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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유다의 배반 - 송영진 모세 신부
작성자노병규 쪽지 캡슐 작성일2011-04-19 조회수1,217 추천수11 반대(0) 신고
 
<성주간 화요일>(2011. 4. 19. 화)(요한 13,21ㄴ-33.36-38)

 

<유다의 배반>

 

예수님께서는 왜 유다를 제자로 삼으셨을까?

그가 배반할 것을 아시면서도 왜 막지 않으셨을까?

예수님께서 유다가 배반할 것을 아시면서도 제자로 삼으셨다면,

그에게 배반하라고 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유다의 책임이 줄어들거나 없는 것이 아닌가?

또는 유다의 운명이 배반자가 되는 것이었다면 그에게는 책임이 없는 것이 아닌가?

그리스도교의 핵심은 부활이고, 부활이 있으려면 예수님께서 죽으셔야 하고,

유다는 예수님의 죽음에 한몫을 했으니 그도 부활에 한몫을 한 것이나 같고,

그렇다면 유다도 구원 사업의 한 조력자가 아닌가?

너무 유다만 배반자라고 욕을 먹는 것은 억울하지 않은가?

 

그런 질문들이 그럴듯하긴 하지만 한 가지 놓친 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결과만을 보고서 하는 질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과론일 뿐입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그 일들을

하느님과 예수님께서도 그 일 그대로 미리 알고 계셨을 것이라는 단순한 사고방식은

너무 순진한 고정관념이고 착각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일 그대로,

하느님과 예수님께서도 ‘그것만’ 알고 계셨을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예수님)께서는

유다에 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계시고,

우리가 알고 있는 그 결과보다 더 많은 다른 가능성을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미리’ 아시는 것 외에도, 수없이 많은 다른 경우의 수를 알고 계시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전지(全知)’입니다.

그런 뜻에서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유다의 배반은

일어날 수 있는 수많은 경우의 수 중에서 하나였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유다의 배반이 반드시 필요했던, 유일한 방법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여간에 유다는 배반자가 될 의무가 없었습니다.

정해진 운명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그건 그 자신이 선택한 일입니다. 그러니 그 자신의 책임입니다.

그러면 유다가 자기의 지유의지로, 자기 마음대로 결정한 일이라면,

또 더 넓게 생각해서 모든 인간이 각자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면,

인간이 자꾸만 예측 불가능한, 즉흥적이고 우발적인 행동만 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그 결과를 미리 다 아실 수 있는가?

하느님께서 알고 계시는 그대로 진행된다면 그건 자유의지가 아니지 않은가?

인간은 예측할 수 없는 존재이지만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아신다고 표현하면

그런 표현 자체가 모순 아닌가?

 

그렇습니다. 모순입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미리 다 정해놓으신 것은 아니지만

모든 것이 다 하느님 계획 속에 있다는 말과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시고 인간 스스로 결정하도록 맡기셨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결과를 다 알고 계신다는 말은 모두 모순입니다.

(논리학에서는 모순이라고 하는데, 신학에서는 ‘신비’ 라고 합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말이 안 된다고 하지만,

믿는 사람들은 인간 세계를 초월한 하느님의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모순’이라는 말이 인간에게서 왔습니까? 하느님에게서 왔습니까?

인간의 논리학이 인간의 것입니까? 하느님의 것입니까?

왜 하느님이 인간의 논리와 사고방식의 틀에 갇혀야 합니까?

왜 인간의 자유의지만 생각하고 하느님의 자유의지는 생각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정말 아는 것인지 반성해야 합니다.

 

어떻든 유다는 배반을 했고 자살을 했습니다.

그가 중간에 마음을 돌리고(회개하고) 배반하지 않았다면

하느님께서는 다른 방식으로 구원 사업을 진행하셨을 것이고,

그것이 모두에게 더 좋은 일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오래 전에 어떤 성당에서 성탄절 직전에 불이 나서

성전 건물이 모두 타버리고 재가 된 일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전기 누전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본당은 비닐하우스에서 성탄절과 그 겨울을 지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성금이 몰려들었고, 아주 훌륭한 새 정선이 세워졌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너무 낡아서 새로 지을 필요가 있었던 성당이었는데,

신축 기금을 마련할 길이 없어서 미루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성전 봉헌식 때 모인 사람들이 다들 하느님의 섭리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자, 그런데 ‘하느님의 섭리’ 라는 말... 지나고 보니 그렇다는 것이지,

그것만 믿고 지금 자기가 있는 성당에 일부러 불을 지를 수 있습니까?

 

같은 이야기인데,

지난 1977년도에 익산역(당시 이리역)에 엄청난 폭발 사고가 있었습니다.

다이나마이트 등을 실어놓은 화물 열차가 폭발한 것인데,

역사를 비롯해서 그 지역 일대가 모두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사람도 많이 죽고 다쳤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지금은 아주 깨끗하고 번화한 새 시가지가 되어 있습니다.

원래 그곳은 너무 낙후되어서 재개발을 해야만 하는 곳이었는데,

아무도 쉽게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고 후에 아주 쉽고 빠르게 새로운 시가지를 건설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지금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도심지를 일부러 폭발시킬 수 있습니까?

(익산역 폭발사고 때문에 새 시가지를 쉽고 빠르게 건설할 수 있었던 일은

전화위복이 아니라 재난을 극복한 일입니다.)

 

저는 어쩌다가 안식년 휴가 기회를 놓치고 계속 본당 사목을 하면서

속으로, 이제 좀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병을 얻어서

진짜로 본당사목에서 물러나서 이렇게 쉬게 되었습니다.

이것도 하느님 은총이라고 생각하긴 하는데,

쉬고 싶어서 일부러 병에 걸린 건 아닙니다.

 

유다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것이라고 믿고서 배반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배반은 어떤 식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고 합리화될 수 없습니다.

사실 그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죽으실 것이라고 예상도 못했고,

예수님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후회를 하면서 자살을 해버렸습니다.

후회할 짓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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