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하느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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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윤정수 | 작성일2011-06-10 | 조회수1,281 | 추천수9 | 반대(0) 신고 |
가톨릭 신학원 50기로 졸업 했는데 졸업전 미사 때 강론으로 신앙고백 했던 내용을 스스로에게 재 다짐하고, 같이 나누고 싶어 이 곳에 올립니다.
"하느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 윤 정 수 리디아
저의 신앙생활은 30년 전 신앙심 깊고 매사에 신실했던 직업군인 배우자를 만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당시 성호 긋는 것조차 어색했던 저는 한 달 만에 윤정수에서 하느님의 자녀 "리디아"로 새롭게 태어나게 되었고, 혼배성사까지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안정된 직장이 있는 성실하고 신앙심 깊은 남편에 3남2녀 중 막내아들이고, 큰 형님 댁이 홀어머니를 모실 테고, 막내며느리인 저는 시댁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자식 낳고 알콩달콩 살아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꿈은 신혼여행을 갔다 온 첫 날부터 무너졌습니다. 큰 형님 댁에서 여러 가지 사정을 말하며 한 두어 달 어머니를 맡겨야겠다며 보따리를 싸서 무작정 신혼집으로 모시고 오셨습니다. 중풍에 치매환자였던 어머니를 스물여섯 새색시가 감당하기엔 몹시 당황스러운 일이었지만, 그래도 내 남편 부모이고, 평생 모시는 것도 아닌데…….라고 위안 삼으며 잘하려고 무척 애쓰고 노력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때당시 배우자는 서울 국방 정신교육원 교육을 마치고 전방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이삿짐도 꾸려야 하고 형수님과 약속한 두어 달이 한 참 지났기에 배우자가 어머님을 큰 형님 댁에 다시 모셔다 드렸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배우자의 얼굴이 밝지 않았습니다. 형님 댁이 어머니를 모실 수 없는 형편이라며 우리더러 계속 모실 수 없겠냐고 했다는 것입니다. 갑자기 중풍에 치매환자 어머니를 계속 모시라니…….형이 둘이나 있는데 왜 막내아들이 자식도리를 해야 하는지 내 상식으로썬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싫은 내색을 비치자 나에게 미안하다고 달래주기는 커녕 배우자는 되레 나에게 화를 내며, 나는 부모를 등한시 하는 여자와 살 수 없으니 어머니를 못 모시겠으면 이혼하자며 큰 소리를 쳤습니다. 어머니를 다시 모시러 가자는 성화에 못 이겨 이튿날 우리 부부는 형님 댁으로 향했습니다. 배우자와는 말이 통하지 않으니 형수와 이야기를 잘 해 보고 절충안을 찾으려는 생각이었습니다. 큰 형님 댁에 도착해서 어머니가 계신 방문을 여는 순간 어이가 없어 입이 떡 벌어졌습니다. 어머니가 악취 나는 냉골 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오들오들 떨고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해쓱해진 얼굴로 저를 애처롭게 쳐다보시는 어머니를 차마 두고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서, 말없이 어머니 짐을 챙겨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배우자는 발령지로 먼저 떠나고 저는 신혼살림을 챙겨 어머니와 이삿짐 차에 몸을 맡겼습니다. 비포장도로를 뿌연 먼지 날리며 덜컹거리는 차 유리에 비친 제 모습이 너무 처량해 보였습니다. 정든 고향 서울을 떠나 중풍 드신 시어머니를 모시고 시골 타지생활을 할 생각에 어떻게 살아야 하나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남들은 깨가 쏟아지는 신혼이라지만 난 잔뜩 구름 낀 날씨처럼 늘 우울한 나날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서울에서 부모사랑 받으며, 별 어려움 없이 귀하게 자란 새댁이 대소변 못 가리는 시어머니를 모시는 것은 너무나 벅찬 일 이었습니다. 