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티 성지 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찬미예수님
이제 지리하던 장마도 끝에 다가서고 있습니다.
장마철이라도 가끔은 빨래라도 말릴 수 있게끔 하느님께서
이렇게 햇빛을 중간 중간에 주시지요?
그래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신가!
하는 것을 체험하게 합니다.
성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편애라기보다는 특별히 사랑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형제들이었는데... 마리아와 마르타, 나자로라고 하는....
편애와 사랑은 조금 다른 것 같아요.
얼핏 보면 예수님이 이 세 남매를 특별히 사랑하신 것처럼 느껴집니다.
오늘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다가 편한 집,
마리아와 마르타 나자로가 살고 있는 집에 들르십니다.
분명히 편한 집이 있습니다.
그리고 불편한 집이 있습니다.
편한 집은 집의 모양이 편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 들어 사는 인간들이 편하기 때문에
그 집이 편하다고 할 겁니다.
다 쓰러져가는 하꼬방이라고 해도 따뜻한 집이 있습니다.
평화가 있는 집이 있습니다.
기쁨이 있는 집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래 머무르고 싶은 집이 있습니다.
이런 집이 편합니다.
불편한 집이 있습니다.
으리으리한 대저택이라고 하더라도 차갑습니다.
가족들이 교만합니다.
부모서부터 자식들서부터~~
심지어는 기르는 개까지 교만합니다.^^
식구 몇 안 되는 데도 서로 ‘무조건 니 탓이다!’
손가락질만 하고 살지~~
그런 집구석은 오래 앉아 있고 싶지 않습니다.
예수님에게 편한 집은 사제들에게도 편합니다.
사람 차별이 아니라 그냥 쉬고 싶은 집이 있습니다.
감곡에 있냐구요!
물론 있을 겁니다.
저는 사제 생활 하면서 원칙이 있습니다.
본당신부를 하는 기간 동안에는 아무리 편한 집이라도 찾아가지 않습니다.
왜?
하도 말이 많은 세상이라~~
신부님이 어제께 밤에 어느 집에서 새벽 두 시까지 퍼마시고 갔대~~
그 얘기가 뻥튀기처럼 돌고 돌아서 희한하게 들립니다.
저는 이제껏 사제생활 하면서... 그 본당을 떠나서는 그 옆을 지나가다
편하게 들러서 밥을 얻어먹고 잠을 자고 가는 한이 있어도....
적어도 그 본당에 있는 동안에는 공식적인 가정방문 외에는 신자 집을
찾아가지 않습니다.
감곡신자들 신부님이랑 나랑 많이 가까워 졌는데도 왜 우리 집에 안 오실까!
서운해 하지 마십시오!
생각이 있어서 그럽니다.
아무튼 예수님께서 특별히 이 세 자매를 사랑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성서에 보면 나자로가 죽었을 때 그렇게 슬피 우셨고
부활시켜주기까지 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이 찾아갔던 이 날은 너무너무 피곤하셔서
몇 시간만이라도 사람들과 떨어져서 쉬고 싶으셨을 겁니다.
저도 체험을 많이 합니다만 밖에서 말을 많이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집에 들어오면 말수가 적어진다고 합니다.
개그맨이라든지...앵커라든지....
아무튼 말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집에 들어오면 말이 적어진다고
그럽니다.
이해가 갑니다.
피정을 많이 하다 보면 입에서 단내가 나지요.
사제관에 와서는 말하기가 싫어집니다.
그냥 조용히 편하니....말하지 않고 쉬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마음을 마르타는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저 오시기만 하면 반가우니까 대접해 드릴 음식을 장만하느라
부산을 떱니다.
예수님이 특별히 좋아하시는 삼겹살을 준비합니다.
녹두부침개를 부치고 우리밀로 만든 막걸리를 준비합니다.
또 가까운 데서 광어회를 떠다가 상다리가 부러지게 준비합니다.
자기 딴에는 정성을 다해서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르타의 그 친절은 자기 위주, 자기중심의 친절이었습니다.
자기중심으로 우리는 친절을 베풀 때가 얼마나 많은가!
자기중심으로 자식을 사랑합니다.
자기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자기중심으로 구역모임을 합니다.
자기중심의 친절은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 아니라
불편함을 줄 때도 상당히 많습니다.
특별히 가까운 사람일수록 자기중심의 자기위주의
사랑을 베푼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받아들이지 않을 때는
“왜 안 받아들여~~ 내가 얼마나 너한테 사랑을 쏟고 정성을 쏟는데....”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자기중심의 사랑을 강요하기 때문에~~
상대편에는 오히려 상처가 되는 것이지 기쁨으로 와 닿지 않습니다.
