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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Fr.조명연 마태오]
작성자이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11-04-03 조회수1,117 추천수12 반대(0) 신고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1년 4월 3일 사순 제4주일
 



I came into this world for judgment,
so that those who do not see might see,
and those who do see might become blind.
(Jn.9.39)
 
 
제1독서 1사무16,1.6-7.10-13
복음 요한9,1-41

아프리카에 극심한 가뭄이 들어서 동물들이 죽어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배고픈 사자 앞에 작은 토끼가 나타났습니다. 과연 이 사자는 이 토끼를 어떻게 했을까요? 배가 고프니 ‘이게 웬 떡이냐?’하면서 확 잡아먹었을까요? 이것이 일반적인 우리들의 예상이지요. 그런데 뜻밖에도 사자는 이 토끼를 잡아먹지 않고 함께 살더라는 것입니다. 동물학자들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외롭기 때문에 함께 지내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라고…….

이 세상은 나 혼자서는 죽어도 살 수 없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혼자서 사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지, 자기만을 세상에 들어내려 하고 그래서 다른 이들을 쉽게 판단하고 단죄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런 이야기도 생각납니다.

어떤 권투선수가 친구와 차를 타고 가고 있었어요. 그런데 앞에서 사고가 나는 바람에 급정거를 하게 되었지요. 다행히 앞차와 부딪히지 않고 멈춰 설 수는 있었지만, 문제는 뒤따라오던 차였습니다. 그 차는 미처 앞 차의 급정거에 대비하지 못해서 들이받고 말았습니다. 뒤차에서 내린 운전자는 잔뜩 화가 난 얼굴로 권투선수에게 다가와 말합니다.

“너 도대체 운전을 할 줄 아는 거야 모르는 거야? 그렇게 갑자기 서면 어떻게 해! 운전을 못하면 차를 가지고 나오지 말아야지.”

화가 난 운전자는 이 권투선수에게 온갖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그런데도 권투선수는 묵묵히 듣고만 있다가 그 운전자가 자리를 뜨자 태연하게 자신의 차로 돌아왔어요. 그 모습을 보던 친구가 참을 수 없다는 듯 분통을 터뜨리며 말해요.

“자네 왜 아무 말도 안하고 있나? 자네 정도면 그 사람을 한 방에 눕힐 수도 있잖아. 본때를 보여 줘야지!”

그러자 가만히 웃고 있던 권투선수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조금만 참으면 그 상황은 지나가기 마련이네. 내가 그 상황에서 주먹으로 맞서야 할 이유가 뭔가? 누군가 테너 파바로티를 욕한다고 해서 파바로티가 그 사람 앞에서 노래 한 곡을 뽑아야 하는 건 아니잖아?”

이 세상에서 필요한 것은 힘으로써 그리고 말로써 이기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익히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을 통해 어떤 것에 관심을 두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바로 구원입니다. 태생 소경의 죄의 원인을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 점을 분명히 하시지요.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

그 하느님의 일을 드러나게 하도록 하는 것, 즉 우리들의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일지라도 치유를 해주십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바리사이들의 반응입니다. 그들은 무조건 이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이기기 위해서 소경에게 꼬치꼬치 캐묻고 더 나아가서는 회당에서 쫓아내기까지 합니다. 자신들의 승리를 위해서 다른 사람의 자리를 빼앗는 이기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함께 살아가는 방법, 다시 말해서 함께 주님 안에서 구원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떠올려 봅니다. 어떻게든 이기기 위해서 꼬투리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바리사이들의 모습, 공동체에서 쫓겨날까봐 진리라 할지라도 말하지 못하면서 자신의 입장 표명을 꺼리는 태생 소경의 부모, 그러나 끝까지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는 태생 소경.

우리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오늘 밤은 삶의 위안인 가족과 함께 합시다. 



 

짧고도 멀고 멀고도 짧은 길(‘날마다 행복해지는 책’ 중에서)

한 나그네가 도시를 찾아 시내를 향해 가는 길이었습니다. 이마에 땀이 맺힐 즈음 멀리 도시의 건물들이 바라보이는 갈림길에 이르렀습니다.
 
한 쪽 길은 걷기가 쉬워 보였고 다른 길은 자갈길이었죠. 나그네는 어느길로 가야 할지 망설이다 근처 나무 그늘 아래에서 놀고 있는 소년에게 물었습니다.
 
"얘야, 어느 길로 가면 저 도시로 갈수 있니?"
 
소년은 "양쪽 다 시내로 가는 길이에요." 하고 대답했습니다.
 
나그네는 소년의 말을 듣고는 또 물었습니다.
 
"그럼 어느 길로 가면 빨리 갈수 있지?"
 
소년은 대답했지요.
 
"이쪽 길은 짧고도 멀고 저쪽 길은 멀고도 짧아요."
 
나그네는 소년의 말을 듣고 '어느 길로 가든 별차이 없다는 뜻일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나그네는 편해 보이는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 길은 걷기도 편하고 그대로라면 이내 시내에 닿을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시내를 눈앞에 두고 갑자기 길이 끊기고 말았습니다. 넓은 하천과 과수원으로 길이 가로막혀 있었던 것입니다. 나그네는 하는 수 없이 갈림길까지 되돌아 왔습니다.
 
나무 그늘에는 아직 소년이 놀고 있었지요.
 
"얘야 이 길이 가깝다고 하지 않았니?"
 
"예 하지만 제가 멀다고도 했는데요."
 
나그네는 그제야 알것 같았습니다.'아하! 짧고 편해 보이는 길이 더 멀수도 있고 험해 보이는 길이 때로는 더 가까울수도 있다는 것이구나.'라고 말입니다.
 
나그네는 험해 보이는 다른 길로 들어섰습니다. 처음에는 좀 힘들었으나 그 길은 아무런 막힘없이 도시로 곧게 이어져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앞에 놓인 삶의 길도 바른 정도의 길과 바르지 못한 사도의 길이 있습니다. 우리는 매번 그 갈림길에서 갈등하게 됩니다. 바르지 못한 길은 곧고 편할 것 같지만 그 길은 우리를 목적지로 이끌지 못합니다. 그래서 처음 출발한 곳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더 더디고 먼길일수 있습니다.
 
삶은 습관이 모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바른 습관이 결국 바른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바른 습관은 처음에는 어렵고 더딘것 같아도 나중에는 삶을 더 쉽고 편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Dancing In The W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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