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사십 일을 단식하시고 유혹을 받으신다
마태오 복음. 4,1-11/사순 제1주일
유혹, 그 뿌리 깊은 영혼의 적
예수님 또한 우리 보다 앞서 갖가지 유혹을 당하신다.
그 옛날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고 그 유혹에 넘어간 것과 달리 예수님은 유혹을 물리침으로써 제2의 아담의 모습을 보여주신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당하신 유혹의 본질은 무엇인가?
첫째는, 식욕이다. 단식으로 허기져 있을 때 가장 큰 유혹은 음식의 유혹이다. 마귀는 바로 빵으로써 예수님을 유혹한다. 식욕은 이렇게 모든 유혹의 첫 번째의 것이다.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는 사람은 수도자 자격이 없다>고 하신 어떤 성인의 말이 기억난다. 40대에 가장 신경 써야 할 미덕이 <절제>라고 읽었다. 사실 소식하고 음식을 절제할 수 있어야만 모든 욕심에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사순절은 이렇게 우리에게 식탐에서 해방되어 영적투쟁을 시작할 수 있는 기초를 제공해 주기에 거룩한 시기이다.
둘째 유혹은 소유욕이다. 음식으로 배가 부르게 되면 그 다음으론 소유욕이 발동한다. 우리가 배고플 때는 없이도 잘 살았는데 먹고 사는 것이 해결되니 엄청난 소비주의가 발동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식욕이 채워지면 자연스럽게 소유욕으로 넘어가게 된다. 소유욕은 끝이 없다. 비단 큰 집이나 자동차, 물건 등에 대한 소유욕만이 아니라 자식이나 사람에 대한 소유욕도 문제이다. 50대는 특히 이 소유욕을 극복해야 한다고 한다. 이러한 소유욕에서의 해방을 통해 더욱 영적으로 성숙해지는 50대 신자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셋째 유혹은 권력욕(명예욕)이다. 사람이 먹는 것이 해결되고 덧붙여 돈도 많이 벌어 가질 것은 다 가져보고 나면 마지막으로 발동하는 것이 이 권력욕(명예욕)이다. 한국의 정치가들을 보라! 대부분이 이런 전철을 밟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런 정치가들이 내가 아니면 안된다고 하는 노름에 기대할 필요도 실망할 필요도 없다. 탐욕 덩어리의 사람들 앞에서 나라와 국민을 위한 정치란 사실 기대할게 못된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돈많은 신자들이 교회 안에서도 무슨 장(長)자리라도 하나 해보려고 덤비는 미성숙한 모습들을 우리 주위에서 자주 보게 된다. 이러한 미성숙한 욕심을 지닌 장을 맡은 신자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교회는 이상한 방향으로 가게 되고 이들이 그 장 자리에서 밀려나게 되면 이상한 싸움을 벌이기도 한다. 특히 60대 신자들이 조심해야 할 유혹이다.
자,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모범을 보이시기 위해 유혹을 받으신 것은 아닐까? 우리가 당하게 될 유혹들을 미리 보여주시고 어떻게 이런 유혹을 물리쳐야 하는지 그 본보기를 보여주신 것은 아닐까?
이 유혹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가운데 자리하고 있음을 무서워해야 한다. 내 안에 어떤 유혹이 이미 도사리고 있는지 잘 살펴보자.
나는 어떤 음식이든지 정말 감사하는 마음으로 음미하며 먹고 있는가? 쓸데없는 음식투정을 부리거나 맛있는 음식만 먹으려는 미식가, 탐식가는 아닌가?
내가 갖고 싶어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때문에 안달하고 있지는 않은가? 정말 없어도 될 것인데도 소유욕 때문에 쓸데없는 것들을 너무도 많이 사들이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남들보다 윗자리에 앉으려 하지 않는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회장님, 단장님 등 장 소리를 듣기를 바라지 않는가? 그리고 그런 상류층의 부류에 속하기를 바라고 아니 그런 이들과 친분을 갖는 것만으로도 내가 높아졌다고 여기지는 않는가?
우리가 이런 상태로 살아간다면 그것이 바로 아담과 하와가 빠졌던 그 뱀의 유혹에 다시 빠지는 길이고 이것을 의식하고 과감히 물리칠 때 예수님처럼 새로운 하느님 나라를 열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느님 나라는 이러한 욕심이 없는 나라이리라. 그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우리 크리스천들의 소명이라면 우리 먼저 이러한 욕심에서 벗어나야 하리라. 아멘.
-오 상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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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을 지킨 가정부
스위스의 교육 개혁가인 페스탈로치가 어렸을 때 사회는 정치가들의 싸움 때문에 몹시 어지러웠고, 촌은 피폐하였고 도시는 타락해 있었다.
그 와중에도 그의 아버지는 정직한 의사로서, 돈을 벌기 보다는 고통스러운 환자를 치료하느라 늘 바다. 자신의 몸은 돌보지 않고 환자의 치료에만 정신을 쏟던 그의 아버지는 그만 병을 얻어 자리에 눕게 었다.
온 식구들이 한 곳에 모여 있을 때 아버지는 개미만한 목소리로 바아베리를 불렀다. “네, 어르신.”
가정부였던 바아베리가 아버지 곁으로 다가갔다. “바아베리, 내 가족들을 지난날처럼 앞으로도 잘 돌봐주길 바래.” 아버지의 들릴 듯 말듯 한 말에 그녀는 “네, 그렇게 하고말고요. 약속하겠습니다.”하고는 앞치마에 눈 을 닦았다.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가족들을 둘러보시더니 눈을 감았다. 그때 페스탈로치의 나이 다섯 살이었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동안 바아베리는 진심으로 슬퍼하며 가족들을 도왔다. 그러나 가족들은 일시 인 현상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넉넉지도 않은 이 집에 남아서 궂은일을 하겠어요?” 모두들 수군거렸지만 아직 처녀인 그녀는 묵묵히 일했고, 어린 페스탈로치를 친동생처럼 보살펴 주었다.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바아베리를 가족처럼 여기며 생활하던 페스탈로치는 자라면서 가슴에 소중한 꿈을 키워갔다. “사회는 타락했지만 바아베리처럼 훌륭한 사람은 얼마든지 많을 거야. 나도 어려운 사람을 위해 일생을 바칠 거야.”
그는 인생의 목표를 세웠고 그 목표엔 변함이 없었다. 어른이 된 그는 타락한 사회의 병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은 정치, 경제도 아닌 교육에 있다는 것을 깨 고 아동들을 구원하려는 교육 개혁에 일생을 바쳤다.
그가 이렇듯 교육에 헌신할 수 있었던 것은 바아베리라는 가정부의 숭고하고도 희생적인 모습을 보며 자랐기 때문이다.
([좋은 생각]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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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주님께서 앞장 서 가셨으니
저도 그 뒤를 따르렵니다.
이겨낼 수 있을 만큼 주시는 고통을
떨쳐버리려 애쓰지 않게 하시고,
주님께서 제게 맡기신 역경들을
정화되고 승화되는 계기로 삼게 하소서.
주님,
주님께서 성령과 일치하셨듯이
제게도 성령을 보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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