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경은 왜 레베카의 죽음을 침묵하나?(묵상)1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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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정임 | 작성일2011-07-21 | 조회수1,132 | 추천수6 | 반대(0) 신고 |
+샬롬 샬롬
성경은 왜 이사악의 아내 레베카의 죽음에 대하여 말하지 않을까? 그러면서 왜 그녀의 유모는 실명까지 "드보라"라고 밝히면서까지 언제 어디서 죽었다고 구체적으로 말하는 이유는 뭘까?
성경에서 여성의 이름을 부른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현대의 시각으로 보면 아무일도 아니지만 신약의 예수님 시대에도 여성과 아이는 사람
수를 세는 범주에도 들지 못했습니다.마태오 복음서에서"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남자만도 사천 명이었다."(마태15,38)
이러한 관점에서 생각해 볼 때 성조들의 시대에 여성의 이름을 성경에 기록한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특히 "드보라"라는 이름을 가졌다는 사실로 더욱 그렇습니다.
판관기에서 유일하게 여성 판관이 나오는데 그 이름이 "드보라"입니다. 이 드보라 역시 여성이 인간적인 대우를 받지 못했던 시대에 판관으로 일했다는 사실은 성경의 역사에서 매우 충격적인 보도입니다.
두 여성이 같은 이름을 가졌다는 사실로 미루어 짐작하면 판관 드보라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레베카의 유모 드보라가 성조사에서 한 역활이 나름대로 중요한 몫을 차지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다 그렇지만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이름은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들에게 있어 이름은 부르기 위한 목적 이상의 의미로 바로 그 사람의 "소명"이되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들의 이름과 그들이 맡은 소명이 같았음을 아실 것입니다. 더 확실하게 "예수"라는 뜻과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같음을 아실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레베카의 유모인 드보라가 성조사에서 크지는 않아도 어떤 역활을 했다고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그 역활이 무엇이었나를 묵상해 보고 나누려고 합니다.
이 내용은 저의 개인적인 묵상이지 성경 해설이 아님을 밝혀 드립니다.
"드보라"의 뜻은 "꿀벌"입니다.
아마도 일생이 이름과 같이 "꿀벌"처럼 살았으리라 짐작됩니다.
꿀벌은 일생 동안 부지런히 꿀을 모아 우리 인간에게 "달콤함"을 선사합니다. 그 작은 꿀벌이 얼마나 부지런히 그리고 열심히 애써야 했을까요?
드보라의 꿀벌과 같은 삶을 묵상해 봅시다.
드보라는 레베카가 고향을 떠나 시집 올 때 같이 왔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누이 레베카와 그의 유모를 아브라함의 종과 그 일행과 함께 보내면서,레베카에게 축복하였다."(창세24,59)
이 외에 드보라가 어떤 일을 했는지에 대하여 전하는 바는 없고 세월이 많이 흐르고 그녀가 야곱을 따라다니며 살다가 야곱 곁에서 죽었다고 전합니다.
"그때 레베카의 유모 드보라가 죽어,베텔 아래에 있는 참나무 밑에 묻혔다. 그래서 그곳의 이름을 알론 바쿳이라 하였다."(창세34,31)
"알론 바쿳"의 뜻은 "통곡의 참나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떠날 때 드보라가 같이 갔다는 이야기가 없는데 어떻게 야곱과 함께 있다가 죽었을까?
이것이 레베카의 최후를 유추할 근거로 저는 묵상했습니다.
야곱은 어째서 자신의 유모 드보라의 죽음 앞에서 그렇게 "통곡"해야만 했을까? 그 통곡의 이유가 오늘 묵상의 주제와 연결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또 한가지 성경에서 어떤 사건과 결부하여 그 지명을 말한다는 사실은 아주 큰 의미를 지닙니다. 주로 하느님과 관련되는 사건에서 그 사건의 의미에 맞추어 그곳의 이름을 명명 하고 있는데(창세28,10-19참조) 아무런 기사도 없는 그것도 여성이며 일개 유모의 죽음을 전하며 이렇게 거창하게 말하는 이유는 뭘가? 그것이 궁금합니다. 그리고 또 야곱이 그녀의 죽음 앞에서 통곡을 했다는 사실에서 묵상의 요점을 풀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먼저 왜 이사악과 레베카가 두 아들을 각기 사랑했을까를 묵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묵상의 중요한 열쇠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악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여 에사우를 사랑하였고,레베카는 야곱을 사랑하였다."(창세25,28)
이 대목을 글자 그대로 묵상하시면 그 의미를 알아듣기 어렵습니다. 비단 이 대목 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가 그렇습니다. 항상 이중적 의미가 있음을 염두에 두시고 묵상하시면 참 좋습니다.
