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월 공동체 형제들과 함께 강화도 갑곶성지를 순례하면서 월피정을 했습니다. 십자가의 길 기도를 시작하는 어귀에 나무로 만든 십자가가 여러 개 있었습니다. 크기도 제각각 무게도 조금씩 다른 십자가는 순례자들이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할 때 각자의 기도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준비해 둔 것이겠지요.
여러 개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잠시 고민을 했습니다. 과연 나한테 맞는 십자가는 어떤 것일까. 안일한 마음으로 보다 작고 가벼워 보이는 십자가에 자꾸만 눈길이 머무릅니다.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라고 약속하고서는 정작 내가 짊어져야 할 무거운 십자가는 외면합니다. 작고 가벼운 십자가를 지고 그래도 무겁다고 투덜대며 짊어지는 흉내만 내는 사이, 정작 무거운 나의 십자가는 주님께서 대신 지고 계심을 늦게서야 깨닫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 자신이 참으로 부끄럽게 여겨집니다.
나의 십자가는 주님께서 주신 또 다른 선물임을 깨닫고 충실하게 십자가를 지자고 스스로 다짐하지만 종종 나의 십자가를 의식적으로 외면하던 저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내일은 제 십자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크게 이름을 새겨 놓아야겠습니다. 다른 분이 대신 지고 가지 못하게 말입니다.
사랑의 주님 ! 저의 죄를 용서하시고 사랑하기 때문에 무거운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를 향하시던 주님, 성모님과 만나시고 애처로운 마음으로 성모님을 위로하시던 주님의 선한 눈빛을 언제나 제 마음속 깊이 간직하게 하소서.
이은명 수사(천주의 성요한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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