마르타는 자기위주로 예수님께 어떻게 해서든지 기쁨을 드리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마르타가 동생 마리아를 보니까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지가 무슨 공주인양~~
우아하게 턱을 받치고~~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 말만 듣고 있는 거예요.
속에서 그냥 부아가 확 치밀어 오르지요~~
나는 손이 두 개라도 모자라서 바빠 죽겠는데~~
저 싸가지 없는 것은 말이야~~
지가 무슨 공주라고 턱 받치고 앉아서~~
언니를 도와주지 주지도 않고~~
마음 같아서는 쫓아가서 귀퉁뱅이라도 걷어 올리고 싶지만
예수님 앞이라 차마 그럴 수도 없고....그래서 일르지요?
“제 동생이 일을 저에게만 떠맡기는데 예수님, 가만 두시렵니까?
저를 좀 거들어 주라고 하세요.”
그러면 예수님이 역성 들어주실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너무 지치고 힘들어서 입맛, 밥맛, 혀맛이
다 떨어져 있는 상태였고 그냥 조용히 앉아 있고 싶었습니다.
대화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교우 집에 가정방문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루에 3~40집을 돌아야 되기 때문에~~
한 집에 머무는 시간이 불과 5~78분밖에 안 됩니다.
그 짧은 시간에 교적을 보면서 뭔가 대화를 하고 나가고 싶은데...
집에 들어가면 “이리와 앉으세요.” 해도 앉지 않고
“신부님 뭐 잘 드세요?”
부엌에 들어가서 연신 쿠당탕쿠당탕 거리면서
“빨리 와 ~~ 물 먹으러 온 게 아니야 빨리 빨리 해야 해 ”
싸이클이 맞지 않는 겁니다.
예수님도 아마 그러셨을 거 아닌가?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의 역성을 들어 주기는 커녕
오히려 마르타가 듣기에 서운한 말을 하셨지요?
“마르타~~마르타~~”
두 번이나 부릅니다.
<너는 많은 일에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가지다...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그것 절대 빼앗지 말아라!>
오늘 내가 너희 집에 온 것은 삼겹살 먹으러 온 것이 아니라~~
밥맛도 없어~~
너무 피곤해서~~
나는 니들이랑 이야기하러 왔는데 왜 이렇게 부산을 떠느냐~~
마리아가 내 마음을 읽은 것이다...니 동생의 몫을 빼앗지 말아라!
마르타를 흔히 활동하는 인간으로 표현합니다.
마리아는 기도하는 사람으로 이야기 합니다.
교회는 분명히 이 두 사람의 모습이 다 필요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순서는 있습니다.
먼저 마리아처럼 기도하는 인간이 되고 난 후에
마르타처럼 행동으로 보여야 됩니다.
거듭거듭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기도가 밑바탕으로 되어 있지 않은 교회의 모든 활동은 분명히 오래 가지 못합니다.
체면 때문에 하게 되고 교만해집니다.
먼저 마리아처럼 예수님 곁에 머물면서 듣고 묵상하면서
내 자신이 먼저 은총으로 적셔지고 그 적셔진 물이 흘러넘쳐서
예수님처럼 봉사하는 사람으로 되어야 하는데 마르타는 순서를 몰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분별이 필요한 것이죠?
러시아의 어느 철학자는 예수님을 단 두 마디로 표현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고독하면서 동시에 사회적인 인간이었다>
우리들은 분명히 고독해야 됩니다.
고독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야 됩니다.
고독은 이성을 찾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외롭다는 것과 뜻이 다릅니다.
사제는 고독한 존재지..외로운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신자들은 사제에게서 고독을 보아야 됩니다.
‘우리 신부님 외로워 보여~~ ’
그건 욕하는 겁니다.
고독은 사제든, 누구에게든 반드시 필요합니다.
고독을 통해서 얻은 영적 에너지를 가지고
동시에 이웃에게 나누어 줘야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일컬어서 고독하며 사회적인 인간이다!
여러분들 머릿속에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계시죠?
그것 해결하는 것을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필요한 것은 두 가지가 아니라 한 가지입니다.
<내 곁에 머물러라! 그리고 기도해라!>
왜 딴 데다 신경을 쓰느냐~~
지금 니 집안에 일어난 이 문제, 니 문제....
내 곁에만 머물러 봐라!
세상 방법 쓰기 전에 먼저 기도부터 하십시오!
인간은 기도로써 강해지고 하느님은 기도로써 약해지십니다. 아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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