그렇다면 이사악은 왜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여 에사우를 사랑하게 되었을까?
이것을 이해하려면 이사악의 인생 안에서,또는 우리들의 인생 안에서 "나는 누구인가"를 깊이 볼 수 있는 눈이 뜨여야 이해가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성장 과정에서 "인격"이 형성됩니다.
이사악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비롯하여 모든 사람의 사랑 속에서 성장한 사람으로 특별한 문제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없는듯 보이는 그의 인생에 아주 크고 충격적인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믿음을 시험 받는 단계에서 본의 아니게 희생양이 되는 사건(창세22,1-19참조.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다.)을 치루며 그 사건으로 받은 상처로 인해 그의 인생이 꼬이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토대로 본 이사악의 성품은 아마 아주 "내성적이며 순종적"인 성격을 가졌으리라고 봅니다. 굳이 그 당시의 나이를 계산하지 않아도 장작을 지고 산을 올라갈 수 있는 나이(창세22,6)였다고 볼 때 어른은 아니라해도 적어도 어린 아이는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토대로 생각해 볼 때 그가 내성적이고 순종적인 사람이 아니었다면,장작 위에서 죽을 것을 뻔히 알고 멀리 도망쳤을 것입니다. 아니 장작위에 눕지도 않았겠지만 제물 없이 장작을 지고 가다 눈치채고 피하려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께 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사건은 해피 엔딩으로 끝이나지만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고,이사악은 그 일로 가슴에 지울 수 없는 아주 큰 상처를 안고 살아야 했음을 보아야 그가 에사우를 사랑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부모는 자신의 성격과 똑 닮은 자녀를 자기도 모르게 미워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그가 미워서가 아니라, 자신을 닮은 성격을 지니고 자신과 비슷한 인생을 걸어갈 것 같아서 그런 반응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야곱이 자신의 성격을 닮았던 것입니다. 반대로 에사우는 자신이 가지지 못한 성격으로 매우 남성적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동경하는 성향이 많은 관계로 아마 이사악이 에사우를 더 많이 좋아한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이사악이 단지 에사우를 더 많이 사랑했다는 이유로 레베카는 야곱을 더 사랑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그보다 더 원초적인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이사악은 제물로 바쳐지기 위에서 누워 있던 그 때에 받았던 상처로 인해 자신의 신변에 죽음의 그림자만 보여도 기겁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악은
기근이 들어 필리스티아 임금 아비멜렉에게 갔을 때에 레베카가 예뻐서 그곳 사내들이 레베카 때문에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자기 아내를 "내 누이요"라고 말합니다.(창세261-11참조)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도 이와 같이 처신을 한 경우가 있지만 그래도 아브라함은 사전에 미리 사라에게 말해 두었기에 그 문제로 부부의 금슬에 금이 가지는 않았지만(창세20,13참조)레베카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레베카의 모습에서 우리들의 모습을 봅니다.
레베카는 이사악에게서 분명 자신이 겪었던 많은 인생의 이야기들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레베카는 그것을 토대로 남편의 상처들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 레베카가 이사악의 상처를 깊게 보았고, 그 상처로 인하여 죽음이라는 공포 앞에서 이사악이 그렇게 처신 할 수 밖에 없는 나약한 인간이라는 점을 이해하는 깊이가 있었다면 부부의 금슬이 깨지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 부분의 묵상을 잘 하기만 해도 인생을 잘 살기에 부족하지 않습니다. 지금의 그 사람의 모습을 이해하는 힘은 그의 어릴적 성장 과정을 깊이 이해하는 힘이 있어야하고, 그보다 앞서 선행 되어야 하는 것은 물론 자신을 이해하고,그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나"라는 사람의 "한계와 나약함"을 인정할 수 있을 때에야 "남"도 그렇다고 인정할 힘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 힘이 바탕이 되어야 "타인의 허물"이 이해되고 이해되므로 "용서"할 힘이 생겨 관계가 깨지지 않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자신을 누이라고 말하는 남편을 곱게 보지 않은 이유로 사랑에 금이 갔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저가 살자고 아내를 누이라고 할 수 있어?" 레베카의 마음이 이렇지 않았을까요?
