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의 숲] 미사 - 마지막 만찬 교리서가 말하는 것처럼 성찬례는 그리스도교 믿음의 종합이자 요약입니다. 성찬례에는 거룩한 미사, 감사제, 기념제, 일치의 성사, 그 밖에도 여러 얼굴과 이름이 있습니다. 또한 제사의 성격이 있고 공동 식사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뿌리와 중심은 언제나 주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과 함께 하신 마지막 만찬입니다. 교회는 그 때부터 줄곧 마지막 만찬을 기념하고 재현하기 위하여 모입니다. 형제들과 함께 주님을 모시고 깊고도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을 기억하며 되살리는 시간을 갖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분과 함께 나누는 고뇌와 어둠의 시간도 있습니다. 미사는 하느님과 사람이 만나고, 하늘과 세상이 어우러지는 신앙의 신비입니다. 브뤽셀의 고드프리드 대주교님의 도움을 받아 그날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함께 가지셨던 만찬 식탁을 가까이서 살펴봅니다. 1. 마지막 만찬 식탁은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합니다. 무엇보다 빵과 포도주가 있습니다. 식탁 둘레에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앉아 있습니다. 그 전에도 예수님은 늘 제자들과 함께 밥을 잡수셨지만 이날은 매우 특별했습니다. 준비부터가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때’가 이른 것을 아셨고, 모든 것을 예상하였던 것입니다. “내가 고난을 겪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파스카 음식을 먹기를 간절히 바랐다.”(루카 22, 15). 그러므로 만찬을 주의 깊게 준비하십니다. 아마도 작은 것까지 마음을 쓰신 것 같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자기에 앞서 성 안으로 보내십니다. 성찬례에 들어 있는 특징을 베드로는 사제직을, 요한은 사랑을, 넌지시 알려주는 듯합니다. 그날 저녁 식탁에서 예수님은 전에 들어 본 적이 없는 말씀을 하시고, 전에 본 적이 없는 동작들을 행하십니다. 동작과 말씀은 꽤 단순하였습니다. 먼저 “빵과 포도주잔을 집어 드는” 동작입니다. 복음사가들은 일상적이고 평범한 이 동작을 “당신 손에 빵과 포도주를 들고”라고 말하며 분명히 밝힙니다. 주님은 빵과 포도주를 손에 드시면서 땅의 소출과 사람이 흘린 땀을 받아들이십니다. 그리고 그것들의 마지막 의미를 드러내십니다. 빵과 포도주에 담겨 있는 자연의 열매와 인간의 노동은 거룩하게 변하여 하느님의 몸과 피가 됩니다. “빵을 쪼개셨다”는 동작 또한 무게를 갖습니다. 하나의 큰 빵이 준비되어 있으므로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동작에는 그런 현실적 기능만 들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이가 같은 빵을 먹는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한 솥밥을 먹는 한 식구라는 뜻입니다. 한편 교회 전통은 이 동작을 수난의 상징으로도 이해하였습니다. 고통으로 주님의 몸이 ‘부서집니다.’ 이사야는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라고 예언했습니다(53, 5). 단순한 동작에는 예수님의 완전한 순종이 감춰져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온 생애를 이렇게 순종하며 사셨습니다. 이 순종은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마지막 “예”로 절정에 이릅니다. 빵을 쪼갠 뒤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나의 몸이다.” 포도주에 대해서는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흘릴 내 피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유언을 남기십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교회는 이 말씀을 세상이 끝날 때까지 간직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단순한 예식으로 축소하지 않고 삶으로 실천합니다. “예수님 기억”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스승의 유언을 몸과 마음으로 충실히 간직합니다. 2. 발을 씻어 주심 마지막 만찬의 모습에 관하여 요한복음은 말하지 않습니다. 다른 복음사가들은 물론 성 바오로도 말하고 있습니다. 성 요한은 그것을 잊을 수 있었을까요? 믿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요한은 다른 방식으로 말합니다. 곧, 식탁에서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인상 깊은 장면을 이야기합니다. 색다른 시선으로 성찬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깊은 곳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다른 데서 표현하지 않은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합니다. 예수님은 식탁에서 일어서시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십니다. 종이 하는 하찮은 일을 주인이 합니다. 가장 위대한 분이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모든 이의 주님께서 모든 이의 종이 되신 것입니다. 사실 빵과 포도주의 형태로 자신을 내어 주실 때 이미 한 없이 내려오셨습니다. “이것은 너희에게 내어줄 내 몸이다.” 그러나 이 말씀에 담긴 낮춤과 섬김의 깊은 신비는 요한의 영적 시선으로 비로소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이 ‘발 씻김’ 모습을 전하지 않았다면 우리를 향한 이토록 신비스러운 하느님 사랑을 잘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느님이 우리 종이 되신다? 교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이 사랑의 동작을 해마다 성 목요일에 되풀이합니다. 