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 3일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Please, Lord, for even the dogs eat the scraps
that fall from the table of their masters.”
Then Jesus said to her in reply,
“O woman, great is your faith!
Let it be done for you as you wish.”
And her daughter was healed from that hour.
(Mt.15,27-28)
제1독서 민수기 13,1-2.25ㅡ14,1.26-30.34-35
이 세상에 이름을 널리 알린 사람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정말로 대단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의 능력과 재능 그리고 그들이 쌓아올린 업적에 우리들은 감탄합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처음부터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을까요?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들 역시 어렵고 힘든 시련의 시기가 있었음을 많이 접하게 됩니다. 또한 사람들의 인정을 받지 못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을 정도로 끝없는 절망의 시간을 체험했다는 이야기도 많이 듣습니다.
어쩌면 위대한 사람들은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 아닐까요? 어떠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사람, 좌절의 시간에서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나 다시 한 발을 내 딛는 사람, 절망보다는 희망을 간직하면서 살아가는 사람. ‘자기가 노력한 게 스스로를 감동하게 만들 정도가 되어야 그게 정말로 노력하는 것이다.’라는 조정래 선생님의 말씀처럼 스스로를 감동시킬 정도의 노력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세상에서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위대한 사람의 몫은 항상 다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일까요? 내 자신은 이 세상의 주인으로서 위대한 사람의 몫을 절대로 할 수 없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우리 각자 모두는 이 세상의 주인으로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쉽게 포기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만을 부러워하고 있기 때문에, 나를 지켜주시는 주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들이 차지할 위대한 사람의 자리에서 점점 멀어지고만 있을 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들은 사랑 그 자체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아주 냉정하신 주님의 모습이지요. 심지어 강아지에 비유하면서 모독적인 말까지 하십니다. 하지만 이 모든 말을 들은 당사자인 이방인 여인은 어떠했습니까? ‘더럽고 치사하다. 나를 무시해도 유분수지…….’하면서 욕을 퍼붓고 예수님을 떠났나요? 아닙니다.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또 예수님께서 모독적인 언사로 쫓아내려 해도 상관없이 포기하지 않고 큰 소리로 도움을 청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 안에서도 이러한 일들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체험하는 고통과 시련의 시간들, 사람들로부터 쏟아지는 비판들, 내가 한 일에 대한 절망적인 실패의 경험들……. 그 모든 것들이 바로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가나안 여인의 아픔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모든 것에 굴복하지 않고 힘내어 끝까지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으로부터 가나안 여인에게 하셨던 희망의 말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포기하지 마십시오. 포기는 배추 셀 때에나 쓰라고 누가 그러죠?
실패란 일종의 교육이다. 사고할 줄 하는 사람은 실패에서 많은 것을 배운다.(존 듀이)
삶의 의미 찾기
인천대공원 근처의 거대한 은행나무. 이 나무는 처음부터 이렇게 컸을까요?
어느 책에서 읽고 스크랩을 했는데, 어떤 책인지 모르겠네요. 좋은 내용인 것 같아서 그대로 적어 봅니다.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 박사의 이야기다. 어느 날 의과 대학 시절의 은사가 박사를 찾아왔다. 얼마 전 부인을 잃은 그는 매우 힘없고 우울해 보였다. 상실감을 견디기 힘들다며 자살을 생각하고 있었다.
“프랭클, 아내 없이는 더 이상 못 견디겠어.”
두 사람의 금실이 유난히 좋았기에 프랭클도 은사의 슬픔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고민하던 그에게 문득 생각이 떠올랐다.
“교수님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여쭙고 싶습니다. 만일 교수님이 먼저 돌아가시고 사모님이 살아 계신다면 지금의 고통을 과연 누가 견뎌야 했을까요?”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노교수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는 곧 말했다.
“차라리 내가 당하는 게 낫지. 그 사람은 나보다 못 견뎠을 거야.”
노 교수는 일어나 방을 나갔다. 들어올 때와 달리 힘 있게 악수까지 나눴다. 프랭클은 노 교수에게 훌륭한 안과 의사 역할을 했다. 볼 수 없던 것을 보게 해 주었다. 사별의 고통을 견뎌야 할 이유를 볼 수 있게 도와준 것이다. 노 교수가 지금 당하고 있는 고통의 의미는 ‘나는 아내가 당할 지독한 사별의 아픔을 대신 겪고 있는 것’이었다. 노 교수는 의미를 찾고 살아갈 힘을 얻게 되었다.
노 교수의 경우처럼 고통 그 자체도 삶의 의미일 수 있다. 철학자 니체는 “고통의 의미를 발견하면 이미 고통은 고통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삶의 의미가 행복하고 화려할 필요는 없다.
삶의 의미는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다. 삶이 힘들고 무기력해질 때 자신에 물어봐야 한다. ‘나는 무얼 위해 살고 있는 거지?’ 마음속에서 답이 올라올 것이다. 자식을 위해서, 승진하려고, 돈 버는 재미로, 연속극 보는 재미로, 신에게 예쁨 받으려고... 꼭 고상할 필요는 없다. 일단 이런 답이 올라온 사람은 적어도 우울증에 빠지지는 않는다.
인생의 위기는 삶의 의미가 증발해 버리고 실존적 진공 상태에 빠졌을 때 온다. 돋보기를 쓰고라도 자기만의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세상사는 힘이 여기서 나오기 때문이다.
좋은 말이죠? 세상사는 힘은 어디에서나 쉽게 발견할 수 있답니다.
A Thought Of Sp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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