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예수님을 가슴에 모시고 산다면- 반영억라파엘신부-(요한 11,19-2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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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 | 작성일2011-07-29 | 조회수462 | 추천수6 | 반대(0) 신고 |
2011년 7월 29일 금요일 성녀 마르타 기념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말씀의 초대 모든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온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고 하느님 사랑을 맛보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을 통하여 당신 자신을 사랑의 하느님으로 계시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끌어 주신다. 라자로를 죽음에서 일으키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느님께 권능을 부여받으셨음을 드러내시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에게 충만한 생명을 주시고 마지막 날에 그들을 살리신다(복음).
마르타의 오빠 라자로가 죽었습니다. 마르타는 하나밖에 없는 오빠를 잃었기 때문에 그 슬픔은 누구보다도 깊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반쯤은 볼멘 소리이고, 반쯤은 원망에 가깝습니다. 주님께서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고 하시는 말씀에도 가시 돋친 대답을 합니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마르타의 소망은 오빠가 지금 여기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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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사랑에는 여러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그리스 철학은 이기적 사랑인 에피튜미아, 성적 사랑인 에로스, 그리고 헌신적 사랑인 아가페를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처음엔 대부분 자기의 이기심 때문에 다른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러면서 서서히 헌신적 사랑으로 완성시켜 나갑니다. 우리는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님의 모습에서 헌신적 사랑을 봅니다. 그리고 이러한 부모님의 사랑에서 하느님의 헌신적 사랑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을 위하여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기꺼이 희생 제물로 내주신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그분의 사랑은 그분께서 보여 주신 사랑에 견주면 아주 미미합니다. 그분의 사랑을 모두 이해하려는 우리의 노력은 어쩌면 조개껍질로 바닷물을 담으려는 무모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랑만이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가슴에 모시고 산다면 - 반영억라파엘신부- 84세 된 할아버지께서 20년 전 돌아가신 부인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돌아가신 부인은 할아버지께 “집 담장밖에 금불상이 묻혀있으니 꼭 그 불상을 찾아라.”고 하셨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부인의 뜻에 따라 20년 동안 열심히 땅을 파고 돌을 깨내며 매일 매일 정성을 쏟았습니다. 그러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일을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께서는 “그래도 일할 때가 제일 행복했어. 건강이 회복되면 그 일을 계속 할꺼야. 할머니는 살면서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어”하셨습니다.
거짓이 없었던 부인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큰가를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부인이 할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랑했기에 마지막으로 거짓말을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꿈을 주기 위해서, 희망을 주기 위해서 마지막 사랑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할머니께서 남겨준 일이 곧 행복입니다. 우리도 그러한 꿈을 줄 수 있는 삶을 살았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봅니다.
사랑을 고백하려면 진지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마음을 제대로 읽을 수 있습니다. 또 마음은 있지만 표현하지 않으면 그 진심을 놓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되면 적극적으로 마음을 표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상대방도 깊이 헤아려 볼 것입니다.
마르타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활동적이고(루가10,38이하) 힘찬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마중 나간 것은 역시 마리아가 아니라 마르타입니다. 그가 예수께 한 말씀 드립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잇습니다.”(요한 11,21-22).
마르타는 울며불며 살려 달라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다 이루어 주실 것을 믿고 맡겼습니다. 그것이 그의 믿음입니다. 어려움에 닥쳤지만 자신의 마음을 전했으면 그 다음은 주님 몫인 것입니다. 스승에 대한 신뢰, 믿음이 있는 만큼 마음과 마음이 통하여 하나가 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의 바람을 충족시켜 줍니다.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요한11,23). 이 말씀을 듣고 마르타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하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곧 일어날 일로 말씀하셨지만 마르타는 먼 훗날에 일어날 일로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마르타의 마음 안에 마지막 날의 부활만을 생각하는 선입견이 자리한 탓입니다.
예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11,25-26) 라고 하셨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계시는 지금 여기서 이루어지는 부활과 생명입니다. 죽은 다음에만 얻을 수 있는 생명이 아니라, 지금 현세와 현세를 넘어서 풍부하게 얻을 수 있는 생명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지금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생명 없이 영원한 생명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순간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순간이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 곧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단순히 육신의 죽음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가슴에 제대로 모시고 산다면 매일이 생명입니다. 매일 매일 부활의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사랑이 있으면 주님을 만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4,8)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1요한 4,17).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꿈을 허락하셨습니다. 그 꿈을 놓치지 않길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할머니께서 할아버지를 사랑하신 것보다 더 큰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얼마나 좋으신지 보고 맛들이시기 바랍니다.
할아버지 마음이 늘 할머니로 가득 차 있듯이 우리의 마음이 늘 주님을 향한 마음으로 가득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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