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의 숲] 거룩하시도다 감사송을 마치며 “거룩하시도다”를 노래합니다. 회중은 천사들과 성인들과 함께 이 노래를 부르며 거룩한 어좌에 앉으신 주님을 찬양하면서 그분의 영광을 관상을 합니다. 이 노래는 좁은 의미의 “거룩하시도다”(상투스)와 “찬미받으소서”(베네딕투스), 두 부분으로 이루어집니다. 라틴어로 “상투스”, 그리스어로 “트리사기온”(=세 번 거룩하시도다)이라 부르는 이 노래는 “세라핌 찬미가”, “천사 찬미가”, “영광 찬미가”와 같은 다른 이름도 지니고 있습니다. 첫 단락 “거룩하시도다”는 이사야서(6,3)와 묵시록(4,8)에 나오는 환시에서 온 것입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옥좌 둘레에서 펼쳐지는 끊임없는 예배를 관상하며 세라핌들이 노래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분의 영광이 가득하다.” 미사 전례에서는 성경 본문의 “주님”에 “하느님”을 덧붙여 “주 하느님”으로 고치고(묵시록 4,8), “땅”에 “하늘”을 덧붙이며, 전례 기도문에 어울리게(=하느님 현존 앞에서) “그분의”를 “당신의”(우리말 미사경본에서는 “그”로 되어 있어 있음)로 바꾸어 사용합니다. 성경에서 “거룩하다”라는 낱말은 본디 “분리하다”의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모태에서 갓 나온 아기에서 어머니를 묶어주는 탯줄을 잘라내는 행위와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또 그리스 사람들은 “거룩함”을 “세상에서 빠져 나옴”, 그래서 “세상에 속하지 않음”으로 이해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세상은 “거룩한 것”에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게 됩니다. 또한 “거룩한 것”만이 사람을 치료할 수 있고, 사람은 “거룩한 것”과 접촉할 때만 건강하게 되고 온전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거룩함은 그분이 사람과 세상과 모든 신들과 절대적으로 ‘다른 분’이심을 말합니다. 하느님은 오직 한 분이시고 그분과 같은 이는 결코 없다는 뜻입니다. 또한 그분은 다가갈 수 없는 분이시고, 눈으로 볼 수도 없는 분이심을 뜻합니다. 이러한 특징은 그분께서 계시거나 관련이 있는 시간 장소 사물 사람들에게도 적용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거룩함은 실제적으로 이스라엘을 한 데 모으는 것, 다시 말하면 인류를 새로운 한 가족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하느님 친히 당신의 거룩함을 “흩어진 당신 백성을 다시 모으는 것, 약속된 땅에 다시 데려오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에제 36,24). “거룩하다” 낱말은 본디 “분리하다” 뜻 지녀 “만군”은 우리말 미사경본에서는 “온 누리”라고 풀어 옮겼습니다. 라틴말 미사경본에는 히브리말을 본떠 “사바오트”라고 쓰고 있습니다. 이 낱말은 기본적으로 군대, 대열, 무리라는 뜻으로 성경에서 천사들과 별들의 주인이신 주 하느님을 가리키는데 씁니다. “영광”은 거룩함이나 정의 같은 하느님의 속성이 밖으로 드러난 모습을 표현합니다. 무엇보다 당신 백성 가운데 드러나는 그분의 현존을 가리킵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예루살렘 성전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과 하늘을 가득 채웁니다. 실제로 주님의 영광은 홍해를 건넌 뒤 사막, 시나이 산, 만남의 장막,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러났지만, 결정적으로 말씀의 강생으로 사람들 가운데 나타납니다(요한 1,14). “찬미받으소서”(베네딕투스) 부분에서 예언자의 환시에서 성지주일로 전례로 넘어갑니다. 이 단락은 시편(118, 25-26)에 나오는데 복음서를 통하여 전례에 들어왔습니다. 이 시편은 장막절 축제 일곱째 날 백성이 손에 나뭇가지를 들고 성전으로 행렬하여 들어가는 모습을 노래합니다. 이 전통을 배경으로, 예수님이 겸손한 임금이자 메시아로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군중은 나뭇가지를 들고 이 노래를 부릅니다. “다윗의 자손께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양받으소서.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마태 21, 9) (우리말 성경에는 “찬양받으소서”를 “복되시어라”로 옮김) “호산나”는 히브리어를 그리스어로 표기한 낱말로서 “주님, 저희를 구원하소서!”, “주님, 저희를 도와주소서!”라는 뜻입니다. 