이러한 마음은 상대를 미워하도록 이끌어 갈 것입니다.그러므로 인간은 어떠한 마음을 가슴에 품고 사느냐에 따라 자신의 인생을 완성하고 열매를 맺어감을 오늘 레베카의 삶의 묵상을 통하여 배우고 깨달아 살아내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보았듯이 레베카의 마음에 금이 가지 않았다면 자식 문제를 남편과 의논했을 것입니다.
레베카가 남편의 말을 "엿듯고"(창세27,4)일을 꾸민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레베카의 마음 상태가 분명 건강한 상태는 아닙니다.
이제 레베카를 묵상해 보아야 드보라가 어떤 역활을 했을까를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앞에서 나누었듯이 이사악이 자기와 다른 성격을 가진 에사우를 야곱보다 더 사랑하자 레베카는 남편에게 서운한 마음이 든 상태여서 더욱 야곱을 더 사랑하게 되었을 것이라 보여집니다. 사람의 마음은 한번 소원해지면 계속적으로 인생을 부정적인 방향으로 끌고 가게 마련인데 레베카가 그렇게 살다가 실패한 사람으로 묵상해 본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어디까지나 저 개인의 묵상입니다.
목적이 아무리 "선해서 그것이 하느님의 일"이라 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부정한 방법으로 그 일을 하는 것을 달가워 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레베카가 그렇게 살았다는 사실을 보아야 합니다.
한 가지 거짓말을 하면 그 거짓말을 덮으려고 두 가지를 해야하고, 두 가지를 덮으려면 네 가지...이렇게 거짓말을 상상을 초월하게 해야 됨으로 그 사람의 인생은 거짓으로 인하여 항폐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레베카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알았으며 그 결과로 자신이 얻을 것이 무엇인지 자신의 입으로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까?
"혹시나 아버지께서 저를 만져 보시면,제가 그분을 놀리는 것처럼 되어 축복은 커녕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말하였다. 내 아들아,네가 받을 저주는 내가 받으마.너는 그저 내 말을 듣고,가서 짐승이나 끌고 오너라."(창세27,12-13)
자세히 보면 레베카는 사람을 속이는 것을 넘어 하느님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이 사건이 하느님의 축복과 관련이 있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레베카의 심중에 이미 "미움"이 도사리고 있기에 하느님의 두려움을 뒤로 미루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을 속이는 자가 받아야할 것이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있으며서도 그것을 멈추지 못하고 있습니다.이러한 마음은 상대방을 미워하는 마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상대에게 상처를 깊게 주려고 하는데서 나온다고 봅니다.
사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가지 않았어도 형 에사오가 당장 죽이는 위험한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에사우는 아버지가 야곱에게 해 준 축복 때문에 앙심을 품었다.그래서 에사오는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하게 될 날도 멀지 않았으니,그때에 아우 야곱을
죽여 버려야지.'하고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레베카는 아들 에사우가 한 말을 전해 듣고는."(창세27,41-42)
사실 이 사건 이후에도 이사악은 오래 살았습니다. 두 아들이 화해한 후에 죽기(창세35,27-29) 때문입니다. 에사오가 앙심을 품은 것은 사실이나 자신을 사랑하는 아버지를 가슴아프게 할 수 없어서 아버지가 죽은 후로 미루고 있으며, 야곱이 받은 장자권이 세상적인 부귀 영화의 축복이 아니기에 당장 축복의 표징이 드러나지도 않을뿐더러 에사우는 이미 장자권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창세25,34)
에사오가 맏아들 권리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는 했으나,그것을 거부하지는 않았고, 그것이 무엇이든 축복은 좋은 것이므로 주면 받아 놓아도 괞찮다 싶은 정도였지만 막상 동생이 가로챘다니까 억울하고 미웠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는 야곱을 자신의 아우라고 말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짐작해도 금방 죽인다고 볼 수 없습니다.