배우자와 잦은 다툼과 형님들에 대한 서운한 마음이 증오가 되어 안 좋은 마음으로 3-4년 중풍 드신 어머니를 모시다 보니 육신과 정신은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골골거리다가 체력이 급격히 떨어져 몸을 가눌 수 없이 아파 몸져누웠는데, 밤만 되면 숨 쉬기가 힘들고 곧 숨이 끊어질 것 같았습니다. 눈을 감으면 다시는 눈을 뜨지 못할 것 같은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 힘겹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는데, 슬픈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어린 두 딸이 보였습니다. '내가 죽으면 불쌍한 딸들은 어쩌나. 아직 내 손이 많이 필요한데…….내가 이렇게 누워있으면 안되지.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난 살아야 해.' 하며 몸을 일으켰습니다. 그때 손에 잡힌 것이 바로 성경책과 묵주였습니다. 살기위해 악착같이 성경책을 읽고 묵주기도를 했습니다. 이 때 특별히“ 어머니가 불명예스러우면 그 자녀들은 비난거리가 된다.”-집회서3.11- 라는 이 말씀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님께서 제 어두운 마음을 새롭게 변화시켜 더 이상 시댁 식구들에게 미움과 증오가 사그라지면서 시부모 모시는 일도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수도가 얼면 시냇가로 빨래를 가져나가 시어머니 똥 빨래와 연년생 아이들 옷가지들을 빨러 얼은 물에 손 빨래를 하고, 치매 걸린 시어머니가 종종 집을 나가시면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찾아다니고, 하루에 한 번 시어머니 목욕시키고 손톱 발톱 깎아드리고, 외출이 안 되니 이발까지 해드리는 일 등은 그리 수월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8년을 꼬박 모셨습니다. 매일 "우리아들, 우리아들, 하며 아들만 찾고, 저년이 나 밥도 안주고 굶겼어."하며 저에게 욕만 하시던 어머니가 갑자기 저를 부르시더니 힘을 다해 내 손을 꼭 잡고 말짱한 정신으로 "그동안 나 땜에 고생 많았다. 정말 고마워. 오늘따라 우리 막내며느리가 예쁘구나. 너 밖에 없어." 라고 말씀하시더니 이튿날 운명하셨습니다. 그동안 어머님과 함께 지내면서 너무 힘겨워 기도 없이는 단 하루도 버틸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은 시어머니를 통해서 제가 신앙인으로 거듭나도록 하여 주셨습니다. 배우자는 20여 년간의 군 생활을 마치고 예편했습니다. 잦은 이사와 객지생활에 몹시 지쳐있던 저는 서울로의 귀향에 '이제 드디어 고생 끝이구나' 하는 홀가분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더 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회경험도 없는 배우자는 처음 상경하여 우리 가족을 햇볕도 제대로 들지 않는 방 두 칸짜리 지하방에 살게 하였습니다. 퇴직금으로 자신의 사업체를 꾸리고 싶었던 남편의 원대한 포부 때문이었습니다. 불행 중 다행이었는지 사회경험도 없던 배우자는 2-3년 만에 사업을 성공시키고 잠실과 논현동에 제법 큰 사업체를 운영했습니다. 저는 감사한 마음으로 레지오에 들어가 단장을 맡으며 충실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저에게 이런 안락하고 부유한 삶을 길게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배우자는 저와 의논 한 마디 없이 시댁 조카에게 주택과 상가건물을 담보 잡아 보증을 서줬고, 조카는 전 재산을 날렸습니다. 엎친데덮친다며 제가 조심하라고 주의를 줬던 회사직원에게 일을 맡겼다가 사기를 당해 배우자의 사업은 모두 부도가 났고, 모든 것을 잃고 말았습니다. 배우자가 저에게는 너무 버거운 존재로 느껴졌습니다. 사업 뒷마무리를 해야 한다면서 법원, 세관, 검찰청으로 다녀야 하기 때문에 돈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혼배성사 때 힘들 때나 괴로울 때나 함께 할 것을 맹세까지 했는데 이제 와서 어쩌겠는가!…….자존심 구겨가며 형제들에게 손을 벌려 배우자에게 돈을 갔다 줬습니다. 그 때 큰 딸은 대학교 2학년, 작은딸은 고3으로 예민한 시기라서 가정 형편을 내색도 하지 못하고 끙끙대며, 연금으로 두 딸의 뒷바라지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2달 안으로 집을 비워달라는 연락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정말 벼랑 끝에 선 착잡한 심정으로 홀로 계신 친정아버지(그 당시 91세)를 뵈러 갔습니다. 어쩐 일인지 현관문이 열려 있고 아버지는 불러도 대답이 없으셨습니다. 