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학과 믿음---도나 오쉐이 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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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용대 | 작성일2011-04-26 | 조회수589 | 추천수8 | 반대(0) 신고 |
그때에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요한 20:11-18)
요한 복음은 어설프게 알고 있던 것을 확신하게 만들고
잘못 알고 있던 것을 제대로 알게 만들 때가 많다.
그 단적인 예가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와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하신 것이다.
(요한 3장, 요한 4장)
오늘의 복음을 보면 마리아는 처음에는 예수님을 정원지기로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시자 ‘깨닫게’ 되었다.
요한 복음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깨달음’을 강조하고 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청한 이 일도 내가 해 주겠다.
네가 내 눈에 들고, 나는 너를 이름까지도 잘 알기 때문이다.’”(탈출기 33:17)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요한 10:2-3)
자신의 내면 깊이 들어가서 자신을 알고
그리하여 하느님을 새로운 눈으로 보지 않는 사람의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 신학이다.
신학은 결코 믿음이 아니다. 신학에 대하여 많이 아는 사람이라고 믿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한 자매님이 남편을 두고 하는 말을 들었다.
“저의 남편은 신앙에는 무척 관심이 많으나 믿음이 없습니다.”
이와 반대로 신학은 모르지만 믿음이 아주 깊은 사람이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74) 성인이 말했다.
“많이 배우지 못한 할머니가 신학의 대가보다 믿음이 더 깊을 수 있습니다.”
요한 복음에서의 ‘이름’은 ‘우리들의 머리털 숫자까지 알고 계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태오 복음(28:8)에서는 “여자들은 두려워하면서도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갔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무덤은 기쁨을 주는 곳이 아니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으면 슬픔에 잠겨 무덤을 떠나게 되지만
세월이 흘러 단념하고 나면 기쁘게 무덤을 떠날 수 있게 된다.
예수님의 죽음은 ‘끝’이 아니었다.
과거는 ‘끝’이 나지 않고 ‘애틋함’으로 채워져 있다.
과거는 무덤을 통하여 현재로 연결된다. 그러면 과거는 과거가 아니다.
과거는 시간이 없다. 과거는 시간을 초월한다.
성경은 2000년 전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말하고 있고 미래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신자들은 신학을 공부하면서 성경을
한낱 역사서로 생각하고 ‘오늘’을 살지 못하고 있다.
기복신앙에 빠져 있는 것이 그 증거이다.
자신을 알고 회개하지 않으면 결코 하느님을 알지 못하며
하느님에게 자신을 내맡길 수가 없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이십니다.”(히브리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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