더 주의 깊게 본다면 에사오는 분명 "속으로 생각"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레베카는 어떻게 에사오의 말을 전해 들을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들은 것으로 보여집니다. 속이는 결과로 받을 저주의 불안을 가슴에 안고 살아갈 그녀에게 들려오는 소리는 이제부터 "죽음"뿐이라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그녀가 들은 소리는 "사탄"의 소리였다는 것입니다.
거짓의 아비요,속이는 자의 아비인 사탄의 손을 붙잡고 있는한 그녀는 "죽음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가리옷 사람 유다"가 그렇게 걸어 가다가 "자살"하고 말았음을 잘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한 가지 자신의 속셈을 성취한 레베카는 또 다른 속셈을 성취 시키고자 또 다른 일을 꾀하기 시작합니다. 야곱을 피신시킬 목적을 위해서 레베카는 일을 시작합니다. 사탄의 말을 듣고 사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언제나 부정적이고 좋지 않은 말들입니다. 들어 보십시오.
"레베카가 이사악에게 말하였다.'나는 히타이트 여자들 때문에 살기가 싫어졌어요.만일 야곱마저 이 땅에 사는 저런 히타이트 여자들 가운데에서 아내를 맞아들인다면, 내가 어찌 살겠습니까?'"(창세27,46)
자신의 입에서 내 뱉는 말들은 곧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레베카는 이제 자신의 입에서 "살기가 싫어졌다,내가 어찌 살겠냐?"는 등의 말들을 쏟아내며 살게 될 것입니다.
속담에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레베카는 사람을 미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사우가 히타이트 사람의 딸과 결혼을
햐였습니다. 그것도 두 아내를 맞아들였습니다. 원래 신랑이 미우면 신랑과 관련된 모든 것이 밉기 마련인데,에사우를 사랑하는 이사악이 미우니 히타이트 며느리가 곱게 보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런 히타이트 여자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레베카가 정상적인 사고를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구체적으로 히타이트 며느리들이 어째 어째 좋지 않은 면들이 있으므로 안 된다고 말했어야 하지 않을까요? 아니면 더욱 안되는 이유를 말하던지요.
"하느님께서 이방인 며느리를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차마 이 말은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말하면 이사악이 자기가 어떤 일을 했는지 알꺼라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묵상하며 한가지 더 분명해 지는 사건이 있습니다.
주제가 옆으로 가지만 나누어 보겠습니다.
야곱이 에사우의 복을 가로채기 이전에 이미 에사우가 히타이트의 두 아내와 결혼(창세26,34-35)을 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장자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이사악이 어째서 이방인 며느리를 허락했을까요?
자신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무슨 이유로 자신의 고향에서,그것도 한 핏줄의 아내를 얻어준 이유를 잘 아는 그가 그것도 무지 사랑하는 아들인 에사우가 이방인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는 것에 한마디 반대도 없었다는 사실은 아주 중요하고 확실한 메세지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곧 에사우는 장자권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아버지 아브라함의 고백인 것입니다.
그리고 어쨌거나 장자권을 승계한 야곱에게 "너는 가나안 여자들 가운데에서 아내를 맞아들이지 마라."고 합니다. 이 말은 장자권을 승계한 사람이기에 너는 그러면 안 된다는 뜻이 됩니다. 그리고 왜 그래야 하는지를 설명함과 동시에 장자권을 승계한 야곱이 누릴 구체적인 축복을 해 줍니다.
"그분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을 너와 네 후손에게 내리시어,네가 나그네살이하는 이 땅,곧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이 땅을 네가 차지하게 될 것이다."(창세28,1-5참조)
위의 사실을 종합해 묵상해 보아도 이사악이 이미 야곱인 것을 알고 축복해 주었다는 증거가 됩니다.
1부는 여기서 마치고 2부에서 본격적으로 레베카의 유모 드보라의 묵상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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