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사순 제2주일 2011년 3월 20일)
작성자강점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1-03-18 조회수516 추천수4 반대(0) 신고

사순 제2주일 2011년 3월 20일


마태 17, 1-9.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모습이 영광스럽게 변한 이야기였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 초기 신앙인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하였는지를 알리는 한 폭의 그림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높은 산에 올라가 있습니다. 높은 산은 구약성서에 하느님이 당신을 나타내는 장소입니다. 이스라엘의 신앙 초기에 모세도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을 뵈옵고, 그분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에는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함께 있습니다. 신앙인들이 모세와 엘리야의 노선에서 예수님에 대해 이해하였다는 말입니다. 


모세는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 대해 깨닫고, 그 함께 계심을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사람들에게 알렸습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 나타났던 예언자들의 대명사입니다. 이스라엘이 모세가 알려준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다른 길로 들어섰을 때, 나타난 예언자들입니다. 예언자는 이스라엘이 잘못된 길을 버리고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게로 돌아오라고 부르짖은 이들입니다.


오늘의 이야기에서 예수님의 ‘얼굴이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는 것은 구약성서가 말하는 모세의 모습(탈출 34, 29-30)입니다. 모세가 하느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을 때, 그 얼굴이 환하게 빛났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모세를 통해 하느님과 함께 살기 위한 법이 주어졌듯이, 예수님을 통해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새로운 삶의 방식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오늘 복음은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는 말씀이 들렸다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메시아, 곧 구원자라고 말하기 위해 복음서들이 자주 사용한 표현입니다. 이 표현도 구약성서의 여러 문서(시편2,7; 이사야서42,1; 신명 18,15)에서 가져와 합성한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메시아인데, 그 시대 유대인들이 기대하던, 영광스럽게 군림하는 메시아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의 새로운 계시가 주어졌고, 우리는 그분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보고 듣는다는 말입니다.


모세는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계신 사실을 깨달은 후, 그 함께 계심을 살기 위한 지침으로 율법을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모세의 그 깨달음을 이어 받아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사는 우리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새 율법을 주지 않고,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분의 생명을 당신이 살아서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의 삶 안에 어떻게 오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하느님의 생명은 자비와 사랑입니다.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이 사랑하라는 계명 하나를 주셨다고 말합니다. “내가 명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서로 사랑하시오.”(15,17). 하느님의 생명을 살기 위해 주어진 단 하나의 법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예언자와 같은 분이기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키고 제물을 봉헌하기에 정신을 빼앗겨,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잊어버렸을 때, 이스라엘 안에 나타나서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에 우리가 어떤 실천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친 예언자들입니다. 예수님도 율법과 제물봉헌을 넘어서 하느님이 우리 생명의 원동력, 곧 아버지로 살아계시게 하는 삶을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 법을 어기면서 사람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아 혹은 제물 봉헌을 하지 못해, 율사와 사제들이 죄인이라 낙인찍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죄의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지키고 바쳐야 한다고 가르치던 유대교 지도자들의 눈에 예수님은 거짓 예언자였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목숨을 잃었습니다. 과거 구약의 예언자들이 하느님을 말하다가 목숨을 잃은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초막 셋을 지어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에게 각각 하나씩 드리고, 그곳에 함께 머물자고 제안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데리고 산에서 내려오면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예수님에 대한 인식은 모세와 엘리야를 안다고 다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모세와 같고, 또 예언자와 같은 분이지만, 그분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셔서 부활한 분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계획이 좌절될 때도 하느님을 부르면서, 그분의 뜻이 이루어 질 것을 빌며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모세와 예언자들의 가르침에서 이해되는 분이지만, ‘내어주고 쏟으신’ 그분의 죽음까지 포함해서 알아들어야 하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이 하신 기적에 놀란 사람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이 자비와 사랑이라는 사실에 놀란 사람입니다. 그리고 자기도 그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여 그분의 자녀 되어 살겠다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그 실천이 비록 힘들고 십자가와 같이 고통스러워도, 예수님을 기억하며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르기 위해 노력하는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자기 한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인 양 착각하기도 합니다. 그런 착각에서 오만과 횡포와 미움이 발생합니다. 우리는 하느님도 벌주고 복수하신다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벌주고 싶고, 복수하고 싶은 우리의 마음을 담아 우리가 상상하는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이 계명을 주고 그것을 어떻게 지키는지를 감시하신다고 우리는 상상합니다. 이 세상의 권력자들이 하는 일에 준해서 하느님을 착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의 자유행사를 불쾌하게 생각하신다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이 세상의 지배자들이 사람들의 자유를 두려워하는 것을 보고, 그들에 준해서 하느님을 상상한 것입니다.


우리는 미워하고 횡포하지만, 하느님에게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각자 자유롭게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당신도 섬기는 사람으로 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루가 22, 27). 그 섬김의 결말이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우리도 사랑할 때, 사랑하는 사람을 섬깁니다. 우리도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섬김을 실천할 때, 비록 그것이 고달파도,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체험합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차이는 기쁜 소식입니다. 하느님은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으신 예수님 안에 당신의 자비와 용서를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소중히 생각한 나머지 이웃에게 기쁜 소식이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배워서 우리도 이웃에게 기쁜 소식이 되게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고, 용서하고, 섬겨서 기쁜 소식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하느님의 자녀가 가야 하는 길입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