도록 스스로의 삶을 변화시켜 가는 여정임을 다시 한 번 생각합니다.

자료 : 부산신학원/ 스쿠올라 델 루벤스의 삼위일체의 신비를 묵상하는 아오구스딩 성인에게 나타난 아기천사

오늘의 묵상

일체와 관련한 가장 아름다운 성화로 많은 이가 꼽는 작품이 15세기 러시아 정교회의 위대한 성상 화가 안드레이 루블료프가 그린 ‘삼위일체’입니다. 화가는 성삼위의 모습을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세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이야기(창세 18,1-15 참조)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합니다. 
창세기의 이 장면은 아브라함이 자신에게 나타난 세 사람을 지극히 환대하는 모습, 그리고 주님께서 아브라함의 부인 사라가 아이를 가질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삼위일체’ 성화에는 정작 아브라함의 모습은 없습니다. 천사의 형상을 하고 있는 세 사람이 식탁 위의 그릇에 담긴 음식을 중심으로 살짝 몸을 기울인 채 서로 부드럽게 바라보고 있는 모습입니다. 식탁은 제대를, 그릇은 성작을 닮았습니다. 온화한 분위기와 세련된 색채의 이 그림을 보는 이는 자연스럽게 세 사람의 평화로운 분위기에 잠길 것입니다.

이 그림을 감상한 영성가 헨리 나우웬 신부는 『주님의 아름다우심을 우러러』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도 세 거룩한 천사가 나누고 있는 친밀한 대화에 동참하라고, 그리고 식탁에 더불어 앉으라고 부드럽게 초대하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성자한테로 몸을 기울이신 성부의 움직임과 성부한테로 몸을 기울이신 성자와 성령 두 분의 움직임은 하나의 움직임을 이루게 되고, 기도하는 사람은 그 안에서 마음이 드높여지고 든든해진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성화에서 신적 신비의 매우 중요한 요소를 깨닫습니다. 바로 초대와 환대를 통한 ‘상호 내주’(相互內住)입니다. 내가 그 안에 있도록, 그가 내 안에 있도록 하는 사랑이 삼위일체의 사랑이며, 우리는 그러한 사랑에 초대받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난날 독일에서 공부할 때 삼위일체에 관한 신학 연수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교수들이 매우 정교하고 치밀한 논리로 삼위일체의 신학에 대한 강연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날 저를 감동시킨 강연은 마지막 날 여든이 넘은 신학자 한 명이 조금 불편한 몸으로 눈을 살짝 감은 채 삼위일체 성삼위께서 서로 초대하고 환대하며 내주하시는 모습을 조용히 이야기하던 모습이었습니다. 
그 강연을 들으면서 ‘삼위일체의 신비는 아마도 인간이 이해하고 설명하는 진리이기 이전에 그 안에 머물러 살고 숨 쉬는 진리이구나.’ 하고 깨달은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성삼위께서 초대하시는 그 사랑의 집에 머무르는 은총을 거듭 청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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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안에 담긴 하느님의 신비

 

자료 : 쉽게 쓰여진 시 / 삼위일체 대축일

 

-보석같은 묵상 / 깜장보석 -

 

연중 제10주일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위의 작품은 보기 드문 아주 귀한 자료입니다.

삼위일체의 지극하고 애절한 사랑을 그린 작품이지요.

성부, 성자, 성령의 관심과 사랑 그리고 조심스런 손길,그곳이 닿아있는 존재는 인간입니다.

 

인간의 조건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우리 부족과 한계를 매일 매순간 느끼면서존재 자체로 스스로에게 고통받아 새카맣게 타버린 인간,

상처받아 지쳐 늘어져 기진맥진한 우리 인간을 안타까움과 애처로운 마음으로 조심스레 받아 안으시는 성삼위!

죄로 얼룩진 인간인 나를 이토록 사랑하시는 성삼위! 당신이 사랑으로 만드신 인간을 그 무엇보다도 소중히 다루고 계시는

성삼위의 지극한 사랑이 느껴집니다.

 

삶이 투쟁이고 고통의 연속이라며 절망하게 될 때 험난한 전쟁터에 홀로 서있는 것같은 느낌을 받을 때

조용히 눈을 감고 이 작품의 성부, 성자, 성령의 손길을 느껴보세요. 성삼위의 사랑을 떠올려 보세요.

