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야고보와 요한은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I can do it!”, “I can do it!”합니다.
자신감의 표현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정말 야고보의 형제들은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이 기능의 문제이고,
능력의 문제라면 자신감을 가질 수 있고,
그런 자신감을 가지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할 수 있는데도 지레 못한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아예 시작도 못하는 패배주의를
극복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할 수 있다고 한 것은
수난의 잔을 마시는 것인데,
수난의 잔을 마시는 것은
기술의 문제도, 능력의 문제도 아닙니다.
굳이 능력의 문제라고 한다면 사랑의 능력입니다.
사랑만큼 고통을 감수하고
사랑만큼 고통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사랑이 없으면
누구도 고통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나와 아무 상관없는 길가는 사람,
그래서 아무런 사랑이 없는 사람에게 물을 주기 위해
내가 이 무더위에 찬물을 들고
길가에 서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고통은커녕
작은 수고도 할 마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남편이
꼴도 보기 싫을 정도로 미우면
물 한 잔 청해도 “손이 없어요,
발이 없어요?”하고 거절할 것입니다.
그러니 수난의 잔을 마시는 문제는
“I can”의 문제가 아니라
“I will”의 문제가 먼저입니다.
할 수 있는지를 따지기에 앞서
할 마음과 의지가 있는지를 먼저 따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할 마음이 있다면
할 수 있는지를 봐야 하는데
이 역시 사랑의 문제입니다.
사랑만큼 고통 감수 의지가 있고
사랑만큼 고통 감당 능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야고보의 형제는
수난의 잔을 마실 의지가 있었을까요?
마실 능력은 있었습니까?
이어지는 얘기를 보면 그가 마시려고 했던 것은
수난의 잔이 아니라 영광의 잔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수난의 잔을 마시게 되자
야고보는 도망쳐 버린 것이지요.
그런 그가 그러면 어떻게
수난의 잔을 마실 수 있게 되었을까요?
어떻게 제일 먼저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게 되었을까요?
"I can"이라고 하지 않고
"I can't"라고 하였기 때문이고,
"I can't"라고 하였지만
"I will not"라고 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려고 하나
제가 할 수 없다고 하였기 때문이고,
할 수 없으니 할 수 있도록
힘을 달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야고보 사도가 유다와 다른 점은
똑 같이 수난의 잔을 거부했지만,
배반의 수치스러움과 죄스러움을
겸손으로 견딘 점입니다.
유다는 수난의 잔을 함께 마실 의지도
함께 마실 수도 없었던
자신의 그 치욕스러움을 못 견디었지만
야고보는 그 치욕스러움이
바로 자기의 것임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너도 마시게 될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에 희망을 걸었고,
주님께 그 힘을 달라고 청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 힘을 주신 것입니다.
성령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사랑의 성령입니다.
없다는 사람에게 하느님은 주시니
사랑 없다는 사람에게
하느님은 당신의 사랑,
성령을 주신 것입니다.
- 김찬선(레오나르도)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