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주님 수난 성지 주일 2011년 4월 17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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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강점수 | 작성일2011-04-15 | 조회수486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주님 수난 성지 주일 2011년 4월 17일 마태 26,14-27,66. 오늘은 예수님의 죽음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우리가 지금 들은 것은 마태오복음서가 전하는 수난사였습니다. 모든 복음서들이 수난사를 보도합니다. 하나의 수난이었지만, 그것을 기록한 복음서에 따라 이야기는 조금씩 다릅니다. 같은 사실을 겪었지만,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어 전하는 과정에 공동체들의 신앙 배경과 의도에 따라 이야기들은 약간 다르게 기록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수난사는 빌라도가 ‘매우 이상하게 여길 정도로’, 예수님이 침묵 지켰다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이 복음서는 이사야 예언서가 말하는 학대당하는 의인(義人)의 모습을 예수님 안에 보고 있습니다. 이사야서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는 온갖 굴욕을 받으면서도 입 한번 열지 않고 참았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가만히 서서 털을 깎이는 어미 양처럼,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53,7). 마태오복음서는 이 학대당하는 의인을 연상하면서 수난사를 기록하였습니다. 억울하게 죽어가면서도 입을 열지 않는다고 이사야서가 예언한 그 의인을 복음서 저자는 예수님 안에 보고 있습니다. 마태오복음서는 예수님을 죽인 책임이 유대인들에게 있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나타냅니다. 사형을 언도하고 형을 집행한 사람은 로마 총독 빌라도였습니다. 그러나 이 복음서는 예수님을 죽인 일차적 책임이 빌라도에게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빌라도의 아내가 남편에게 사람을 보내어 ‘당신은 그 의인의 일에 관여하지 마세요.’라고 전했다는 일화와 빌라도가 군중 앞에서 손을 씻은 일화를 소개하면서 이 복음서는 그 죽음에 대한 책임이 빌라도에게만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빌라도는 말합니다. ‘나는 이 사람의 피에 책임이 없소. 이것은 여러분의 일이오.’ 이 말에 유대인 군중은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질 것이오.’라고 답합니다. 마태오복음서는 예수님을 죽인 책임은 유대인들에게 있고,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이제부터 하느님의 아들을 죽인 민족이라는 비극적 운명을 짊어지고 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누어가졌다는 말과 예수님이 숨을 거두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신 기도, ‘하느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말은 구약성서 시편(22,1.18)에서 가져 왔습니다. 그 시편은 온갖 역경을 딛고 하느님을 가르치던 사람이 고통을 당하면서 하느님께 신뢰와 희망을 표현하는 기도입니다. ‘해면을 가져와 신 포도주에 적시어’ 예수님의 목을 축이게 했다는 이야기도 시편(69,21)에서 가져 왔습니다. 그것은 의인이 역경에서 하느님에게 부르짖는 기도 시편입니다. 마태오복음서는 구약성서를 이렇게 인용하여 예수님의 죽음은 구약성서가 이미 예고한 의인의 죽음이었다고 말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알리고, 당신은 목숨을 잃은 의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초기 신앙인들, 특히 마태오복음서를 기록한 공동체는 예수님은 돌아가시고 부활하셔서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면서, 그분이 그렇게 비참하게 죽어야 했던 의미를 구약성서에서 찾아 해석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치면서 인간 생명의 의미를 사람들이 깨닫게 하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요한복음서는 이 사실을 예수님의 입을 빌려 이렇게 요약합니다. “내가 온 것은 사람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서 넘치게 하려는 것입니다.”(10,10). 유대교는 율법을 지키고 제물을 바쳐서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구원을 위한 요건을 채워서 그 대가를 얻어낸다는 것입니다. 하느님도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원리 안에서 행동하신다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이 생각하는 순리(順理)입니다. 예수님은 인과응보가 아니라, 사랑이신 하느님의 원리를 제시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병들고, 불행한 이들은 모두 하느님이 벌주신 결과라고 믿었습니다. 하느님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모르고, 인과응보의 원리에 준해서 우리의 불행을 해석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인간 불행의 원인을 하느님에게 두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에게 하느님은 사람들을 고치고 용서하시는 아버지였습니다. 자녀를 사랑하고,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에서 하느님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믿음과 가르침은 유대교 지도자들이 주장하던 것과는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 아버지의 일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생명을 사셨고, 유대교 기득권자들은 그분을 그대로 두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강자들 앞에서도 스스로를 굽히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생존이 위협 당할 때도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생명을 살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그 하느님은 우리 생명의 원천이고, 우리를 고치고 살리면서 생명을 주시는 분이었습니다. 그 하느님이 예수님을 당신의 생명 안에 살려 놓으셨다는 것이 그분이 부활하셨다는 초기 신앙인들의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또 “아버지의 뜻이...이루어지게”(마태 6,10) 기도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은 우리가 그분의 일을 실천할 때 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당신과 같이 아버지의 일을 실천하여, 그분의 자녀 되어 살라고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그 자녀 되어 사는 길에 몰두하셨습니다. 그것을 위해 십자가를 지고, 그것을 위해 당신의 생명을 잃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설교하신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일이 실천되는 우리의 삶입니다. 그 실천이 있는 곳에 하느님은 살아 계십니다. 하느님이 살아 계시는 곳에 우리의 허세와 우리의 욕심은 사라집니다. 하느님이 자비하신 분이라 우리가 그 자비를 실천할 때,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살아계십니다. 하느님이 베푸시는 분이라 우리도 우리의 욕심을 접고, 베풀어서 이웃을 섬길 때, 하느님은 우리 안에 살아계십니다. 가난하고 소외당한 생명이 회복되고 활력을 되찾는 곳에 하느님의 일을 보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예수님을 따라 살기 위해 노력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수난사는 예수님이 숨을 거두시자 지진을 비롯한 여러 가지 이변이 일어났다고 말했습니다. 로마 군인 백인대장 및 함께 있던 다른 사람들이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유대교의 세상에 지각 변동과 같은 이변을 일으켰고, 이교도인 백인대장과 다른 이들은 예수님 안에 과연 하느님의 생명이 있었다는 사실을 고백하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거부한 유대교였고, 그분의 죽음에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보고 고백하는 그리스도 신앙인이라는 말입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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