그럼, 아마도 새로운 힘이 솟아나면서 감사의 기도를 올리게 될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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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드로 보티첼리 Sandro Botticelli, 거룩한 삼위일체(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Holy Trinity (Pala della Convertite), (좌~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토비야와 천사, 삼위일체, 성 요한 세례자), 1491-93, Tempera on panel, 215 x192 cm, Courtauld Institute Galleries, London 영국.jpg

산드로 보티첼리, 거룩한 삼위일체

(좌~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토비야와 천사, 삼위일체, 성 요한 세례자), 

1491-93, Tempera on panel, 215 x192 cm, Courtauld Institute Galleries, London 영국



<이론이 아닌 실천으로>  / 민상영 요셉 신부 슴숲본당 주임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삼위란 성부, 성자, 성령을 말하고, 이 세 위는 구별되면서도 동등하신 분이시며, 한 분이신 하느님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삼위일체의 신비를 완전히 알아듣기 힘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론이 아닌 사랑으 실쳔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유적으로 삼위일체의 신비를 세 변과 세 각으로 된 삼각형으로 또는 샘물과 냇물, 그리고강물이지만 하나인 물, 그리고 남편과 아내와 자녀가 서로 사랑으로 일치된 가정 등으로 설명할 수는 있지만, 신비이기 때문에 인간의 언어로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입니다. 다만 제가 들은 비유 중에 기억에 남는것은 시간적으로 성부, 성자, 성령께서 현존하시는 것처럼, 우리 인생에 과거, 현재, 미래를 통틀어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일체이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인생의 마지막까지 사랑하시기에 우리 또한 사랑하면서 살아야지만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고, 사람답게 살 수 있습니다. 


사랑으로 일치하시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속서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또다른 가르침은 평등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교회는 이를 본받아서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가 그 직위와 본분이 다를지는 모르나 성삼위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가 사랑스런 자녀들이며 지극히 평등한 관계임을 깨닫고 그 신비를 생활하도록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셋이 하나되는 진리 안에 우리의 구원이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생활 안에서 삼위일체의 신비를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은 성호경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하는 것은 옛부터 신자들 사이에 전해오는 경건한 관습입니다. 2세기의 학자 떼루뚤리아누스는 "우리는 외출할 때와 집에 돌아와서, 옷 입을 때, 얼굴 씻을 떄, 음식을 먹기 전후, 잠들기 전, 그 밖의 행사에서 늘 몸에 십자 성호를 긋는다. 이는 비록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교회의 성전이 이를 가르치고 관습이 이를 증명하고 우리의 신앙이 이를 시인한다." 라고 하였습니다. 십자성호를 그음으로써 우리는 성삼위 일체와 그리스도 강생의 신비에 대한 신앙을 표시하며 또 가장 경건한 신앙 행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이 주간에 이론이 아닌 사랑과 평등의 실천으로 하느님을 닮는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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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경 - 사랑의 고백이며 삼위일체 신비 체험의 자리 / 이용권 안드레아 신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성호경입니다. 이보다 더 쉽고 간단하게 신앙을 고백하고, 우리 하느님의 신비, 곧 삼위일체의 신비를 잘 드러내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마를 짚으며 아버지 하느님을 부릅니다. 우리의 모든 지식과 지혜와 의지를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겠다는 다짐이 이 이마를 짚는 행동에 담겨 있습니다.  가슴을 짚으며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부릅니다. 이 동작을 통해 우리는 성자의 말씀과 행적,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로 이어지는 모든 복음를 가슴으로 받다들이며, 내 모든 감정과 마음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겠노라고 표현합니다.  양 어깨를 짚으며 우리의 도움이시며, 모든 지혜의 원천이시고 보호자이신 성령을 부릅니다. 이 속에서 우리는 모든 힘과 의지를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에 따라 우리도 사랑을 실천하겠다는 굳센 결심을 드러냅니다. 


