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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0715
작성자김용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1-07-14 조회수318 추천수2 반대(0) 신고
2011년 7월 15일 성 보나벤뚜라 주교 학자 기념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1-8

그때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였다.

바리사이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그도 그의 일행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지 않았느냐?

또 안식일에 사제들이 성전에서 안식일을 어겨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율법에서 읽어 본 적이 없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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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살아가는가의 문제에 고민에 고민이 쌓이면 일종의 편견에 사로잡히는 모양입니다. 사람들이 하느님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나 모습들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질책하다 보면 모든 이들이 정말 들어야 할 하느님의 말씀과 그분의 사랑은 꺼내보지도 못하고 그 잘못을 무조건 고쳐주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히는 모습을 발견하곤 합니다. 

하느님의 진리를 아는 것, 깨닫는 것 결국은 그분이 사랑하시는 마음과 모습을 그대로 전해야 하는데, 오히려 모른다고 화를 내고 정작 사랑은 고함소리와 찡그린 얼굴과 함께 전한 것 같아 답답하기만 합니다. 또한 이미 하느님의 나라에 가까운 이들을 만나고서도 그 모습을 간직한 채 웃어주지도 기뻐하지도 못하는 어정쩡하게 바뀌어 버린 모습 때문에 후회가 몰려듭니다.


사랑은 사랑으로 전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모습에서 또 한 번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가끔 우리는 우리 사는 세상을 이스라엘 이천년 전 상황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고 여기곤 하지만, 그래도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세워진 민족인지라 그 안에는 하느님의 오랜 가르침 들이 살아있습니다. 모든 선의 기본에 가장 힘겨운 인생, 고아와 과부에 대한 배려가 있는 나라가 이스라엘이었고 그래서 배고픈 이가 밀 이삭을 씹어 끼니를 해결하는 것을 죄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 나라의 풍습입니다. 그들을 위해 가을걷이 때 떨어진 이삭을 모아 담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것도 그들이 지닌 아름다운 전통입니다. 


이젠 많은 사람들이 아는대로 배고픈 제자들이 밀밭에 들어가 이삭을 뜯은 것이 잘못이진 않습니다. 그런데 심사가 틀린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따지기 시작합니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문제가 된 것은 안식일이었습니다. 하느님이 정하신 대로 지켜야 하는 안식일. 그래서 그날은 먹을 것조차도 가지는 행위를 할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이 알고 있는 안식일 법이었습니다. 그들은 밀밭에 들어선 것을 나무란 것이 아니라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일을 했다는 것에 대해 나무라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그들의 말은 틀렸다고 말할 수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것 중 가장 확실한 법이었으니 말입니다. 그 법은 자신들이 만든 법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나온 것으로 알고 배웠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었으니 제자들의 행동은 하느님 앞에서의 잘못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의 행동에 대해 단 하나의 주제로 설명하시며 하느님의 뜻을 해석해주십니다. 


그것은 '배고픔'입니다. 


배고픔이란 생명과 연결되어있는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먹을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맛있는 것을 먹는다, 무엇이 먹고싶다는 행복의 문제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죽느냐 사느냐가 결정되는 삶의 근본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하느님에게서 나온 법이란 것이 사람의 배고픔 조차 헤아리지 않는, 그야말로 법이라는 칼로 무자르듯 하시는 하느님이신지 생각해보게 하십니다. 그것도 그들이 가장 존경하는 조상 다윗과 그들 중 하느님의 성전에서 일하는 사제들의 생활을 통해서 말입니다. 



다윗과 사제들의 이야기가 하느님의 사람이어서 받는 특혜로 설명되지 않는다면 하느님은 분명 그들을 통해 하느님이 진심은 사람들의 배고픔을 여겨보시며 하느님으로부터 얻어지는 어떠한 것으로도 살리신다는 것을 말합니다. 

반대로 예수님의 예는 죽어가는 이가 안식일에 법을 지키느라 굶어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하느님께 대한 정성으로 보시겠는가의 묻고 있습니다. 단식에는 생명을 담은 의미가 분명 담겨 있지만 삶의 기로에서 허기져 쓰러지는 이들을 살려내는 것이 안식일이라고 해서 하느님의 뜻을 어긴다는 생각은 이치에 맞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하느님을 잔인한 분으로 만들고 우리의 사정이라고는 하나도 헤아리시지 않는 분으로 만드는 생각들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느님을 제대로 아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근본이 바로서야 모든 것이 질서를 잡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잘못헤아리면 우리는 걷잡을 수 없는 판단으로 우리 스스로를 무너뜨리고 결국 하느님께 그 모든 책임을 돌리게 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하느님의 진심을 보았을 때, 그 진심을 모함하고 예외로 만들고 특별함으로 몰아서 편견의 하느님, 편애의 하느님, 특별한 사람들만의 하느님로 만들고 만다는 것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하느님께 나서는 우리에게는 저마다 그 특혜를 받기 위한 희생제물이 들려 있을 것입니다. 


자비. 그것은 사랑이 겹치고 겹쳐서 생기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말에는 나와 상관 없는 이의 사정을 헤아리고 그에게 필요한 것을 챙겨주고 그에게 나의 생명도 나눌 수 있는 사랑이 쉼 새 없이 흘러넘칩니다. 


배고픈 이, 죽어가는 이, 그들에게 교회의 정신은 모든 성사와 모든 은총을 열어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면에 우리는 아직도 그 간절한 생명 앞에서조차 법을 따지는 견고한 틀을 지니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이야기를 배고파 신음하는 이들이 아닌 먹고 싶은 것을 찾아 움직이려는 시도에 불편함을 느끼는 이들이 이용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이 소중한 사랑을 천국마져도 기회를 봐서 살 수 있다는 사람들이 있다는 불안감 때문입니다. 


그러나 상관 없습니다. 그렇게 이용한다 하더라도 그 마지막 판단은 오로지 하느님께 닿아 있으므로 걱정할 필요 없이 그저 제대로 된 사랑을 가르치면 그만입니다. 


배고픈 이들이 주님께 사랑받는 모습을 봅니다. 그들을 보호가 아니라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봅니다. 그분의 그늘에 사는 것이 감사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조차 하느님의 이 크신 사랑을 웃으며 전하지 못하는 모습에서 배고픈 이를 두고 주님께 안식일 이야기를 꺼내는 바리사이의 모습을 봅니다. 주님이 등을 돌리면 여전히 그들의 입속에 든 밀이삭을 두고 죄라고 말할 배부른 안식일의 사람인 듯 싶어 가슴이 저려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십니다. 그분께 바치는 희생제물로 살아가는 이가 그분이 정말 바라시는 자비를 말하는데는 참 많은 용기가 필요한 듯 보입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그 용기를 미루고 미루는 가운데 쌓이고 쌓이는 희생제물 만으로 모든 것을 말하고 나도 잘 안다는 듯 고함으로 사랑을 전하는 말뿐인 투사가 될까하는 걱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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