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060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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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용현 | 작성일2011-06-01 | 조회수287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2011년 6월 2일 부활 제6주간 목요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16-2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그러자 제자들 가운데 몇 사람이 서로 말하였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또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하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무슨 뜻일까?” 그들은 또 “‘조금 있으면’이라고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무슨 뜻일까?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알 수가 없군.”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묻고 싶어 하는 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하고 내가 말한 것을 가지고 서로 묻고 있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조금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조금은 아주 짧은 시간입니다. 우리가 아는 이 조금은 사흘의 시간입니다. 주님의 돌아가심과 그분을 다시 만나는 사흘의 시간을 주님은 조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조금의 시간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생각보다 큽니다. 그리고 그 조금이 우리에겐 영원에 가깝듯 긴 시간처럼 느껴집니다. 그 짧은 며칠 동안 우리는 너무도 다른 곳에서 다른 모습으로 지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조금의 시간에 주님은 십자가와 차디찬 돌 무덤을 거치십니다. 그분은 죽음 이전에 철저히 홀로 버려지시고, 모든 이들의 조롱거리의 대상이 되시어 모든 이가 봐야만 하는 곳에 올라 죽음을 당하십니다. 모든 이들 앞에 당신의 모든 삶이 웃음거리고 변하며 사람들의 진실이 드러납니다.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을 죽이는 상황, 하느님을 믿는다 말하되 하느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 온 몸으로 드러내시는 죽음을 당하십니다. 그리고 그 조금의 시간 시신마저 철저히 감시를 당하는 무덤 속에서 그 조금의 시간을 주님을 보내십니다. 그리고 그 조금의 시간, 제자들은 스승을 버림으로서 조금을 시작합니다. 스승이 잡히는 순간 제자들은 스승의 배려로 죽음의 위협에서 벗어납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도망을 칩니다. 스승의 뒤를 따르는 이 조차도 자신에게 찾아온 위기에 스승을 모른다 맹세하며 돌아섭니다. 그들이 스승을 미워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스승을 지킬수도 없었습니다. 스승을 모른다 하여 목숨을 유지했습니다. 스승은 좋은 분이고, 옳은 분이라 믿었지만 그분의 생명은 그분의 힘으로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아니 내가 살기 위해서는 언제든 버릴 수밖에 없는 스승이었습니다. 그분과 그렇게 헤어졌습니다.
그렇게 조금은 시작되었습니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그 이별의 시간을 세상은 기뻐하리라 표현하십니다. 그 세상은 모두가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의 세상입니다. 그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하느님을 찾고 믿고 기도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하느님을 죽이고 기뻐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에 옳고 바른 것이라 가르치던 하느님의 말씀이 현실에 와 닿으면 하느님의 백성 조차도 하느님께 십자가를 건네는 모진 현실이 드러난 순간입니다. 그 하느님을 잃은 이들은 울며 애통해합니다. 기쁨도 무너졌고 희망도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울음이 스승을 잃은 것에 대한 울음만은 아닐 것입니다. 진리를 아는 이들도 하느님의 뜻과 전혀 상관 없이 사는 신앙의 세상에 좌절하는 울음일지도 모릅니다.
누구도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서는 안되는 상황입니다. 살고 싶어도 가슴만 치고 있어야 하는 시간입니다. 주님이 돌아가시는 순간 그분을 죽인 이들은 당연한 듯 고개를 쳐들고 그분을 잃은 이들은 살 이유를 잃어버리는 혼란의 시간입니다.
그렇게 조금은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현실의 모습을 너무도 분명히 보여주는 확실한 장면입니다.
"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이 말씀이 우리가 버린 스승이요 주님이 말씀하신 조금의 끝입니다.
조금의 시간이 지난 후 주님은 쓰러진 제자들이 일어설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근심이 기쁨으로 바뀐다는 말은 이 모든 절망적인 상황이 뒤바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조금이 시간이 지나고 다시 하느님이 나타나신 날, 하느님의 백성은 자신들이 하느님을 믿음과 세상을 살아감에 전혀 다른 삶을 살았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죽인 한 사람이 하느님의 힘으로 살아남을 보면서 자신들의 거짓을 바라보게 됩니다. 스승을 버리고 그 철저한 외로움으로 스승을 몰아넣었던 비겁하고 모자란 제자들도 그 스승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분을 다시 만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분을 버렸고, 자신들의 희망도 잃었으며 그분을 죽인 이도 그분을 따른 이도 아닌 어색하고 죄송스런 근심에 빠져듭니다. 그러나 주님은 확실히 그들의 근심이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이 기쁨은 주님이 그들을 다시 찾으시어 그들의 약함과 어리석음과 관계 없는 여전한 사랑의 인사를 건네심으로서 찾아옵니다. 그분은 그들의 부족함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이란 인사로 다가오십니다. 조금의 그 영원한 듯 한 시간이 이 인사로 한꺼번에 회복됩니다.
하느님을 대하는 우리에게도 이 조금의 시간은 거듭 거듭 다가옵니다. 우리의 모습이 어떤 입장에 서 있든 부활로 드러난 진실 앞에서도 우리는 자주 이 조금의 경험을 반복합니다, 그러나 여전한 것은 주님의 사랑이며 확실한 것도 하느님이 바라시는 진실입니다. 우리를 절대 버리지 않으시는 그리고 사라지지도 않는 하느님의 사랑만이 진리입니다.
그 앞에서 우리는 십자가에서 부활로 이어지는 조금의 시간을 꼭 기억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조금의 시간 속에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 부족한 제자이거나 그분을 죽음으로 내 몰며 자신의 신앙을 자랑하던 그 숱한 독한 신앙인의 모습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변하지도 사라지지도 않음을 아는 주님을 따르는 모습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조금의 시간이 지난 후 우리에게 웃으며 다가오시는 주님을 따라 하루를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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