 


삼위 일체, 세인트 제롬과 두 성도로 ANDREA DEL CASTAGNO의 
C. 1453 프레스코 SS. 안 눈치 아타, 피렌체


그리고 마지막으로 두 손을 모아 가슴 앞에 모으고 '아멘'이라고 외칩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라는 의미의 이 말을 통해 우리는 앞서 자신이 고백한 것을 다시금 하나로 묶어 고백하며, '참으로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선언합니다.  이 모든 과정의 중심에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님의 사랑, 보호자이신 성령님의 사랑, 다른 것 같지만 같은 것, 본질적으로 사랑이라는 하나의 원천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 안에 우리 자신을 맡겨 드리는 것입니다. 삼위일체에 대해 말할 때, 이 사랑을 빼놓는다면 어떠한 이론이나 놀라운 증명 과정도 다 헛된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4,16) 우리 하느님께서 '본질이 같으나 삼위로 존해'하시는 원리가 바로 이 사랑이며, '삼위이시나 하나'이신 이유 또한 사랑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를 깊이 있게 깨닫기를 바라십니까? 하느님 사랑 안에 푹 잠기기를 바라십니까? 그렇다면 이제 성호경을 할 때마다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정성껏 바쳐보십시오. 그 순간 사랑의 신비 안에서 놀라운 통찰력으로 삼위의 신비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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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위일체에 대한 경배, 알브레히트 뒤러 作(1511).

알브레히트 뒤러는 북유럽과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를 연결시킨 최고의 화가입니다. 그는 베네치아 미술의 현란한 색채와 피렌체 미술의 고전적 구성과 북유럽 미술의 세밀한 표현을 접목시켜 독특한 작품을 만들어냈습니다. 그의 천재성을 최고로 표현한 작품이 바로 <삼위일체에 대한 경배>입니다. 


삼위일체 대축일 (요한 16,12-15) : 삼위일체에 대한 경배


             그림 성서 박물관


손용환신부님

그림 읽어주는 신부

    



이 그림을 보면 로마서의 말씀이 연상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믿음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서 있는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1-2.5)


이 그림에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성인들의 경배장면이 나옵니다. 이 그림의 황금분할선상에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성자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분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핵심입니다. 세상의 임금이신 성부 하느님은 아들 예수님을 두 팔로 감싸 안으십니다. 그분은 하늘의 색인 청색 옷을 입으셨고, 영광의 색인 금색과 생명의 색인 녹색으로 장식한 망토를 걸치셨습니다. 그래서 하늘의 임금이신 영광의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 위에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천사들을 거느리고 임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림 전체가 성령의 힘으로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성부의 옷을 펼쳐들고 있는 천사들은 그리스도의 수난도구를 들고 성삼위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색채가 눈부시게 화려하고 생생해서 그리스도의 수난도구가 묻힐 지경입니다. 성인들은 두 개의 반원을 이루면서 성삼위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성녀들은 순교를 상징하는 종려나무가지를 손에 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심에는 푸른 옷에 왕관을 쓰신 여인이 계십니다. 그분이 바로 성모님이십니다. 그리고 성모님의 좌우에는 어린양을 안고 있는 마리아 막달레나와 성체를 받쳐 들고 있는 사도 요한이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셨음을 상징하는 것 아닐까요? 그 반대편에는 세례자 요한이 중심에 있습니다. 그의 주변에는 십계명을 들고 있는 모세와 하프를 들고 있는 다윗과 담비털옷의 솔로몬과 구약의 성조들이 있습니다. 이는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임을 말해주는 것 아닐까요? 

하단에 있는 성인들의 중심에는 대(大) 그레고리오 교황이 성삼위를 찬양하고 있고, 그 맞은편에는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성왕이 다른 왕에게 성삼위의 축복에 대해 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뒤에는 유스타스 성인을 비롯한 다른 성인들이 공중에 떠 있습니다. 그런데 맨 아래 왼편에는 이 그림의 주문자인 마테우스 란다우너도 성인들 무리에 끼어 있습니다. 그는 성인들과는 달리 수수한 옷을 입고 겸손하게 무릎 꿇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의 간절한 기도는 성인들과 함께 성삼위를 찬양하게 해달라는 내용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곁에는 수도복을 입은 기적의 성인인 프란치스코가 기도하고 있으며, 주교복은 입은 예로니모 성인이 그를 성삼께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뒤러의 자화상은 맨 아래 오른편에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서명과 함께 라틴어로 연도를 써 넣은 커다란 기념비와 함께 홀로 외로이 땅에 머물러 있습니다. 천국은 천재적 재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헌신적 사랑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한없이 넓은 아름다운 호수의 풍경도 하늘의 영광에 비하면 초라하게만 보입니다. 화려한 외모를 지녔던 뒤러도 성인들의 영광에 비하면 아주 작게만 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 머물 수 있을까요?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 16,13) 라는 말씀이 이루어지길 바랄 뿐입니다.

