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주님 승천 대축일/믿고 감당할 때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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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 | 작성일2011-06-05 | 조회수611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2011년 6월 5일 주일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말씀의 초대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성령께서 오시면 그들이 힘을 얻어 땅끝까지 주님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오르신다. 이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데, 곧 성령과 교회의 시대이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의 교우들을 격려하고 앞으로 받게 될 하늘 나라의 상속을 떠올리며 희망을 잃지 않도록 당부한다(제2독서). 주님께서 지상 생활을 마감하시며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세례를 베풀고 주님께서 전해 주신 것을 가르치라고 제자들에게 명령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예수님의 승천을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는지요? 예전에는 예수님께서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였습니다. ‘대기권을 뚫고 하늘 저쪽으로 가셨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동화 같은 표현입니다. 이천 년 전에 기록된 성경으로서는 당연한 표현입니다. 그러니 표현 그대로를 내용으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믿고 감당할 때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은 영원하십니다. 주님은 부활하셔서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지내시며 부활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실망과 좌절에 빠진 제자들에게 사랑의 승리를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온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길 부탁하시고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시며 하늘 나라로 올라가셨는데 우리는 이것을 승천이라고 말합니다. 복음은 다른 것이 아닌 ‘부활을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이 시간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의 은총에 힘입어 각자의 소명을 다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실망과 좌절 속에 애타하던 제자들에게 부활은 더없이 큰 기쁨이었습니다. 그 충만한 기쁨을 끝까지 누리고 싶은 것이 제자들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승천하셔서 하느님 품으로 가십니다. 아직도 미성숙한 제자들을 남겨둔 채 떠나가는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노래 한 곡 불러 드리겠습니다. “떠나는 이마음도, 보내는 그 마음도 서로가 하고 싶은 말 다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꼭 한마디 남기고 싶은 그 말은 너만을 사랑했노라 진정코 사랑했노라. 사랑의 기쁨도 이별의 슬픔도 이제는 너와 나 다시 이룰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꼭 한마디 남기고 싶은 그 말은 너 만을 사랑했노라. 진정코 사랑했노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허물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한없이 사랑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떠나시면서도 당신의 사랑을 확인시켜주시면서 떠나셨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그리고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요한14,2) 오늘 복음에서는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하시며 희망을 안겨주셨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은 이랬습니다. “이별만은 말아줘요, 내 곁에 있어줘요. 당신 없는 행복이란 있을 수 없잖아요. 이 생명 다 바쳐서 당신을 사랑하리. 이 목숨 다 바쳐서 영원히 사랑하리. 이별만은 말아줘요. 내 곁에 있어줘요. 당신 없는 행복이란 있을 수 없잖아요”. 진정 제자들에게는 예수님 없는 행복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 없는 행복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해야 하겠습니다. 사실 서로의 마음을 읽고 또 채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승천하셨다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이제 더 이상 육안으로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동시에 시공간의 구애를 받지 않는 존재로 바뀌셨다는 뜻도 됩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하느님과 천사들, 성인들은 하늘에 머물고 땅 속에는 마귀나 악인들이 사는 곳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서의 사명을 다 마치시고 하느님이 계신 곳으로 가셨다는 뜻을 담아 승천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셨지만 인간의 세계를 떠나지 않고 제자들을 통해서 온 세상 모든 사람에게 ‘주님으로서’ 활동을 계속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의 병행구절인 마르코 복음을 보면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라 하시며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믿는 이들에게는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마르16,15-18)고 선언하셨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이제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외적으로 증거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은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여전합니다. 