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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사순 제4주일 2011년 4월 3일).
작성자강점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1-04-01 조회수472 추천수8 반대(0) 신고

사순 제4주일 2011년 4월 3일 


요한 9, 1-41


오늘 복음은 태어나면서부터 시각 장애를 가진 사람이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누가 죄를 지어서 저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나게 되었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혹은 저 사람의 부모입니까?’ 유대교는 인간의 모든 불행은 본인이나 부모의 죄 때문에 하느님이 주신 벌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답하십니다. ‘자기 죄 탓도 아니고 부모의 죄 탓도 아니다. 다만 저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그런 불행의 원인일 수 없다고 생각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은 그 소경을 고칩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일입니다. 불행의 원인을 찾지 않고, 그것을 퇴치하는 인간의 노력 안에 하느님이 살아 계시다는 가르침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시각 장애인을 고치는 과정을 소상하게 묘사합니다. 예수님은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개어서 그것을 그의 눈에 바릅니다. 침은 그 시대 사람들이 잘 사용하던 치유의 수단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침을 사용하였다고 오늘 복음이 말하는 것은 치유하신다는 뜻입니다. 진흙이라는 단어가 이 이야기 안에 다섯 번이나 반복 사용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율법은 안식일에 진흙을 만지지 말라고 말합니다. 집 짓는 노동을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진흙이라는 단어를 반복 사용하여 예수님이 안식일 계명을 범한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주려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그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으로 보아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판단입니다. 오늘의 복음은 바리사이파가 믿는 하느님과 예수님이 믿고 계신 하느님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바리사이파의 하느님은 사람들에게 율법을 주고, 그것을 글자 그대로 지킬 것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사람들을 고치고 살리신다고 믿고 계십니다. 안식일은 하느님을 생각하고, 그분의 일을 실천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은 이 장애인을 실로암 못으로 보내어 씻게 하십니다. 요한복음서는 실로암이라는 단어를 ‘파견된 자’를 의미한다고 그 어원(語原)을 무리하게 해석까지 하면서, 그것이 예수님을 상징하는 이름이라고 말합니다.


이 장애인이 치유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은 매우 요란합니다. 바리사이들은 그의 부모까지 불러서 심문합니다. 부모는 겁에 질려 제대로 말하지도 못합니다. 오늘 복음은 ‘유대인들은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기만 하면 회당에서 추방하기로 이미 합의하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장면은 초기교회 신앙인들이 유대인 회당에서 쫓겨난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이었던 초기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유대교 회당에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구약성서가 말한 메시아라고 주장했다가 회당에서 추방당합니다. 시각 장애인이 치유되자, 당시의 실세인 바리사이파가 그에게 거는 시비와 억지, 불려온 그의 부모가 심문당하면서 보이는 두려움, 그리고 치유된 사람이 예수를 예언자라고 말했다가 추방당하는 것 등은 모두 초기교회가 유대교에서 분리되는 과정에 실제로 겪었던 사실들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이 안식일 계명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으로부터 온 사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복음서는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부언합니다. 좋은 일은 하느님으로부터 온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대교 기득권자들은 예수를 죄인이라고 단정합니다. 시각 장애에서 치유된 오늘의 주인공은 항의합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모세의 제자’라고 주장합니다. 유대교의 기득권자들은 자기들의 생각을 모세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강요하였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어떤 권한을 가졌다고 생각하면, 자기의 생각을 남에게 강요합니다. 그리고 그 강요를 정당화하기 위해 모세, 예수님 혹은 하느님을 팝니다. 신앙 공동체에 어떤 기득권을 가졌다는 사람들이 오늘도 쉽게 하는 일입니다. 사람은 예나 오늘이나 자기의 기득권 혹은 우월함을 드러내기 위해 위인(偉人) 혹은 하느님을 팔아서 횡포하고 허세를 부립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장애인이었던 사람에게 말합니다. ‘너는 죄를 뒤집어쓰고 태어난 주제에 우리를 훈계하려 드느냐?’ 그 시대 유대인들이 장애를 가진 자들을 보는 시선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장애를 가진 이들을 고쳐주면서 그들을 돕는 것이 하느님의 일이라고 가르쳤습니다. 하느님은 인간 신분의 높고 낮음, 장애의 유무(有無) 등으로 인간을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복음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하늘나라에 들어가고”(마태 7,21),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이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7,24)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마르 3,4)도 말합니다. 사람을 단죄하고, 실망시키고, 고통과 슬픔을 주는 일은 우리 안에 자리 잡은 어둠, 곧 죄가 하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의 장애인은 예수님이 시력을 회복해 주자 예수님을 예언자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많은 사람들은 그분을 예언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시각 장애에서 치유된 오늘의 주인공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죄인이라고 단정하는 것에 항의합니다. ‘그 분은 제 눈을 뜨게 해 주셨기에...하느님으로부터 온 분입니다.’ 그 말 때문에 그는 결국 회당에서 쫓겨납니다.


이 사람은 후에 예수님을 다시 만납니다. 그리고 ‘주님,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면서 ‘예수님 앞에 꿇어 절합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알아보고, 그분을 믿는다고 고백하며 무릎 꿇은 그리스도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유대교와 결별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알아보고 고백하였습니다. 요한복음서는 이런 신앙인들을 위해 “나를 본 사람은 이미 아버지를 본 것”(14,9)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눈멀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결론짓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새로운 시력을 얻어서 하느님을 보고 경배하는 그리스도 신앙인이라는 말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단죄하고 불행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자기 주변을 새롭게 보는 사람입니다. 이웃의 불행을 보면서 그것을 퇴치하기 위해 자기가 할 일이 있다는 사실까지를 보는 사람입니다. 주변의 불행들을 퇴치하고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권위로써 스스로를 무장하고, 다른 사람을 단죄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고치고 살리는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면서 십자가를 집니다.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할 일은 사람을 불행에서 구하고 살리는 일입니다. 우리의 그런 노력들 안에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십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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