손용환 신부 (군종교구 쌍용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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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의 신비 / 홍승모 신부(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삼위일체란 무엇일까요 삼위는 한 하느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는 신앙에 관한 가장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교리입니다. 하느님의 단일성은 삼위로 이뤄져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세 위격을 서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삼위는 신성을 나눠 가지는 것이 아니라, 각 위격이 저마다 완전한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단일성은 나눠지지 않는 것이므로, 세 위격의 실제적 구분은 오로지 위격이 다른 위격과 갖고 있는 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신비를 굳이 창조물에 비유해 설명하자면, 흔히 태양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불꽃같은 태양의 본체는 하나이지만, 빛과 열로 구성되 있어 그 관계를 설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이 삼위일체 신비를 바라볼 때  조건은 그것이 하느님께 유보된 신앙의 신비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이 계시하시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신비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삼위일체는 하느님의 신비를 다 알아듣고 추론한 용어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느님이 세 분인데 신비롭게 하나라는 모순된 말을 믿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세분의 이름은 성자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삶을 구체적으로 보고 배우며, 성령이 우리를 변화시켜 우리 안에 주님의 삶이 나타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삼위일체는 우리 시대가 필요로 하는 신비이며 성자도 성령도 모두 하느님을 향한 우리 여정을 밝히고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신앙입니다. 


반신부/ 삼위일체 대축일, 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라 마태28,16-20



그리스도인들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삼위일체에 근거한다는 표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아버지 하느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성령의 신비로운 삼위가 다채로우면서도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시실을 봅니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끄끌어 주실 것이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요한 16,13-15)  결국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는 하느님의 진리와 분리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 진리를 성령이 증언하시고 이제 신앙인들이 깨닫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삼위일체의 신비 속에서 이 진리가 신앙 공동체에 계시됩니다. 이 진리는 성부, 성자, 성령이신 하느님께서 바로 사랑 안에 일치를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삼위일체의 신비에 대한 신앙의 핵심은 아버지 하느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의 성령 안에서 사랑으로 계시하시고 구원하시며 우리들 가운데에 현존 하신다는 것을 믿는 데에 있습니다. 


하느님은 저 하는 위 높은 곳에 홀로 앉아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귾임 없이 자신을 열어 보이시며, 우리가까이 내려오시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 당신의 자비와 사랑을 고백하시는 그분은 그렇게 끊임없이 인간과 사랑의 관계를 맺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사랑으로 존재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은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혼자서만 살 수 없습니다. 이웃과의 관계가 자신의 자아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서로를 묶어주는 사랑이 지금의 나를 형성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깨달은 진리들, 자신이 맺은 사랑의 열매들을 자신의 삶 속에서만 찾으려 한다면 그것은 이기심과 교만에서 우러나오는 것일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런 생각과 열매들을 누군가의 삶에서도 발견하고 찾아 낼 수 있다면, 더 기쁜 일일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사랑으로 일치된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거룩한 삼위일체가 내재한 사랑의 신비는 모든 믿음의 뿌리이며, 신앙을 비추는 빛입니다. 우리가 미워하는 누군가를 마음에 받아들여 모든 갈등과 오해가 사라지는 순간이 바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빛이 우리를 비추는 순간입니다. 하느님의 세 위격은 서로 사랑 안에서 일치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역사는 바로 성부, 성자, 성령이신 참되고 유일한 하느님께서 당신을 계시하시고, 죄에서 돌아서는 인간들과 화해하시며, 그들을 당신과 결합시키시기 위한 여정과 관계의 역사인 것입니다. 손을 붙잡아주는 누군가와 함께할 수 있다면, 갈 길이 험하고 힘든 어떤 여정도 끝가지 갈 수 있다고들 합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 바로 우리 삶의 동행자이십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영원한 생명이신 하느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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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 드리는 초대장" / 이규현(가를로보로메오)신부 정자꽃뫼성당 보좌