오늘날도 그 역사는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제들이 미사를 봉헌하고 기도함으로써 신자들에게 악한 영들이 마음을 차지하지 못하게 하는 일이 바로 마귀를 쫓아내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당 다니는 사람이 왜 저러냐! 하고 우리 신자들을 비판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저는 ‘그래도 성당을 나오기 때문에 고만하다. 성당 안 나왔어 봐라. 더했으면 더했지…’ 자기도 모범을 보이지 못하면서 남의 흉을 보는 그 선하지 못한 마음을 빼어 버리는 것이 마귀를 쫓아내는 일입니다. 매번 걸려 넘어지더라도 그래도 고해성사를 통해서 용서를 받고 새 삶을 시작하려는 마음이 더욱 소중합니다. 새로운 언어를 말한다는 것도 단순히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에페소서 4,29에 보면 “남을 해치는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마십시오. 오히려 기회 있는 대로 남에게 이로운 말을 하여 도움을 주고 듣는 사람에게 기쁨을 주도록 하십시오.” 하고 말합니다. 어떤 분이 전에는 그야말로 남 얘기 좋아해서 흉을 보고 비방하며 허물을 들춰냈는데 이제는 남을 칭찬하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얘기를 한다면 그 사람이 바로 ‘새로운 언어를 말하는 것’입니다. 집회서 19장 10절에서 12절을 보면 “무슨 말을 듣거든 마음에 묻어라. 어리석은 자는 무슨 말을 들으면 옮기지 못하여 산고를 치르는 여인처럼 고통을 느낀다.”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저는 아니게 아니겠지요?’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은 네 말이다’ 하십니다. 12절을 보면 “어리석은 자는 말을 옮기지 못하면 넓적다리에 화살을 맞은 양 못 견뎌 한다.” 하고 말합니다. 정말 입이 싼 사람이 있어요. 가벼운 사람이 있단 말입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을 알고 남을 기쁘게 해줄 말을 찾는다면 그것이 ‘새로운 언어를 말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해를 입지 않는다는 것은 영적인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담고 그 말씀을 통하여 다른 사람의 마음에 있는 악을 몰아낸다면 그것이 바로 ‘손으로 뱀을 집어내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15절에 보면 야훼께서 뱀에게 “나는 너를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네 후손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너는 그 발꿈치를 물려고 하다가 도리어 여자의 후손에게 머리를 밟히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뱀으로 표현된 악의 세력이 인류의 어머니 마리아를 통해 그리고 그 후손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정복된다는 것을 예언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레지오 마리애 때 사용하는 복되신 동정성모마리아 상을 보면 어머니께서 뱀을 밟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 ‘역시 천주교 신자는 뭐가 달라도 달라!’ 하는 품위를 지켰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영적으로 무장하고 있어야 뱀을 집어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독을 마셔도 죽지 않으려면, 다시 말하면 어떤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으려면 그만큼 강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주님의 말씀을 읽어 가슴에 품고 기도하며 미사 안에서 영성체 하고, 내 안에 오신 주님을 통해서 힘과 능력을 얻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해도 다 좋습니다. 주 하느님 당신 안에 뿌리내리면” 하고 말했습니다. 예수님 안에 깊게 뿌리내려서 어떤 처지나 여건 안에서도 흔들리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이번 주간은 사도들에게 주어졌던 능력 안에 머물 수 있도록 노력 했으면 좋겠습니다. 서로 칭찬하며 새로운 언어로 말하고 우리에게 희망과 구원을 안겨준 주님의 승천을 기뻐하며 우리의 집을 마련해 주시고 우리를 기다리시는 주님,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기쁨과 희망으로 가득 찬 날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한 사람도 있지만 더러는 의심하였습니다. 눈으로 보았다고 해서 저절로 믿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약속을 믿고 맡겨진 일을 성실히 감당할 때 믿음의 눈이 활짝 열리게 됩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사도1,11)는 의미를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사랑합니다. 한 어린이가 성당 교리 시간에 늦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께서 왜 늦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어린이가 대답했습니다. “할아버지 한 분이 길가에 돈을 떨어뜨렸어요!” 오 그래, 돈을 주워드리느라 늦었구나! 하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어린이가 말했습니다. “아니요, 할아버지께서 가실 때까지 제가 밟고 있었어요!”. 좋은 일 만큼이나 나쁜 일 하기도 힘이 든답니다. 기왕이면 다른 이에게 기쁨을 주는 일을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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