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생명의 말씀] 하늘은 어디에? - 고준석 토마스아퀴나스 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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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권영화 | 작성일2011-06-05 | 조회수401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오늘 우리들은 주님 승천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가신 날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오르셨는데, 구름에 감싸여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다."(사도 1,9) 라고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 오르셨다고 했는데 예수님은 어디에 계시는 걸까요? 아니 하늘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예전에 어떤 책에서 이런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하늘! 하늘이 무엇일까? 하늘은 어디에 있을까? 땅에서 있는 사람한테 하늘은 머리 위에도 있고 오른편에도 있고 왼편에도 있고 앞에도 있고 뒤에도 있고 마침내 아래에도 있는 것이다. 지구가 둥글다면 하늘은 땅을 비롯하여 우리 모두를 감싸고 있다... 하늘은 어떤 형체를 갖추고 있지는 않아서 그냥 텅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하늘이 없는 건 아니다. 있지만 마치 없는 것처럼 있는 것, 하늘은 그런 것이다."
하늘에 대해 아주 적절한 표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렇게 보면 하늘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의 모든 곳에, 앞에 뒤에 위에 아래에 좌우에 온 세상 가득 찬 모든 것의 안팎에서 우리를 감싸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하늘로 오르셨다는 말은, 그러므로 우주선처럼 우주 하늘 위로 날아가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또한 그저 사람들이 거룩하다고 여기는, 머리 위 저 꼭대기 어딘가로 공간적인 장소를 이동하여 올라가셨다는 뜻도 아닙니다. 하늘은 위의 인용문에서처럼 언제나 어디에서나 존재하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 오르셨다는 것은 이제 그분이 더 이상 때와 장소에 갇혀 계시지 않는 분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당신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신 겁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으로 오셨다가 다시 본모습으로 되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마르 16,19)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오르신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언제 어디에서나 모든 사람이 만날 수 있는 그런 분이 되신 것입니다.
그렇듯 예수님이 오르셨던 하늘, 그 하늘나라 역시 어떤 장소나 시간적 개념이 아닙니다. 혹은 단순히 우리 마음 안에 있다는, 막연한 생각 속에 있는 피상적인 그런 나라가 아닙니다. 하늘나라는 우리의 현실과 연결된 아주 구체적인 나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삶이 실천되는 곳에 하늘나라가 있으며 그곳에 예수님께서 살아 계십니다. 그리고 하늘나라는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우리 가운데 있는 그런 나라입니다. 우리 가운데라는 것은 우리가 함께할 때, 서로 미움과 증오를 버리고 서로에게 기쁨을 전하고 사랑을 전할 때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 << 2011년 제45차 홍보 주일 담화문 >> --------------------------------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제45차 홍보 주일을 맞이하여, 저는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인 인터넷의 등장이라는 우리 시대의 특징적인 현상에 대하여 몇 가지 성찰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산업 혁명이 생산 과정과 노동자의 삶에 불러일으킨 혁신을 통하여 사회가 근본적으로 변화하였듯이, 오늘날 커뮤니케이션 분야에 일고 있는 깊은 변화가 문화적 사회적 대변혁의 흐름을 주도한다는 견해가 더욱 일반화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기술은 커뮤니케이션 방식만이 아니라 막대한 문화 변동기를 겪고 있다고 할 정도로 커뮤니케이션 자체이기도 합니다. 정보나 지식을 전하는 이러한 수단들이 배우고 생각하는 새로운 길을 열면서, 관계를 맺고 친교를 쌓는 데에도 새로운 기회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하지 못한 새로운 지평이 열리고 있습니다. 새로운 매체들이 제공하는 가능성에 대한 경탄을 자아내는 동시에, 디지털 시대의 커뮤니케이션의 의미에 대한 우리의 진지한 성찰을 절실히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인터넷의 뛰어난 잠재력과 그 폭넓은 활용을 접할 때 특히 분명해집니다. 인간 창의력의 다른 모든 산물처럼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기술은 개인과 인류 전체의 온전한 선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합니다. 이를 현명하게 사용하면, 인간의 가장 깊은 열망으로 남아 있는, 의미와 진리와 일치에 대한 바람을 충족하는 데에 이바지할 수 있습니다.
디지털 세계에서, 정보 전달은 사회적 네트워크 안에 정보를 공개한다는 의미가 점점 더 강해지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지식은 개인적인 교환 형태로 공유됩니다. 정보의 생산자와 소비자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고 상대적이며, 커뮤니케이션은 데이터 교환만이 아니라 오히려 공유의 형태로 드러납니다. 이러한 역동성으로 인해 커뮤니케이션 자체가 새롭게 인식되어 왔고, 커뮤니케이션이 무엇보다 대화, 교류, 연대, 긍정적 관계의 창출로 보입니다. 반면에,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은 몇 가지 전형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곧 소통의 일방성, 자기 내면세계의 일부만을 전달하려는 경향, 자칫 자아도취에 빠질 수 있는 자기허상을 만들어낼 위험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다른 누구보다 젊은이들이, 열정과 호기심으로 새로운 삶을 받아들이려는 이들 특유의 온갖 고뇌와 도전과 창조력을 지니고 이러한 커뮤니케이션의 변화를 실감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소셜 네트워크'에서 생겨난 디지털 광장에 젊은이들이 더욱 많이 참여하여 새로운 형태의 인간관계를 맺고 자기 인식에 영향을 받습니다. 따라서 올바른 처신뿐 아니라 진정한 자기 존재에 대한 물음이 제기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의 평행 세계로 도피하거나 가상 세계에 지나치게 노출되는 위험들만 조심한다면, 오히려 이 가상 공간 안에 있는 것이 다른 이들과 인격적 만남을 진정으로 추구한다는 표시가 될 수 있습니다. 이 가상 공간 안에서 나눔, '우정'을 추구한다면 진실하고 충실해야 하지만, 공적인 '개인 신상'을 조작하려는 환상은 버려야 합니다.