"신부님, 신부님은 참 좋으시겠어요. 세상 걱정 없이 하느님만 바라보며 살고 계시니까요 부부간에 갈등도 없고 자식 걱정 안 하니 얼마나 행복하세요?" 그러면 저는 대답합니다. "물론 행복합니다만, 그것이 혼자이기 때문은 아니에요. 혼자 사는 것도 쉽지는 안아요!"라고```. 


과연 세상에 걱정도 근심도 어려움도 없는 삶이 있을까요? 걱정과 근심은 미래를 알 수 없는 우리의 삶에서, 어려움은 미약한 인간의 능력에서 비롯하는 필연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걱정도 근심도 없고 어려움도 없는 삶이란 없습니다. 단지 그 걱정과 어려움이 조금씩 다를 뿐이지요. 



제가 첫 본당에서 생활할 때에는 첫 단추를 잘 뀌어야 한다는 부담감,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있기에 더 노력해야 한다는 압박감, 많은 단체 모임들과 회의 그리고 행사들로 인해 쉽게 지치곤 했습니다. 때로는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한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시간을 통해서 사제는 진정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며 삶의 중심을 '기도'에 두고자 노력했습니다. 면담을 하거나 회합을 들어가는 등, 크고 작은 모든 일에 있어 주님께 기도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주님께서 내 손을 잡고 계신다는 마음으로임했으며, 그 결과를 주님께 맡겨 드리고자 했습니다. 


놀랍게도 그때무터 너무나 어렵고 힘들었던 상황에서 한 줄기 빛이 보이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길이 열렸습니다. 그때에 저는 주님의 놀라운 신비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치 태초의 혼돈에서 땅과 물을 가르듯이 성부 하느님께서는 어려운 상항을 정리하고 새로운 빛을 창조해 주셨고, 구원자 예수님께서는 근심과 걱정의 죽음에서 기쁨과 갘사의 부활로 나를 구원하셨으며, 성령께서는 당신의 섭리로 저를 이끌어 주신 것이었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사랑과 협력으로 인류를 창조하고, 이끌고, 구원하였던 바로그 신비가 제 삶 한가운데에서 새롭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바로 이 삼위일체의 신비가 저를 행복하게 합니다. 걱정과 근심이 없어서, 어려움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의 신비가 저와 함께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걱정이 있고 어려움이 있어도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삼위일체의 신비에서 샘솟는 사랑으로 우리의 삶은 새로이 창조돠고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삼위일체의 신비, 사랑과 구원의 신비가 우리 안에서 새롭게 이루어지도록 그분을 초대해야 합니다. 크고 작은 일, 좋고 나쁜 일 뿐만 아니라 내 삶의 중심에 그분을 초대하는 것입니다.  성부 하느님과 함께 시작하고, 임마누엘 예수님과 함께 최선을 다하며, 성령께 맡겨드리는 노력이 그것입니다. 우리의 초대에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함께 하시어 우리의 삶 한 가운데에서 새로운 창조와 구원을 이루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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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적 의미


삼위일체 대축일은 하느님이신 성부·성자·성령의 세 위격(位格)은 완전히 서로 구별되면서도 동시에 하나의 신성을 이룬다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특별히 기념하는 날이다.

4세기경 삼위일체 이단설을 주장하던 아리우스파에 대한 교회의 반박으로부터 시작됐으며, 800년 경 아일랜드 출신인 영국 학자이자 신학자 알쿠인(Alcuin, 토마스 아퀴나스)이 주간 평일미사를 위한 작은 미사 경본을 만들면서 맨 처음 삼위일체 미사를 수록했다. 그 후 삼위일체 미사는 신심미사로 취급되지 않고 성무 집전서 안에서 성령강림 주일 이후 첫째 주일 혹은 마지막 주일에 거행됐다.

