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4일 토요일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루카
2,41-51)
요한네스 에우데스(Jean Eudes,
1601-1680)
축일의
유래 /조욱현 신부님
요한네스 에우데스(Jean Eudes, 1601-1680)는
예수 성심과 성모 성심의 스승이요, 첫 번째
사도로 불리고 있다.
그는 예수
성심 축일을 지내기 20년 전부터 그의 제자들과 함께 이미 2월 8일을 마리아 성심 축일로 지냈다(1643년).
이후 교황 비오 7세는 성모성심을 축일로 지낼 수 있도록 청하는
모든 교구와 수도 단체에 허락하였다.
1942년 교황 비오 12세는 온 세상을 ‘마리아의 무죄한 성심’에 봉헌하면서 전례등급을 올렸고,
날짜를 성모승천 대축일의
제8부인 8월 22일로 고정시켰다. 그러나 로마 전례 개혁은 다시금 지역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기념일로
환원하고,
예수 성심 대축일 다음 토요일로
고정시켰다.
축일의
의미
이
축일은 마리아의 깨끗하고 열절한 사랑의 마음속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찬미하고 주님현존의 기쁨을 축하하는 것이다.
아울러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의
마음에 주님이 거주하도록 안배하시어 거룩하게 하신
하느님을 찬미하며, 우리 자신도
하느님 영광의 살아있는 성전이 되도록 마리아께 전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과 예수님께 대한 성모
마리아의 사랑이 그 목표로서 우리도 마리아와 같은
사랑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복음: 루카 2,41-51: 소년 예수와 성모
마리아>
오늘의 복음은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전하는 유일한 자료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단순한 유년기의 예수님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이것은 파스카 신비를 완성할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님의 일생을
그려내는 루카에게 마리아가 이미 파스카 신비에
참여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 이야기는 지혜와 파스카의 특징을
드러내는 그리스도론이다.
예수님이 지혜 자체이며, 파스카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사건의
배경은 구약의 파스카 축일 / 누룩없는 빵, 포도주, 쓴나물,
구운달걀(고기대신)
구약의 파스카는 당시 예루살렘에서 지내기로 되어 있었다. 또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의무적이었는데,
아마 12살이 그 규정
나이였던 것 같다.
성전에서 학자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광경은 약의 파스카 예식에서 가장 나이 어린 사람이 파스카 예절에 관한
것을 질문하고
가장 연장자가 파스카의 역사와 의미에 대하여 설명하는 것과 비슷하다. 여기서는 학자들이 질문하고
예수께서 답하시는 것이,
예수께서 신약의 파스카의 주인공임을 드러낸다. 예수님은 율법학자들을 경탄하게 하는 지혜의 스승, 지혜자체로
보인다.
또 파스카적 용어를
통하여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신비의 고통과 기쁨을 미리 체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이야기는 부활사건과 공통점이
있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다”(2,41; 22,8.13), “사흘이라는 시간”
(2,46; 24,46),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이룰 필요성”
(2,49; 24,7)과 “이해하지 못하였다”(2,50; 24,25)는 것이다.
여기에서 사흘이라는 시간 개념은 성서에 자주 나타나는 주제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모리야 산으로 사흘 길을 걸었다. 요나는 하느님의 말씀을 이방인들에게 선포하기 위해
고래 뱃속에 사흘간 머물렀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으로부터 사흘간의 시간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이 개념은 고통의 최대치를
드러낸다. 사흘이란 의인들의 최대의 고통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사흘이란 의인들의 최대의 고통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마리아와 요셉이 사흘간 소년 예수를 찾아 헤맸다는 것은
의인으로서 최대의 고통을 겪으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이를 잃어버린 다른 어머니처럼 극한의 고통을 겪으셨다는 것을 뜻하며,
훗날 십자가의 죽음을 맞이하는 예수님의
고통을 미리 겪으셨다는것을 아울러 미리 보여주고
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성전에서 발견하고 꾸짖는 가운데 요셉을 아버지로 언급하는데 대해서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언급하고 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49절)
이 말은 예수께서 이미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의 아들임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그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51절ㄴ)는 진술은
신앙의 길을 걷는 마리아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여기서 ‘알아듣지 못함’은 지혜의 결핍이 아니라,
하느님께 열려있음, 내맡겨져 있음을 드러낸다.
이러한 신앙의 자세는 목동들이
다녀간 이야기에도 나타난다(2,19).
거기에는 이 신비를 간직한 것만이 아니라, 깊은 묵상의 자세를
보여주는 표현으로
“간직하였다”는 말이 덧붙여지고 있다.
또 이 이야기에서는 ‘찾다-발견하다.’는 신앙의 도식을 볼 수 있다.
불 신앙인은 찾아도 얻지 못하지만
신앙인은 찾으면 얻게 된다는 것이다.
주님을 열심히 찾는 마리아의 신앙을 묵상하게
한다.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또한 마리아의 신앙을 다른 각도에서
발견할 수 있다. 마리아와 요셉도 예수님을
잃어버린 적이 있다.
그러니 우리의
신앙생활도 너무나 자주 하느님을 잃어버리고 나
홀로 방황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는 그것을 나 홀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나가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우리는 마리아의 모습을
보아야 한다. 마리아는 사흘간의 고통 후에
성전에서 예수님을 다시 찾는다.
이것은 우리도 잘못하여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졌을 때에,
즉시 다른 곳에서 주님을 찾지 말고 하느님의
뜻으로, 하느님께로 되돌
아가야 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으로 다시 돌아갈 때에 비로소 주님을 다시 만날 수 있고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마리아를 따르는 자세이다.