그러나 미사 때마다 주님께서 우리의 발을 씻어 주십니다. 요한은 우리에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미사를 거행할 때마다 너희는 똑같은 장면을 보지 않느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주님께서 식탁을 돌며 너희 발을 씻어 주신다. 가장 보잘것없는 이부터 먼저 씻어 주신다. 죄인도 빼놓지 않으신다.” ‘발 씻김’에서 깊은 하느님 사랑의 신비가 너울을 벗습니다. 물론 우리는 사랑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거부에 공감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제 발을 씻으시렵니까?”(요한 13, 6) 확실히 하느님은 분에 넘치게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것은 우리 공로에 대한 보상이 아닙니다. 대가 없는 은총입니다. 그 사랑을 누리기 위해서는 오직 믿음만이 필요할 뿐입니다. ‘발 씻김’ 장면은 성찬례의 참된 모습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호소이고 명령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깨닫겠느냐? 너희가 나를 ‘스승님’, 또 ‘주님’ 하고 부르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나는 사실 그러하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 12-15). 그러므로 미사에 참여하는 이들은 이중으로 겸손해야 합니다. 먼저 주님의 은총에 마음을 열고 그분의 섬김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받은 은총과 섬김을 자기 안에 가두어 두지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해야 합니다. 3. 유다 주님의 마지막 만찬에는 불편함을 넘어서는 아픔이 있었습니다. 2층 방에는 짙은 어둠이 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거기에는 배신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열두 사도 가운데 하나가 다른 이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습니다. 그는 자기 주님을 배신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악에 저항하지 않으십니다. 배신을 받아들이시고 당신 수난에 들어가십니다. 그분은 배신할 사람에게 다가가십니다. 발을 씻어주기 위하여 그 앞에서 무릎을 꿇으십니다. 이따가 겟세마니 동산에서는 그의 입맞춤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가 계속하여 예수님의 친구로 남는 것은 확실합니다. 예수님은 “칼과 몽둥이를”을 든 무리를 데리고 자신을 붙잡으러 오는 그를 “나의 친구”(마태 26, 50)라고 부르십니다. 친구에게 배반당하는 것, 예수님은 이 끔찍한 고통을 피하지 않으십니다. 이제 시편 저자의 신음과 탄식이 참으로 진실하게 울려옵니다. 그것은 인격체를 가지신 하느님의 운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친한 친구에게 배신당하는 모든 이와 함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원수가 저를 모욕했다면 제가 참았으리이다. 저를 미워하는 자가 저에게 우쭐댔다면 제가 숨었으리이다. 그런데 너였구나, 내 동배, 내 벗이며 내 동무인 너. 하느님의 집에서 정답게 어울리며 축제의 무리와 함께 거닐던 우리.”(시편 55, 13-15) “제가 믿어 온 친한 벗마저, 저와 함께 밥을 먹던 그 친구마저 발꿈치를 치켜들며 대드나이다.”(시편 41, 10) 예수님은 당신 몸을 배신하는 그에게 내어 주십니다. 그리고 덧붙이십니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요한 13, 27) 유다는 떠나갑니다. “때는 밤이었습니다.”(요한 13, 30) 그분은 겹으로 고통을 받으십니다(요한 13, 21 참조). 악에 저항해야 하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단순한 정의를 넘어서는 논리를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오른 뺨을 때리는 이에게 왼쪽 뺨을 내밀라고 가르칩니다. 용서와 사랑만이 세상을 참으로 인간적으로 만든다고 가르칩니다. 완전하게 이해하기도 어렵고, 실천하기도 더 어려운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보상을 요구하는 정의는 흔히 앙갚음과 폭력의 악순환으로 이끕니다. 미움의 폭풍보다는 용서의 햇볕이 폭력의 무기를 내려놓게 합니다. 남의 것을 돌려주는 것이 정의입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남의 것이라는 것이 하느님의 정의입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은 다른 방식으로 정의를 실천하십니다.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 45) 그분은 모든 사람, 모든 것을 사랑하십니다. 그분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 8. 16) 우리는 성찬의 식탁에 다가갈 때마다 어두운 밤, 배신의 밤을 기억하며 성찰해야 합니다. 주님은 어느 누구도 부족함이나 약함 때문에 거부하시지 않습니다. 그 수난의 밤에 유다만 그랬는가? 제자들은 모두 어디에 있었는가? 으뜸 사도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배신하지 않았던가? 분명히 주님은 우리에게 잠에서 깨어나라고 호소하십니다. 그러나 넘어진 이를 결코 거부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주 부끄럽고 떳떳하지 못하지만, 믿음으로 그분의 은총에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본받아 믿음으로 우리의 배신자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성찬례의 가르침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4년 9월호, 심규재 실베스텔(신부, 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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