새로운 기술은 공간과 문화의 경계를 넘어 사람들을 서로 만나게 해 주고, 그렇게 하여 우정을 쌓을 수 있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커다란 기회이기도 하지만, 있을 수 있는 위험들을 깨닫고 더욱 조심하여야 합니다. 이 신세계에서 누가 우리 '이웃'입니까? 우리가 날마다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소홀해질 위험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사는 현실이 아닌 '다른' 세상에 몰두하여 우리 관심이 흩어지고 현실에서 멀어질 위험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선택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참으로 깊고 지속적인 인간관계를 키워나갈 시간이 있습니까? 우리는 가상 세계의 만남이 우리 삶의 모든 차원에서 직접적인 만남을 대신할 수 없고 대신하여서도 안 된다는 것을 늘 기억하여야 합니다.
디지털 시대에도 모든 이는 진실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더욱이, 소셜 네트워크가 지닌 역동성은 한 개인이 소통하는 내용 안에 자신이 포함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서로 정보를 주고받을 때, 이미 사람들은 자신의 세계관과 희망과 이상을 함께 나눕니다. 따라서 디지털 세계에도 그리스도인다운 존재 방식이 있습니다. 이것은 정직하고 개방적이며 책임감 있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커뮤니케이션 형태를 가집니다. 뉴 미디어를 통한 복음 선포는 여러 미디어 제품에 종교 콘텐츠를 도입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복음 선포는 또한 자신의 디지털 신상과 커뮤니케이션 방식에서, 명확히 드러내지는 않더라도 온전히 복음에 부합되는 선택과 선호와 판단을 일관되게 증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 나아가, 선포자의 일관된 증언 없이 복음 메시지가 선포될 수 없다는 것은 디지털 세계에서도 분명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새로운 상황 안에서 새로운 표현 형태를 통하여, 자기가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하도록 다시 한 번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1베드 3,15 참조).
디지털 시대에 복음을 증언하는 활동은 복음 메시지가 웹의 전형적인 어떤 논리에 도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든 이가 특별히 주의를 기울일 것을 요청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전하려는 진리의 가치는 그 '인기'나 관심도에 달려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진리를 사람들의 구미에 맞추려고 왜곡하거나 희석시키지 말고 온전하게 알려야 합니다. 진리는 덧없는 매력을 지닌 것이 아니라 일용할 양식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의 진리는 소비하거나 피상적으로 이용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 진리는 자유로운 응답을 요구하는 선물입니다. 진리는 웹의 가상공간에서 선포된다고 하여도 언제나 현실 세계 안에서 그 모습을 갖추어야 하고 우리가 날마다 함께 살아가는 형제자매의 실제 모습 속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그러므로 직접적인 인간관계는 언제나 신앙 전수의 근본이 됩니다!
그래서 저는 그리스도인들이 확신을 가지고 충분한 지식과 책임감을 지닌 창조력으로, 디지털 시대가 가능하게 해 준 관계망에 동참하기를 권유합니다. 이는 단순히 참여 욕구를 충족시키자는 것이 아니라 이 관계망이 인간 삶의 본질적인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웹은 새롭고도 한층 더 복합적인 지성적 정신적 지평, 곧 새로운 형태의 공동 의식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습니다. 이 분야에서도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이시고 인류와 역사의 구원자이시며 만물이 그분 안에서 완성된다는(에페 1,10 참조) 우리의 신앙을 선포하도록 요청받습니다. 복음 선포는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여 마음을 일깨우고 양심에 호소하는 커뮤니케이션을 요구합니다. 이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동행하셨을 때 보여 주신 방식을 연상시킵니다(루카 24,13-35 참조).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시어 대화를 나누시고 그들의 마음속에 들어 있던 것을 드러내게 하시어 그들이 차츰 신비를 이해하도록 이끄셨습니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의 진리는 관계와 친교와 의미를 향한 인간의 열망을 충족시키는 참된 응답입니다. 이 열망은 소셜 네트워크의 엄청난 인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신자들은 자신의 가장 깊은 확신을 증언함으로써, 웹이 사람들을 비인간화하거나, 감정적으로 조작하려 하거나, 힘있는 자들이 다른 이들의 의견을 독점할 수 있게 하는 수단이 되지 않게 할 것입니다. 오히려 신자들은 인간에 대한 영원한 물음을 끊임없이 제기하도록 모든 이를 격려합니다. 그 물음은 초월에 대한 우리의 열망과 참으로 살 가치가 있는 진정한 삶에 대한 갈망을 증언합니다. 이러한 인간 고유의 정신적 열망이 있기에 우리는 진리와 친교를 갈구하고 온전하고 성실한 소통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저는 이 디지털 분야에서 젊은이 여러분들이 활약하기를 바랍니다. 새로운 기술들 덕분에 준비가 잘 되어가고 있는 마드리드 세계 청년 대회에서 만날 것을 젊은이 여러분에게 거듭 약속드립니다. 또한 저는 하느님께서 커뮤니케이션 종사자들에게 힘을 주시어 그들이 언제나 양심적으로 전문가다운 의식으로 일할 수 있도록 젊은이들의 수호성인이신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의 전구를 통하여 기도드리며, 여러분 모두에게 교황 강복을 보내 드립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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