마리아의 신앙을 본받고
따르도록 노력할 때에 우리는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을 따라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께 대한 더
완전한
사랑을 드릴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은총을 구하며 열심히 살아가도록 하자.
-성모성심 /오상선
신부님-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
6월4일
토요일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루카 2,41-51)
<걱정이
밀물처럼>
인파가 들끓는 놀이공원이나 혼잡한 길거리에서 잠시 한 눈 파는 사이에 어린 자녀들을 놓쳐 고생해본
기억이 없으십니까? 그 순간, 부모님들의 심정은 정말이지 미칠 지경이지요. 이 녀석 혹시라도 잘못되는 것은 아닌가? 유괴범에게 끌려간 것은
아닌가? 시간이 흐를수록 이러다 영영 못 찾는 것을 아닌가? 초초해짐에 따라 별의별 생각이 다 듭니다. 나중에는 욕까지 저절로 입에서 나옵니다.
저
역시 놀이공원에 아이들을 데리고 갔다가 따로 떨어진 한 아이를 찾느라 그 넓은 공원 전체를 3시간 동안이나 샅샅이 찾아 헤맨 적이 있습니다.
화가 나다 못해 나중에는 아이들 표현대로 ‘꼭지’가 다 돌더군요.
또
한 번은 법정 보호기간이 아직 끝나지 않은 몇몇 아이들과 PC방에 놀러 갔습니다. 출입문 바로 옆자리에 앉아서 열심히 게임에 몰두하고 있는데,
한 아이가 “신부님, 화장실 좀 갔다 올게요” 하더군요.
평소
같았으면, 다른 아이 같았으면, “그래, 나도 같이 가자”라고 하며 화장실 안까지 따라 갔을텐데, 워낙 신뢰심이 가는 ‘품질 좋은’ 아이였기에
“그래, 다녀와라. 째면 안된다”고 그랬습니다.
아이는
웃으면서 “신부님도 참, 제가 왜 째요?”하면서 저를 안심시켰습니다.
그런데
30초, 1분, 2분이 지나도 아이가 화장실에서 안 나오는 것입니다. 혹시? 하면서 화장실로 달려갔었는데, 이미 늦었습니다. 밖으로 난 화장실
창문을 통해 아이는 이미 자유의 몸이 되어 멀리 멀리 달아나고 있었습니다. 내려다보니 꽤 까마득한 높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과감히 뛰어내린
것입니다. 그때 당시의 배신감, 모멸감, 허탈함은 아직도 손에 잡힐 듯합니다.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부모님도 저 못지않은 체험을 하십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소년 예수와 함께 과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를 떠났습니다.
명절기간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마리아와 요셉은 소년 예수를 놓치게 됩니다. ‘아마도 친척들이나 동네사람들과 함께 돌아오겠지?’하고 하룻길을 걸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순례자들은 또래의 다른 순례자와 더불어 하나의 큰 카라반(그룹)을 이루어 여행하곤 했습니다.
12살
정도의 소년이었다면 부모와 떨어져 또래의 다른 친구들이나 친척들과 함께 여행을 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와 요셉은 하루 온 종일을 아무 염려
없이 여행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만 하루가 지나서야 마리아와 요셉은 일행 중에 소년 예수가 없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깜짝
놀란 마리아와 요셉은 걱정이 밀물처럼 밀려왔습니다.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겠습니다. 혹시 이집트 상인들의 꼬임에 넘어가 머나먼 나라까지 노예로
팔려가는 것은 아닌지? 노심초사하며 마리아와 요셉은 이곳저곳 기웃기웃,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가며 예수살렘을 향해 왔던 길을 되돌아간
것입니다. 침식을
잊고 사흘 밤낮을 헤매 다닌 끝에 겨우 소년 예수를 찾게 된 마리아와 요셉은 아들을 되찾았다는 기쁨도 컸지만, 태연히 성전에 앉아있는 소년
예수를 보고 있노라니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소년 예수에게 힐난조로 말합니다.
“애야,
왜 이렇게 우리를 애태우느냐? 너를 찾느라고 아버지와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부모된
도리로서 어린 자녀가 행방불명되었는데, 아이를 찾아 헤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소년 예수는 당돌하게도 이렇게 응대합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소년
예수의 이 답변은 너무도 심오한 답변이요, 영적인 답변이자 메시아로서의 답변이었기에 마리아와 요셉은 그 뜻을 알아채지 못합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여기서
소년 예수의 답변은 자신과 부모와의 단절을 암시합니다.
언젠가
소년 예수는 지상의 아버지 집을 떠날 것을 미리 암시합니다. 언젠가 인간 예수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순명하기 위해
육신의
굴레를 벗고, 혈육을 떨치고, 더 큰 세계로 나아갈 것을 예표합니다.
오늘
우리는 마리아의 태도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마리아는
아들 예수로 인해 많은 고통을 겪으신 분입니다. 이해하지 못할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이웃들로부터 오해도 엄청 받았습니다. 인간적
아쉬움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그 모든 것이 아들 예수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그때
마다 마리아는 인간적 섭섭함과 아쉬움을 접습니다. 머리를 들어 하늘을 향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찾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자신을
통해 이루어지도록 끊임없이 자신을 비우고 낮춥니다.
그때
마다 마리아는 수시로 떠오르는 인간적 욕구를 접었습니다. 매일 사사로운 감정을 떨치고 매일 일어섰습니다. 매일 마음을 단단히 다잡고,
매일 새 출발했습니다. 이런 마리아였기에 그를 두고 참 신앙인, 신앙인의 모범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편집 : 불광동성당
미디어팀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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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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