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나는 레아인가?아니면 라헬인가?(묵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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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정임 | 작성일2011-07-20 | 조회수446 | 추천수6 | 반대(0) 신고 |
+샬롬 샬롬
야곱의 두 부인인 레아와 라헬의 삶을 묵상해 보려고 합니다.
두 여인이 보여주는 삶의 모습이 우리들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레아의 눈은 생기가 없었지만,라헬은 몸매도 예쁘고 모습도 아름다웠다.야곱은 라헬을 사랑하고 있었으므로."(창세29,17)
야곱은 레아를 만나기 전에 라헬을 우물가에서 먼저 만났고,라헬에게 입 맞추고 목 놓아 울었다.(창세29,11) 그 때 이미 사랑은 시작 되었습니다.
저는 두 여인의 모습을 소개하는 이 표현을 눈에 보이는 육체적인 모습이기도 하겠지만 영적인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사랑 받고 있는 라헬의 모습과 사랑 받지 못하고 있는 레아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사랑을 받고 사는 사람의 몸매는 예쁘고 모습도 아름답습니다.
여성은 이성을 사랑하고 사랑 받기 위해 어쨌거나 외모를 관리 하는데 신경을 많이 씁니다. 그래서 사랑을 하면은 예뻐진다고 하는 것입니다.그런데 성경은 왜 라헬의 몸매만 말하고 마음이 아름답다는 말씀은 하지 않을까요?
그 점을 묵상하고 나누려고 합니다.
그러면 왜 레아의 눈은 생기가 없을까요?
"사랑"은 삶의 에너지 입니다. 레아는 야곱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했으므로 당연히 에너지가 부족하니 눈에 생기가 없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삶의 에너지가 부족한 여인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선택했으니 그 길도 나누려고 합니다.
사랑을 받지 못하는 레아가 선택한 길은 오지 않는 사랑의 손길을 원망하는 길이 아니라 자신이 먼저 사랑하는 길입니다. 사랑을 향해 나아갔기에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레아의 신음에 응답해 주셔서 아이들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레아의 삶을 통하여 우리가 무엇을 본받아야 할까요?
우리는 누군가로부터 사랑이 건너오지 않으며 견디기 힘들어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레아가 선택한 길, 원망하고 좌절하는 길이 아니라 자신이 먼저 사랑하는 길이 있음을 오늘 보았습니다.
이번에는 라헬의 삶을 보겠습니다.
라헬은 충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사랑을 누릴 줄 몰랐습니다. 아니 그녀는 그 충분한 사랑을 나눌 수 있어야 했습니다.
자신의 친 언니가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음을 가슴아파 하며 나누는 삶을 살았더라면 몸매 뿐만 아니라 마음씨도 아름다웠다고 성경은 말했을 것입니다.
라헬은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언니를 위로하고,그렇지만 아이의 축복을 받고 있음을 축복해 줄 수 있어야 했습니다.그런데 라헬은 언니를 시샘하였다고 전합니다.(창세30,1) 아마 그 시샘의 극적인 표현이 아버지의 수호신들을 훔쳐 낸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라헬도 하느님께 기도하고 요셉을 선물로 받았으므로 하느님을 믿고 기다리면 되었을 텐데,더 많은 축복을 기대하며 훔친 것으로 보았습니다. 사실 무엇을 훔칠 때는 그것이 탐이 나기에 훔치는 것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라헬은 아버지의 수호신의 힘을 빌려서라도 아이를 더 낳아야 했습니다.그러니 라헬은 자신의 바램을 충분히 채우기 위해 하느님도 섬기고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어떤 신(아버지의 수호신)도 섬기는 마음을 가졌다고 보아집니다.
우리들의 마음 안에도 이러한 부족하고 못난 점이 있습니다. 아들을 좋은 대학에 보내려고 하느님께 기도도 하고 어디 철학관에도 가고 ...이러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마음을 가지고 산다면 이렇게 라헬이 걸어 온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남편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하는 언니가 자식을 많이 선물로 받으면 그것을 축하 해 주는 마음과 자신은 사랑을 충분히 받고 있으니 아들이 하나 밖에 없어도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더라면 라헬은 이 세상에서 아마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라헬이 죽음의 순간에 아들 이름을 "벤 오니"(내 고통의 아들)라고 지은 것은 자신의 전 생애를 함축하고 있는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녀는 베텔을 떠나 에프라타까지는 아직 얼마 더 가야 하는 곳에서 해산을 하게 되었는데 산고가 심했다고 전합니다.(창세35,16-20)
에프라타의 뜻은 "그름져서 열매를 많이 맺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그 기름져서 많은 열매를 맺는 곳에 들어 가지 못하기에 고통이 더 심했다고 보여집니다.
산고가 심해지고 라헬이 두려워 했기에 산파가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하나 그녀는 사는 동안 내내 두려움속에 살았던 삶이었기에 그 두려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자신의 전 생애가 "벤 오니"였다고 고백하고 죽었습니다.
무엇이 라헬을 그토록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게 했을까요?
사랑에 감사하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라헬이 아이를 낳아 주던 낳아 주지 못하던 상관 없이 사랑하는 사람임을 그녀는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우리들이 바로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존재하는 이유로 충분히 주님의 사랑받는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랑에 감사하고,그 사랑을 누리고, 그 사랑을 나누는 삶을 살기를 라헬을 통하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아무튼 야곱의 충만한 사랑을 받은 라헬의 아들 요셉에게서 믿음의 꽃은 절정에 이르나, 예수님은 자신에게 사랑이 흘러오지 않음에도 실망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자신이 그 사랑의 길을 먼저 살려고 애써 준 레아의 아들 유다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깊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라헬은 "기름져서 열매를 많이 맺는다"는 에프라타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 곳으로 가는 길 가에서 죽지만 레아는 훗날 죽에 남편 야곱과 한 무덤에 묻히게 됨을 묵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창세49.31)
형제 여러분 "나는 지금 레아의 삶을 선택했나 라헬의 삶을 선택했나를 솔직하게 묵상해 봅시다."
아멘.알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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