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티 성지 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편안하셨습니까?
목감기가 걸려서 말이 잘 안 나옵니다.
목소리가 이상하지요?
성인들을 보면 두 종류인 것 같습니다.
처음부터 성인의 싹이 보이는 분, 이 성당 1대 신부님이신 임 가밀로 신부님은
어려서 어머니 손잡고 루르드성지를 왔다 갔다 하면서 성모님께 기도드렸습니다.
첫영성체 때 소원이 첫째가 성인사제 되게 해 달라고 하셨고
둘째는 사도요한께서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시었듯이
나도 죽을 때까지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실 수 있게 해 달라고 하셨답니다.
이렇게 어려서부터 이렇게 성인 될 기질이 보이는 성인이 있습니다.
그러나 개망나니로 살다가 하느님을 만나
극적으로 회개하여 성인이 되신 분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우구스티노 같은 성인입니다.
성인은 머리가 총명하고 똑똑하기는 했지만 사교에 빠져서 헤매고
15~6세 때는 가정부를 건드려 사생활이 문란했지만
어머니의 눈물어린 기도와
암브로시오성인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여 성인이 되신 분입니다.
사도 바오로도 원래는 사울이었죠?
바오로는 천주교신자를 잡아 죽이던 사람이었는데
다마스커스에서 예수님을 만나면서 말에서 떨어집니다.
하느님을 만나면 말에서 떨어져야 합니다.
말에서 떨어지지 않으면 절대 하느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사울은 눈이 안 보였지만 나중에 아나니아를 만나 눈을 뜹니다.
이렇게 아주 어렸을 때부터 성인이 될 성 싶은 사람도 있고
그야말로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성인으로 변해가는 분이 있는데
여러분은 어느 쪽이 더 정감이 가고 편하게 느껴집니까? 후자가 아닐까요?
‘어린 애가 어쩜 저런 생각을 할까!’
어린애답지 않을 때 좀 섬찟한 생각도 들지요.
그런데 엉터리로 살다 성인 된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이 성인이 되었다면 나도 희망이 있다...
지금은 내가 비록 바닥에서 헤매지만~~
나도 언젠가 하느님께서 사람 만들어 주시겠지....’
가톨릭은 죄인이 성인 되는 종교입니다.
구약의 인간(유대인)들은 자기네들을 의인으로 착각하였습니다.
나는 의인 쪽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며
운동장에 줄을 긋고 한 쪽은 의인... 한 쪽은 죄인... 한다면~~
스스로 의인 쪽으로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백성들은 모두 다 죄인입니다.
사제도 수도자도 모두 죄인입니다.
우리 성당에 ‘나 정도만 돼 보라지...’ 이렇게 교만을 떨면서
몸뚱아리는 신약에 살면서
사고방식은 여전히 구약시대에 사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죄인이었다가 의인이 된 성인 중에 프란치스코성인이 있습니다.
그 분은 쓰러져가는 교회를 쇄신했으며
예수님의 오상의 상처를 받으신 분이십니다.
아버지는 큰 상인이셨고, 세상 부족함 모르고 개망나니로 살았지만
하느님을 만나서 바뀐 겁니다.
프란치스코가 착하게 살려고 결심하는 순간부터
그에게 시련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추운 겨울 날 재워달라는 나환자를 끌어안고 잔 징표로서
예수님께서 남기고 간 성부, 성자, 성령을 나타내는 세 송이의 장미~~
그 사건은 프란치스코가 완덕으로 나아가
성인의 길로 올라가기 위한 첫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그 인간 얼굴만 떠올리면 3년 전에 먹은 미역건더기가 올라오는 인간이 있지요?
그 인간 끌어안는 것이 예수님을 끌어안는 겁니다.
피정지도신부님께서 “예수님 만나 보셨어요?”
..........
그럼 성체 안에 누가 계시지요?
예수님은 말씀으로, 성체로 오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려고 하지만.....
예수님께서 실크 원피스를 입으시고 쌍꺼풀 진 눈에
온유한 모습으로 오셔서
“얘야, 내가 예수다!” 이럴까요?
예수님을 그토록 만나고 싶어하면서
이제까지 한 번도 못 만났다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 앞을 이미 수백번 지나가셨습니다.
때론 나병환자로~~
감옥에 갇힌 모습으로~~
죽이고 싶은 웬수로~~
소년원에 드나드는 나의 아들이~~
돈 떼먹고 간 죽일 놈이~~
모두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초라한 모습으로,
때론 웬수로... 그렇게 오시기에
나쁜놈, 죽일 놈.....하면서 한 번도 예수님을 끌어안지 못한 겁니다.
오늘이라도 그 인간 끌어안으십시오.
하느님께서 “너희는 내 아들 예수의 말을 잘 들어라!”
우리는 행동하기 전에 예수님의 말을 잘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진짜 잘 살려고 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의 삶은 명예와 거리가 멀어지고 고통스러워지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우리 크리스찬의 실존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신 이유는
우리가 떼려야 뗄 수 없는 십자가때문입니다.
이 세상 수난과 죽음 없이 예수님은 없습니다.
수난과 죽음을 체험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아름답게 변화된 모습을 보여 주시며
“너희도 부활할 때 그런 모습이 될 것이다!” 하십니다.
우리가 힘들고, 두렵고, 절망의 끝에 있을 때...
용기와 힘을 내어라!
나도 그보다 더 큰 고통 속에
십자가 위에서 죽게 되지만
내가 부활하듯이 너희도 부활하게 될 것이다.
세상이 몸뚱아리 중심으로 산다면
절대 골고타 언덕으로 십자가를 끌고 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번도 넘어지지 않고
휘파람을 불며 골고타 언덕으로 올라가지 않으셨지요?
하느님도 세 번 넘어지셨는데 우리가 넘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올라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용기를 주십니다.
예수님을 만나려면
첫째, 프란치스코처럼 끌어안아야 합니다.
둘째.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가 돈, 내 몸뚱아리, 교만, 내 명예, 늘 편한 것을 찾는다면~~
초라하게 나타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이번 주도 예수님께서 나타나실 것입니다.
그 예수님 끌어안고 거룩한 사람이 됩시다. 아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 카페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