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속의 교회 읽기] 국기에 십자가를 담은 나라들 한때 교회가 세상을 향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국가도, 사회도, 문화도, 그리고 역사까지도 교회 없이 존립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고나 해야 할 것이다. 그만큼 교회는 유럽과 남북 아메리카, 아프리카 일대에서 민족을 형성하고 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데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꼭 필요한 요소였다. 그 흔적들이 오늘날까지도 적지 않게 남아 있다. 그 하나가 나라의 상징인 국기들이나 군대의 표징인 군기들에 들어 있는 십자가일 것이다. 교회는 1년에 하루를 잡아 ‘성 십자가 현양 축일’(9월14일)에 십자가를 특별히 기억한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1년 내내 게양하는 국기에 십자가를 그려 넣은 나라들의 십자가 현양 정신이 애초에는 남다르지 않았을까싶다. 세계에는 230~240개에 달하는 국가들이 있는데, 그중 20개 가까운 나라들의 국기에 십자가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영국의 국기인 유니언잭을 국기의 일부에 그려 넣는 영연방 국가들까지 합치면 국기에 십자가를 새겨 넣는 나라들의 숫자는 50을 훌쩍 넘어선다. 그 나라들의 상황이나 정서가 지금도 예전과 같은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처음에 국기를 만들면서 십자가를 집어넣을 생각을 했을 당시에는 아마도 그리스도인으로서 또는 그리스도교 국가로서 십자가를 현양할 마음이 나름대로 꽤나 절실하고 진지했을 것이다. 아니면 그 시절에는 교회가 말 그대로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었기에, 통치자의 입장에서 국민을 통합하는 구심점으로서 교회의 역할에 의존하고 싶은 마음이 그만큼 컸는지도 모른다. 영국의 유니언잭에는 십자가가 자그마치 세 개나 들어 있는데, 여기에도 그 나름의 셈법이 있었다. 십자가가 세 개나 들어있는 영국 유니언잭 영국 제국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웨일스로 구성된 나라다. 그러니까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던 나라들이 합쳐서 좀 더 큰 나라가 된 것인데, 이 과정에 적지 않은 곡절이 있었음을 국기 안의 세 개 십자가에서 읽을 수 있다. 세 개의 십자가란 곧 성 제오르지오 십자가, 성 안드레아 십자가, 성 파트리치오 십자가를 말한다. 이 십자가들이 하나의 국기 안에 들어와 자리 잡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 나라 역사의 복잡한 면면을 말해 준다. 영국이 아직 복음화되기 전, 유럽 대륙의 열성적인 선교사들은 호시탐탐 서쪽의 바다 건너에 있는 섬나라들에 복음을 전하기를 염원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어렵사리 그 섬나라들에 발을 들여놓은 뒤에는 섬들에 있던 각 나라들과 특정한 성인들 사이에 각별한 인연이 생겨났다. 잉글랜드는 성 제오르지오와, 스코틀랜드는 성 안드레아와, 아일랜드는 성 파트리치오와 그러한 인연을 확고하게 굳혀 나갔다. 성 제오르지오는 7~8세기에 잉글랜드에 알려졌고, 어떤 연유인지는 모르지만 그곳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이 성인의 상징은 흰색 바탕에 붉은색 십자가인데, 이것이 그대로 잉글랜드의 상징이 되었다. 이 상징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십자군 원정 때 이미 사용된 것으로 전해진다. 오늘날에도 이것은 영국 해군의 기장(旗章)으로 사용된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4세기경에 성 안드레아 사도의 유해 일부가 스코틀랜드로 옮겨졌다고 한다. 