청원의 구절이나 전례에서 찬미의 외침으로 바뀌었습니다. “높은 데서”는 “(하늘들의) 가장 높은 곳에”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여 “하느님께서 계시는 곳”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거룩한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는 사실과 관련이 있습니다. 묵시록 4장에서는 “높은 곳”을 영광을 받으신 어린양이 계시는 곳으로 묘사합니다. “거룩하시도다” 노래가 언제 어떻게 미사의 감사기도에 들어왔는지는 정확하게는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 시대 유다교 전례에서는 “거룩하시도다”(트리사기온)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학자들은 유다교 관습을 받아들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거룩하시도다” 노래는 초 세기부터, 꼭 미사에서는 아니지만, 교회 전례에서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미사에는 늦어도 동방에서는 4세기, 서방에서는 5세기에 들어온 것으로 보입니다. “찬미받으소서”는 조금 나중에, 6세기나 그 전에, “거룩하시도다”에 결합된 것으로 보입니다. 동방에서는 더 후대에, 8세기 무렵에 이 현상이 나타납니다. 감사기도에서 신자들이 천상 전례에 참여해 “거룩하시도다”가 미사에 들어오면서, 미사에서 특히 감사기도에서 신자들이 천상 전례에 참여한다는 사상이 들어 왔습니다. 한편 전통적으로 이사야서의 “거룩하시다”는 하느님 아버지를 향한 찬미이지만, 미사의 “거룩하시도다”는 삼위일체 하느님께 지향한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초 세기부터 예수님은 “만군의 주님”으로 동일시되어 “세 번 거룩하신 분”으로 존경을 받았기 때문에 학자들은 “거룩하시도다”는 처음에는 그리스도를 지향한 것으로 생각합니다(J. 만뉴). 특히,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시는 주 예수님을 찬양하는 “찬미받으소서”(베네딕투스) 부분에서는 그리스도의 의미가 강합니다. “거룩하시도다”가 하느님께서 온 누리에 발현하심(초월적 신성)을, “찬미받으소서”는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하게 드러나심(내재적 신성)을 노래한다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하느님의 거룩함은 결정적으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 예수님에서 완전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거룩하시도다”는 예수님을 통하여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하느님께 우리가 가까이 갈 수 있고, 예수님을 통하여 아버지 하느님께서 흩어진 모든 사람을 한 가족으로 모으신다는 믿음을 고백하는 노래입니다. 또한 우리가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은 하느님의 한 가족으로서, 세상과는 다르게, 덧없는 세상의 흐름과 유혹에 의연히 맞서고, 고아와 과부, 가난한 이웃과 연대하겠다는 힘찬 다짐이기도 합니다. “거룩하시도다”는 사제와 교우들이 다 함께 부릅니다.(미사경본 총지침 79, 148) 실제로 감사송은 모든 참석자들에게 천사들과 성인들의 목소리에 자신의 목소리를 합하도록 권고합니다. 성가대 홀로 부른 것은 중세에 생긴 관습입니다. 한편 과거에는 “거룩하시도다”와 “찬미받으소서”를 따로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성가대는 아름답고 어려운 가락으로 노래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노래는 더욱 길어지게 되고, 주례는 노래가 끝나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낮은 소리로) 계속하여 기도문을 낭송한데서 유래했습니다. 이렇게 “찬미받으소서”(베네딕투스)를 축성 뒤에 부르게 되면서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찬미로 그것을 여기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찬미받으소서”를 떼어서 부르거나 생략할 수 없습니다.(라틴어 미사곡을 부를 때도 “베네딕투스”를 생략할 수 없습니다. 또한 가톨릭 성가집 333번으로 “거룩하시도다”를 대체할 수 없습니다. “상투스” 가사도 온전하지 않고, 더군다나 “베네딕투스”가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6년 3월호, 글 심규재 실베스텔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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