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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오직 사랑에 사랑을 -반영억라파엘신부-(요한 17,20-26)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1-06-09 조회수482 추천수4 반대(0) 신고
 
 

2011 6 9일 부활 제7주간 목요일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요한 17,20-26)

  

 말씀의 초대

당시 사두가이들은 바리사이와는 달리 죽은 이들의 부활이나 천사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따라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바오로는 의회에서 자신이 죽은 이들의 부활을 믿는 바리사이임을 밝히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이 하나 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한다. 제자들이 하나가 되는 것은 진리이신 주님 안에 머무르는 것이다. 진리 안에서 제자들이 하나가 되어야만 세상에 참된 진리를 증언할 수 있기 때문이다(복음).

☆☆☆

복음 묵상

운전 학원에서 도로 연수를 전담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학원에서는 자상하다고 소문이 난 사람입니다. 어느 날 그의 아내는 ‘어차피 할 것이라면’ 하는 마음에서 남편에게 운전을 배우기로 했습니다. 그렇지만 첫날부터 부부는 싸우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상냥하다는 남편이 아내를 윽박지르고 무시하는 말을 한 것입니다.

아내의 말입니다. “더 잘해 달라는 것이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에게 하는 만큼만 하면 된다는 거지.” 남편의 말입니다. “그게 안 돼. 왜 당신에게는 화부터 먼저 나는지 나도 알 수가 없어. 다른 사람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는데, 당신에게는 못 참겠어. 정말 미치겠어.”

아내와 자신은 ‘하나’라는 무의식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운전 잘하는 ‘내가’ 운전 못하는 ‘다른 나’를 꾸짖는 것이지요. 일치는 이렇듯 어렵습니다. 알고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론과 지식은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늘이 개입해야 가능해집니다. 일치 또한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일치하여 살기를 바라십니다. 그러기에 하나 되려는 노력에는 언제나 힘을 보태 주십니다. 일치는 내 쪽에서 시작됩니다. ‘당신이 바뀌어야 내가 바뀔 것 같소.’ 이래서는 안 됩니다. ‘내가 바뀌어 당신에게 가겠소.’ 이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의 힘이 함께하십니다.

 

아버지,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이들도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일치보다 분열이 많습니다. 공존하려는 조직보다 떨어져 나가려는 조직이 더 많습니다. 말 많고 탈 많은 인간이 일치를 이루며 산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서로를 인정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일치는 상대방을 받아들일 때 가능해집니다. 상대방의 모순까지 받아들이면 더욱 확실한 일치가 됩니다. 사랑과 감동을 바탕으로 하면 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식도 권위도 재물도 순간입니다. 잠깐의 일치는 가능케 해도 영원한 일치는 불가능합니다.
인간의 본모습은 두 얼굴입니다. 인간의 양면성은 본질인 것이지요. 아무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어이없는 행동을 이해하려 노력해야 합니다. ‘이기적인 행동도 좋게 해석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받아들이는 것의 첫 행동입니다.
예수님의 뜻은 늘 일치에 있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일치해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기에 하나가 되려는 노력에는 을 보내 주십니다. 일치는 내 쪽에서 시작됩니다. ‘당신이 바뀌면 나도 바뀌겠다.’는 것은 늘 유혹일 뿐입니다. ‘내가 바뀌어 당신께 가겠다.’는 마음일 때 은총이 함께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일치를 원하시고, 사람은 분열을 원한다.” 서양 속담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일치는 귀하고 분열은 흔하다는 말입니다. 역사 안에도 갈라서는 인간들의 이야기는 수두룩합니다. 일치는 언제나 희망일 뿐, 틈만 나면 대립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와도 같습니다. 지금도 모든 국가는 어떤 형태로든 서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치를 위한 노력은 하느님의 행위입니다. 갈라진 이를 화해시키고 보복에 눈먼 이를 인도한다는 것은 은총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무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힘을 지닌 자만이 가능합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던 사람들이 하찮은 일로 갈라져 나가는 것을 봅니다. 하지만 대부분 실패하고 맙니다. 주님의 힘이 함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뜻은 언제나 일치에 있습니다. 어디서나 일치해 살기를 바라십니다. 그러기에 하나가 되고자 노력하는 이에게는 주님께서 늘 당신의 힘을 보내 주십니다. 일치는 내 쪽에서 시작됩니다. ‘당신이 바뀌면 나도 바뀌겠다.’ 이건 아닙니다. ‘내가 바뀌어 당신에게 가겠다.’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의 힘이 함께합니다.

 

       

 

     오직 사랑에 사랑을

 

  -반영억라파엘신부-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많은 기도를 받고 또 기도를 부탁하기도 합니다. 어찌 보면 기도하는 것은 방법이 다를 뿐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에 상관없이 삶 안에 젖어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생각해 보면 무엇을 해 달라는 기도가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나 자신을 하느님의 은혜로움에, 그분 처분에 맡기고, 마음 깊은 곳에서 그분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라고 알고 있지만 막상 기도를 시작하면 나의 바람만을 쏟아놓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참되게 기도하기위해서는 먼저 침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의 침묵 없이는 제대로 기도할 수 없습니다. 기도는 많이 생각하는 데에 있지 않고 많이 사랑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세상에 나가 증언하는 말을 듣고 믿게 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기도의 핵심은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저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17,26) 하고 말씀하셨듯이 사람들이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을 온전히 깨닫고 그 안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바로 그 사랑을 가지고 세상에 사랑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제자들은 사랑의 관계 안에서 예수님 안에 머물게 되고 예수님께서도 그들 안에 머물러 사시게 됩니다. 결국 예수님의 기도는 사랑의 관계를 확고히 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17,24) 하고 간절히 기도한 것은 바로 당신이 누리는 영광을 믿는 이들에게도 전해주고자 하는 사랑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기도는 사랑입니다.

 

오늘 우리도 정성어린 기도를 봉헌하되 이기적인 기도를 벗어나 사랑의 기도를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기도는 오직 사랑에 사랑을 더하는 것이 중요하고 사랑을 일깨워 주는 것들을 생활 실천으로 옮겨야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처럼 살게 해 주십시오. 성모님처럼 살게 해 주십시오. 어떤처지에서든지 항구하게, 흔들림없는 믿음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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