사도의 유해를 관리하던 성 레굴로가 사도의 뜻을 받들어 복음을 전하고자 스코틀랜드를 찾은 것이다. 그리하여 성 안드레아 사도는 스코틀랜드의 수호성인이 되었고, 성 안드레아의 상징인 흰색 X형 십자가는 스코틀랜드의 상징이 되었다. 잉글랜드 또는 스코틀랜드 태생인 성 파트리치오는 16세 때 해적에게 붙잡혀 아일랜드에 노예로 팔려갔고, 그 인연으로 언젠가 아일랜드에 복음을 전하겠다는 열망을 갖게 되었다. 나중에 아일랜드를 탈출한 성인은 사제가 되고 주교가 되었으며, 아일랜드로 다시 가서 복음을 전했다. 성 파트리치오의 상징인 붉은색 X형 십자가는 아일랜드의 상징이 되었다. 각기 독립 왕국이었던 이들 세 나라는 오랜 기간에 걸쳐서 차츰 한 나라로 통합되었다. 먼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17세기 초에 통합해서 연합 왕국이 되었다. 그리고 100여 년 뒤에 이 연합 왕국이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으로 정식 출범하게 되었다. 두 왕국이 통합되면서 통합 국기도 만들었다. 그런데 양국 국민들 사이에서는 이 국기에 대한 불만이 매우 컸다. 잉글랜드 국민들은 성 제오르지오 기의 흰색 바탕이 성 안드레아 기의 파란색 바탕 때문에 좁아졌다고 불평하였고, 스코틀랜드 국민들은 성 제오르지오 기의 붉은색 십자가는 온전한데 반해 성 안드레아 기의 흰색 십자가는 가운데 부분이 끊어졌다며 못마땅해 했다. 그러다 보니 새로 만든 통합 국기를 게양할 때는 각각 자기들 고유의 기를 함께 게양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어서 19세기 초에 기존의 그레이트브리튼 왕국과 아일랜드 왕국이 통합되어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이 되었다. 그리하여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세 나라의 기를 조합한 새로운 국기를 만들었다. 잉글랜드의 상징인 성 제오르지오의 십자가, 스코틀랜드의 상징인 성 안드레아의 십자가, 아일랜드의 상징인 성 파트리치오의 십자가가 하나의 국기 안에서 합쳐진 것이다. 십자가 현양하며 그 뜻을 구현하려는 마음 살아있기를 그렇다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국민들 사이에서 불만이었던 기존의 국기에다 아일랜드의 상징까지 얹은 새로운 유니언 잭은 환영받았을까? 이들 세 나라는, 비록 십자가를 매개로 하나의 국기를 만들기는 하였지만, 정작 속내는 수평의 세계와 수직의 세계를 이어주는 십자가의 의미를 닮지 못해 그리 화기애애하지 않았다. 역사는 아일랜드가 이 유니언 잭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고 말해 준다. 그 대신에 성 파트리치오의 또 다른 상징인 토끼풀을 그린 기를 사용했다. 그리고 아일랜드가 통합 120년 만인 20세기 초에 원하지 않는 일부 지역을 남겨 놓고 다시 분리 독립해 나간 뒤로는 나름의 삼색기를 쓴다. 한편, 영국 제국을 구성하는 일원으로는 또한 웨일스가 있다. 그런데 웨일스는 오래전에 일찌감치 잉글랜드에 병합되었으며, 따라서 통합 국기를 만들 당시에는 논의의 대상이 아니었고, 당연히 웨일스의 상징은 제외되었다. 이에 웨일스 사람들은 웨일스를 상징하는 붉은 용이나 성 다윗의 문장(紋章)을 포함하는 새로운 유니언 잭을 만들자고 요구한다. 그러나 이 요청에 대해서는 웨일스가 독립된 왕국이 아니라 신하의 나라인 공국에 불과했기 때문에 유니언 잭에 반영될 수는 없다는 반대도 만만치 않다. 국기 하나를 놓고, 현실에서는 저마다 자신의 입장과 권리를 주장하느라 열을 올렸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래도 시초에 국기 안에 십자가를 넣기로 했을 때는 참으로 교회를 생각하고 십자가를 현양하며 그 뜻을 구현하려는 마음과 진정성이 있었을 것이다. 그 마음과 진정성이 오늘에도 살아서 움직이기를…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5년 9월호, 이석규 베드로(CBCK 교리교육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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