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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사순 제3주일 2011년 3월 27일).
작성자강점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1-03-25 조회수429 추천수6 반대(0) 신고

사순 제3주일   2011년 3월 27일


요한 4, 5-42.


요한복음서는 제3장에서 니코데모를 등장시켜 세례에 대해 설명하였습니다. 사람은 세례로써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니코데모는 다시 태어난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복음서는 ‘땅의 일’과 ‘하늘의 일’이 다르다고 말합니다(3,12). ‘땅의 일’만 아는 니코데모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13)이고 세례는 ‘땅의 일’이 아니라, ‘하늘의 일’, 곧 하느님의 생명 안에 다시 태어나는 일이라고 복음서는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이 세례에 대한 말씀에 이어서 나오는 요한복음서 제4장입니다. 여기서는 사마리아 여인을 등장시켜 물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물을 위해서도 ‘땅의 일’과 ‘하늘의 일’이 다릅니다. ‘땅의 일’로서 물은 사람이 마셔서 갈증을 해소하는 음료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일’로서 물은 세례에 사용되는 것으로, 신앙인 안에 샘을 이루고 솟아나는 성령을 상징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물에 물을 길으러 온 사마리아 여인에게 마실 물을 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여인은 ‘땅의 일’로서 물밖에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일’로서의 물을 말씀하십니다.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마실 물을 좀 다오.”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를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였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여인은 반박합니다. ‘두레박도 가지고 계시지 않고 우물도 깊은데, 어디에서 그 생수를 마련하시렵니까?’ 여기서 예수님이 생수, 곧 생명의 물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늘의 일’로서의 물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이 베푸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그 여인이 예수님에게 하늘의 일로서의 물, 곧 성령을 청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 물은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푼다고 요한복음서(1,33)는 일찍이 말한 바가 있습니다.  


이 여인은 ‘하늘의 일’로서 물의 의미를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자기의 과거를 알아맞히자, 그는 즉시 예수님을 예언자라고 말합니다. 그는 예수님 안에 어떤 신통력(神通力)을 본 것입니다. 여인은 예수님에게 예배할 장소에 관해 묻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사마리아에 있는 그리짐 산에서 하느님께 예배드렸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사람이 마시는 물은 알아도, 세례와 성령에 대해서 모릅니다. 이 여인은 먹고 마시는 ‘땅의 일’밖에 모릅니다. 먹고 마시는 일을 넘어서 열리는 세계, 곧 세례로 열리는 하느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하시는 일의 세계를 모릅니다. 


이 여인이 관심을 보이는 것은 예수님이 가진 신통력과 사람들이 예배할 장소입니다. 우리도 신통력, 곧 초능력을 좋아합니다. 용하다는 철학관을 찾기도 하고, 유명하다는 지관(地官)의 도움을 받아 조상의 묘 자리를 선택하여 자손의 부귀영화를 꾀하기도 합니다. 종교를 빙자하여 병을 고치고, 기적을 행한다는 사람들은 어디서나 인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디서 기도해야 영험한 효과를 얻을 수 있는지도 생각합니다. 루르드, 파티마, 메주고리에를 비롯해서 국내에도 그런 곳을 모방하여 만들어진 장소들이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이 성황당(城隍堂)이나 산에서 복을 얻겠다고 빌던 것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그리스도 신앙은 초능력을 탐하거나 하느님에게 기도하여 땅의 일을 위해 더 많은 혜택을 얻어내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늘의 일’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느님이 베푸시는 분이라, 성령도 우리 안에 베푸시는 생명으로 살아계십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율법을 잘 지키고, 제물을 잘 바치면,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얻어내어, 잘 살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이용하여 땅의 일에 성공하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 되어,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스스로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고 믿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그분의 생명이 하시는 베풂과 섬김과 사랑을 스스로 실천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예배 장소를 묻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배 장소에 대한 정보를 주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진실한 예배가 무엇인지를 말씀하십니다.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영과 진리에 대해서 요한복음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이 오시면 “내가 여러분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해 주실 것입니다.”(14,26). “그분이 오시면 모든 진리 안에 인도하실 것입니다.”(16,13). 초기 그리스도 신앙인들의 믿음 안에 성령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일을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예수님에게서 배운 진리를 실천하게 하십니다. 흔히 생각하듯이 성령은 신통력이 아닙니다. 우리를 놀라게 하는 기적, 곧 땅의 일을 발생시키는 초능력이 아닙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실천을 우리에게 상기시키며, 우리로 하여금 같은 실천을 하게 합니다. ‘하늘의 일’을 하게 하시는 성령입니다. 신앙인의 참다운 예배는 영과 진리 안에 있습니다. 당신 스스로를 베푸신 예수님의 삶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 보였던 섬김과 사랑이 하느님의 진리입니다. 우리는 그 진리를 배우고 실천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바로 그 진리를 발생시키는 원동력인 하느님의 숨결이십니다.


우리가 흔히 염원하고 욕심내는 것은 땅의 일입니다. 우리는 노력하여 그것을 얻고 우리의 뜻을 이루며 삽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한 우리의 노력을 ‘하늘의 일’과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서가 말하는 ‘하늘의 일’은 이웃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을 외면하면 할수록, 하느님에게 가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은 그분의 다른 자녀인 이웃을 사랑합니다. 섬김과 사랑은 이론이 아닙니다. 이웃을 위해 섬김과 사랑을 실천하면서 비로소 하느님이 우리에게 어떤 사랑이신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복음이 말하는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드리는 참다운 예배’입니다. 참다운 예배가 있는 곳에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의 하느님이십니다. 이웃보다 더 잘 살고, 더 잘 되겠다는 것은 우리의 욕심입니다. 이웃을 섬기는 우리의 마음 안에 하느님의 숨결이 살아 계십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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