10세기 초 리에주(Liege)의 주교 스테파노(Stephanus, 재위 903~920)는 미사를 보완하기 위해 삼위일체 주일 성무일도를 만들었고, 이로써 삼위일체 주일을 지내기 위한 모든 요소들이 갖춰지게 됐다.

교황 알렉산델 2세(1061~1073)와 교황 알렉산델 3세까지는 영광송 암송 시 삼위일체를 기리므로 특정한 날을 정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지만, 이 축일은 수도원을 중심으로 널리 보급돼 점차 수도원 전례에 도입됐다. 하지만 당시에는 지역에 따라 거행 시기에 차이를 보이기도 했다.

삼위일체 대축일은 영국에서 대중화됐다. 영국 성인 베켓(St. Thomas Becket, 1118~1170) 대주교의 주교 서품일이 삼위일체 축일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후 1334년 교황 요한 22세는 이 축일을 성령강림대축일 다음 주일로 지정하고 교회의 의무 축일로 발표했으며, 1911년 교황 비오 10세는 대축일로서 공포했다.

삼위일체 대축일은 하느님이신 성부 · 성자 · 성령의 세 위격은 완전히 서로 구별되면서도 동시에 하나의 신성을 이룬다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특별히 기념하는 날로, 1911년 교황 비오 10세가 대축일로서 공포했다.


■ 전례적 의미

삼위일체 미사 경문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젤라시오 성무 집전서’에서 따온 감사송으로 다른 기도문은 이 감사송의 내용을 반영한 것이다. 삼위일체의 신비를 가장 잘 드러낸 감사송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버지께서는 독생 성자와 성령과 함께 한 하느님이시며 한 주님이시나, 위(位)로서 하나가 아니시고 삼위일체이신 본체(本體)로서 하나이시나이다. 주님의 계시로 주님의 영광에 대해 저희가 믿는 진리는 성령께도 다름이 없나이다. 그러므로 위로는 각각이시며 본체로는 하나이시고 위엄으로는 같으심을 흠숭하오며 영원하신 하느님을 믿어 고백하나이다.”

삼위일체 대축일의 독서 역시 이 축일의 의미를 잘 반영하고 있다. 가해의 출애굽기와 나해의 신명기 독서에는 하느님의 초월성 및 하나이신 하느님을 선포하고 있으며 다해의 잠언은 살아있는 인격체와 같이 하느님의 귀를 기울이도록 이끌어주고 있다.

제2독서의 사도 바오로 서간들은 세례 받은 사람의 삶 안에 바탕을 이루는 각 위격의 활동을 상기할 수 있도록 만든다.

또한 복음은 가해 성부가 성자를 파견하고, 가해 성령이 오실 것을 예고하며, 나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온 세상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향한 사명을 들려주고 있다.

전례 중 기도문과 독서들은 삼위일체 신비의 교의적인 측면이 아닌 구원사 안에서의 하느님의 숨결을, 성령의 활동 안에서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신비를 밝히는데 바탕을 두고 있다. 


■ 교리 이해하기

초기 교회 때는 촛불이 불꽃과 심지, 밀랍 세 부분으로 이뤄져 있는 것을 두고 삼위일체를 설명하기도 했다. 밀랍을 그리스도의 몸, 심지를 그리스도의 영혼, 불꽃을 그리스도의 신성에 빗댄 것.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관계론적 설명을 통해 한 분 하느님 안에는 세 가지 존재 양식이 있으며, 그 중 하나도 다른 하나가 없이는 있을 수 없다고 밝혔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영혼의 속성을 기억, 인식, 사랑으로 정의하면서 기억, 인식, 사랑이 성부, 성자, 성령에게 해당 된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아울러 많은 현대 신학자들 중, 특히 칼 라너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구세사적 관점에서 바라봤다. 이러한 관점은 사랑이신 하느님은 사랑 안에 갇힌 채 머무르기보다 당신 자신을 자유로이 외부로 건네주신다고 말한다. 이는 하느님은 사랑 그 자체임을 드러내고 있다.

하느님(성부)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모든 것인 당신 아들(성자)을 보내주시고, 인간의 비길 수 없는 초월적인 사랑을 성령을 통해 알려주심으로써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사랑의 하느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 2013년 5월 26일, 이우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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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불광동성당 미디어팀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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