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부활의 주님보다 수난의 주님께 더 감동했고,
부활의 주님보다 성탄의 주님께 더 감동했습니다.
영광의 주님보다는
사랑의 주님을 더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수난과 성탄의 주님이 부활의 주님보다 더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더 느끼게 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함께 하늘에 계시던 분이
다시 아버지께 돌아가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고,
하느님이신 분이 영광을 받으시게 된 것도
본성상 당연한 것이지만
그러실 필요가 없으신 분이 우리에게 찾아오시고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것은
어쩌면 신성의 본성을 거스르는
너무도 감동적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임금님이 대궐로
돌아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지만
임금님이 누추한 내 집을 찾아오심이
특별한 것이고 사랑인 것과 같습니다.
주님의 이 낮추시는 사랑 덕분에 우리는
높이 계셔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던 분을 보고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아버지 하느님을 아신다고 하십니다.
그 하느님 아버지가
보내서 오셨기 때문에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은
이런 주님을 독성죄로 단죄합니다.
하느님을 안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하느님을 안다고
자처하는 것은 언감생심입니다.
맞습니다.
그들의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우리 같은 인간이 초월적인 하느님을,
그것도 다 안다고 하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시오,
인간이신 우리의 주님은 다 아시지요.
완전한 사랑으로 완전히 아십니다.
하느님을 완전히 사랑하시고
완전히 아시는 우리의 주님께서
하느님을 이 땅으로 모시고 오셨습니다.
하느님을 땅으로 끌어내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도 하느님을 압니다.
그러나 역시 초월적인 하느님을
다 아는 것은 아닙니다.
다 알 수도, 다 알 필요도 없습니다.
장님이 코끼리 더듬듯이 알더라도
아는 것은 아는 것이고
조금 알아도 괜찮고 충분합니다.
하느님이 계시고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만 알아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 정도 아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많이 알다가, 아니
많이 알려고 하다가
제 꾀에 제가 넘어갈지 모르니 말입니다.
알 수 없는 하느님을 알 수 있게 해주신
우리의 주님 감사드립니다.
- 김찬선(레오나르도)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