방으로 들어가 보니 건장하셨던 아버지는 형상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 지셔서 힘없이 누워계셨습니다. 위층에 큰 오빠 부부가 살았고, 둘째, 셋째 오빠도 근처에 살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건강하고 돈 있을 때는 번갈아 가며 찾아뵙더니, 노환으로 눕게 되자 재산 분배를 한 이후로는 서로 모시는 것을 미루는 모양이었습니다. 시댁이 근본 없는 집이라고 욕했더니, 우리 형제들도 똑같구나. 하는 생각에 화가 치밀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자신을 보러온 딸을 이제야 알아보시고는 "우리 딸 왔어."하시며 떨리는 손을 내밀었습니다. 아버지 손을 잡는 순간 나도 모르게 그동안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져 울고 있는데, "난 괜찮아. 걱정 하지 마."하며 날 위로해 주셨습니다. 순간 이렇게 넋을 놓고 있을 때가 아니지. 하며 정신을 차리고 아버지 먼저 목욕시키고, 수염도 깎아 드리고, 청소, 빨래, 식사를 차려 드리고 집으로 가려는데, 아버지께서 "내일 또 올 거지?"하는 말씀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자존심이고 체면이고 다 버리고 큰 오빠 부부를 만나 사정 이야기를 하며 아버지와 함께 살겠다고 했더니, 내심 반가워하며 우리가족이 이사 오는 걸 허락했습니다. 노환으로 쓰러진 아버지 수발은 쉽지 않았습니다. 온몸에서 파스가 떨어질 날이 없이 살면서도 친정에 큰 소리 한 번 제대로 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를 손수 모실 수 있어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며 극진히 간호했습니다. 어느 날, 저의 기도가 하늘에 닿았는지 아버지는 갑자기 세례를 받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불교신자였던 형제들은 여우같이 제가 꽤서 아버지를 예수쟁이로 만들었다며 저에게 화를 냈습니다. 요셉으로 거듭나신 친정아버지가 평안한 모습으로 하늘나라에 가신 후 저에게는 또 다른 시련이 기다렸습니다. 큰오빠가 아버지 집을 빼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윗집에 살면서 아버지를 내팽개쳤던 사람들이 갑자기 맏자식 도리를 하겠다는데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갈 곳 없는 우리를 길바닥에 자든 말든 나가라는데 정말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마음이 조급해진 저는 매일 절두산 성지로 가서 하느님께 울며 매달렸습니다. 그때 기적처럼 군 생활 시절 배우자의 신세를 졌던 조카에게서 연락이 왔고, 사정을 들은 조카는 우리가 살집을 인천에 마련해 줬습니다. 우리가족은 그동안 버림받았다는 절망에서 빠져나와 하느님의 구원을 느끼며 감사드렸습니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니 중풍 시어머니를 모신 것도, 친정아버지를 영세시키고 평온하신 임종을 맞게 한 것도, 사업 실패로 방황하던 배우자를 사랑할 수 있었던 것 등 등, 모든 것의 원천이 저의 힘이 아닌 자비로우신 주님의 따스하신 돌보심이었음을 고백합니다. 비록 물질적인 면에서는 모든 것을 잃었지만, 항상 우리가족들과 함께하시는 주님의 현존을 확신하는, 큰 믿음을 선물로 받아서, 우리 가족은 주님 안에서 평온한 행복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지금 큰 딸은 성직자 집안에 시집가서 사랑 듬뿍 받으며 행복한 가정생활을 하고 있고, 배우자도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직장에 다니며, 저를 이제까지 고생시켰다는 미안한 마음으로 가톨릭 신학원에 보내주어서 선교사 준비에 여념이 없습니다. 주님, 이렇게 부족한 저를 당신의 사랑받는 딸로 거듭나게 하신 당신은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저의 삶 모두를 당신께 의탁하오니 당신의 뜻을 항상 가장 낮은 자 안에서 이루게 하소서. 그 안에 당신이 계심을 저는 믿습니다.-아멘-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 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 -시편 3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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